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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Oct 10. 2021

춘장대의 추억

           

 ‘요즘은 아이들을 많이 낳지 않으니 사촌들을 형제처럼 키우자.’ 이게 우리 집 큰 오라버니가 입에 달고 살던 말이다. 5남매는 모두 결혼해 가족을 이루며 사회 여기저기서 거의 전투적으로 살고 있었다. 삶의 현장은 전쟁터나 마찬가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도 만만치 않은 전투 역량이 필요한 시대였다. 요즘 사람들이 부르짖는 워라벨이라는 단어는 꿈도 꾸지 못했다. 가장들은 가정생활을 늘 뒷전에 둘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직장에서 정착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당연히 육아를 위해 쓸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 안팎은 경제 활동이 그야말로 호황이었다. 그 속에서 우리나라 역시 고군분투하는 나날을 보냈다. 

 지금처럼 각종 제도가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육아는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나만해도 일하는 엄마였으니 그 악전고투가 장난이 아니었다. 학원도 아닌 사설 보육시설에 아이들을 맡기고 출근해야 해서 늘 아이들에게 빚진 기분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여름휴가는 아이들에게 빚진 기분을 덜어낼 수 있는 최상의 기회였다.

 큰오빠는 어린 시절부터 지나칠 정도로 맏이라는 책임감이 강했다. 다들 독립을 한 다음에도 벗어나지 못한 숙명처럼 맏이의 짐을 지려는 경향이 있었다. 덕분에 우리들은 대가족과 함께 하는 남다른 추억들을 가지게 되었다. 

 그해에도 오 남매 가족들은 여름휴가를 같이 가기로 했다. 부모님과 5남매 가족들이 모여 식사와 숙박을 함께 해결하는 일이니 쉬운 건 아니었다. 큰오빠의 장인 장모님까지 함께 했으니 인원은 거의 중대급 이상이었다. 그중 내가 특별히 기억하는 여름휴가는 춘장대 해수욕장이다. 제안은 물론 큰오빠였으나 우리 모두 동의했다. 일단 공주에서 가까운 여산 휴게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당시에는 서해안 고속도로가 없어 공주에서 국도를 타고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독립하면서 부모님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다들 고만고만한 살림을 살다 보니 지금처럼 무슨 펜션이나 콘도를 구하기에는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런 시설은 지나치게 비싸고 지금처럼 다양하지도 않았다. 다행히 중고차라도 자동차는 집집마다 가지고 있었다. 가족들이 차량으로 이동하면 되니 그것만 해도 엄청 행운이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고속도로도 지금처럼 거미줄 같이 많지 않았다. 경부선과 호남선이 주축이었다. 우리 목적지는 호남선을 타고 가다 국도로 가면 되는 위치였다. 여산 휴게소는 경부선에서 호남선으로 갈아타면 얼마 가지 않아 있었다. 내 기억에 도로는 여름휴가를 가는 차량들이 많아 제법 붐볐었다. 간만의 가족 나들이에 모두 들떠 있었다. 

 우리는 춘장대 해수욕장에 어느 정도 시설을 갖춘 숙박시설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명색이 공주대학교 전용 시설이라고 했으니 그래도 일정 수준은 될 거라는 그런 믿음이었다. 그러나 숙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공주대학교라고 이름이 붙은 대형 텐트 하나가 전부였다. 드넓은 모래사장 위에 세워진 천막형 텐트였다. 헤아리기 힘든 천막들 사이에서 그걸 찾은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우리들은 망연자실했다. 워낙 대식구라 숙소가 비좁으면 민박을 하나 더 구할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사방이 다 뚫린 천막 하나에서 대식구가 먹고 잘 수는 없었다. 우리는 텐트에서의 숙식을 포기했다. 그리고 누군가 발 빠르게 해수욕장 주변 민박집을 구했다. 대가족이 숙박할 곳을 마련한 것이다. 

 더 재미있는 일은 가족 여행이라며 즐거운 기분을 떨치지 못한 운전자들에게 생겼다. 평소 하지도 않던 과속을 해 여름 특별 단속을 나온 고속도로 교통경찰에게 딱 걸렸던 것이다. 진원 아빠는 과속을 지나치게 해서 가끔 나를 기겁하게 만드는 일이 잦은 편이다. 고속도로에만 나가면 갑자기 질주 본능이 깨어나 나를 기겁을 넘어 식겁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는 의미다. 나는 아직도 중앙고속도로가 완공되기 전 안동에서 영주까지 새로 개통된 고속도로를 달릴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총 20킬로도 안 되는 거리를 시속 180킬로가 넘게 마구 달렸으니…. 과속을 단속하는 카메라 설치가 안 된 게 다행이지. 우리 차가 달릴 수 있는 최고 속도를 주행해 본 게 아닐까 할 정도였다. 진원 아빠가 대는 핑계가 더 황당했다. 가끔 과속을 해 줘야 차에 길이 든다나 뭐라나. 나는 자주 진원 아빠에게 당신은 가족들을 데리고 자동차 경주 대회를 나온 게 아니라며 징징거렸다. 

