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 관양동에서의 나날이 그런대로 익숙해지던 날이었다.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 생겼다. 지금도 난 과거 정권의 폭압에 대해 필요악이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관계를 끊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난다. 폭압의 실체를 당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심각성을 잘 모른다. 그걸 당해 본 적도 없이 아는 척한다면 그거야 말로 주제넘은 소리다.
관양동 시절 집에서 언성이 조금 높아진다면 셋째 성적이 왜 그러냐, 그러다 학사 경고받는다는 잔소리 정도였다. 가끔 퇴근해 집에 가면 막내의 선배나 후배라는 친구들이 열려 있는 베란다 창문(친구들은 막내가 그렇게 들어가면 된다고 직접 알려줬다는 증언을 했다)을 넘어 들어와 있다 어색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하는 일이 별일이었다.
물론 엄마가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 둔 김치나 밑반찬이 통째 사라져 의심의 눈초리로 막내를 추궁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람들은 배고플 때 대개 공격적이 된다. 출퇴근길이 멀어 고난의 행군을 하던 내게 엄마의 맛깔난 반찬은 퇴근길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내 고픈 배를 채워 줄 반찬이 몽땅 사라진 걸 알고도 가만히 있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다소 언성을 높여 의심의 눈초리로 동생들을 추궁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모두 포기하고 말았다. 반찬 도둑에게 통이라도 찾아오라는 잔소리 정도로 그쳐야 했다. 혼자 자취하는 친구가 왜간장에 밥을 비벼먹는 걸 보고 김치나 밑반찬을 갖다 줬다는 말에 무슨 범인 잡듯이 추궁을 계속할 수 있었겠는가. 반찬이 통째로 사라져도 막내에게 영혼 없는 ‘잘했다.’는 칭찬 아닌 칭찬의 말로 마무리 짓는 수밖에.
그때는 가정 형편은 어려워도 학과 실력만 출중하면 지방 영재들이 갈 수 있는 대