  A.J. 크로닌이 쓴 <천국의 열쇠>라는 소설 속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이 아직 열 살 미만일 때의 이야기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아들과 아내를 마차에 태우면 자신이 마차 운전을 잘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마구 몰아 댄다. 말 두 마리가 이끄는 마차를 아버지가 미친 듯이 몰 때마다 둘은 공포에 질려 마차 문짝을 잡고 부들부들 떤다. 

 나는 진원 아빠가 과속을 할 때마다 굳이 우리에게 운전 실력을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런 버릇이 쉽게 없어지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 버릇이 없어진 건 집으로 날아드는 범칙금 덕분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근데 그날은 엉뚱하게도 큰오빠와 막내가 과속으로 단속이 되었단다. 그 일에 제일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을 보인 사람은 누구일까? 당연히 진원 아빠였다. 두 처남들이 평소 운전을 얼마나 신중하게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더 있었다. 같은 장소는 아니라도 둘 다 과속으로 단속을 당했는데 결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춘장대는 충청도에 있다. 단속이 되자 신분을 밝힌 큰오빠는 ‘앞으로 조심하십시오. 교수님’ 하는 깍듯한 인사까지 받고 놓여났다. 그러나 막내는 노동부 공무원이라며 봐 달라고 읍소했지만 딱지를 끊었단다.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역시 동네에서 잘 먹히는 건 그 동네 교수님이 최고인가 보다고. 그 교통경찰이 공주대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며. 

 숙식이 다소 불편했지만 조카들과 우리 아이들은 춘장대 해수욕장을 모두 좋아했다. 바다는 물이 빠지면 수없이 많은 소라게가 갯벌을 가득 메웠다. 소라게를 그렇게 많이 본 건 나도 처음이었다. 집을 지고 다니는 게를 본 것도 나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남양만이 간척되기 전 거기 갯벌에도 게들이 우글거렸다. 사람 발소리가 들리면 바다를 향해 옆걸음으로 달아나던 헤아릴 수 없던 게들. 춘장대는 그 이상이었다. 소라게 잡기에, 수영에 아이들은 순간순간이 즐거웠을 것이다. 

 큰오빠는 조카들이 바다에 들어가 놀기 시작하면 제법 바다 멀리까지 나섰다. 아이들의 안전을 매의 눈으로 살핀 것이다. 햇살이 뜨거운 바다까지 나가 일부러 조카들을 지켜보는 이유를 처음에는 단순한 책임감이라고 생각했다. 속으로 학생들 인솔해서 온 것도 아니고? 뭘 저렇게까지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깊은 의식 속에 허무할 정도로 일찍 죽은 광택이 오빠에 대한 트라우마가 분명 존재할 것이라고 짐작된다. 

 오래간만에 모인 사촌들은 밤마다 바다에 친 텐트와 자동차 안에서 밤바람을 맞으며 자기들끼리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형제애 못지않은 사촌 간의 우애를 다질 기회가 저절로 생긴 것이다. 사촌들끼리 비슷한 나이들이 여럿 있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다양한 추억을 공유한 사람들이 후일 어려운 일을 겪게 되면 어떻게 행동할까? 그런 걸 확인해 볼 기회는 먼 미래 어느 날 왔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내드리는 장례식장에서 보여준 안동 권 씨 37대들의 일사불란함이다. 조카들은 마음의 여유가 없는 부모들을 대신해 그 모든 과정에 아무런 잡음 없이 할 일들을 나눠 맡았다. 혈육과의 아쉬운 이별의 시간을 정성을 다해 보낼 수 있도록 소리 없이 협조했다. 나는 그걸 지켜보며 세대가 이렇게 바뀌었구나 하며 대견해했다. 

 춘장대에서도 엄마는 가족들을 먹이기 위해 여기저기 다니시며 발품을 파셨다. 새벽에 들어오는 고기잡이배들을 찾아 싱싱한 횟감도 구해오셨다. 민박집에서 대식구들의 삼시세끼 챙기기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지금은 당시 여러 가지 정황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이 굶거나 애들이 밥을 못 먹어 허둥댄 추억은 없다. 뭔가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로 우리 모두 배 굶지 않고 주변 구경까지 잘했던 추억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부안 채석강도 그때 가 본 것 같은데 기억만 아스라하다. 

 “춘장대 간 것은 맞아. 한 번인가 두 번. 여산 휴게소에서 만나서 간 곳은 부안 상록해수욕장. 공무원 전용시설이야. 그 직전에 채석강이 있어 자주 들렀고. 부안은 두 번인가 세 번 갔었어. 시설이 비싸지도 않고 당시론 괜찮았어. 그 뒤에 내소사 들리거나 곰소 어시장 들려서 왔어. 거기서 젓갈 사서 엄마가 김장에 써보고 맛있다고 하셨지.”

 큰오빠의 말이다. 주관한 사람이 가장 잘 알겠지??? 난 채석강의 빼어난 풍광만 어스름하게 남아 있는데. 아마 맞는 것 같긴 한데…. 아쉽지만 그런 여름휴가도 작은 오빠가 중국 청도로 회사를 옮겨 이주하고 셋째가 미국 지사로 발령이 나면서 막을 내렸다.   

                                                                                                                

중국 칭다오에 있던 작은 오빠가 운영하던 공장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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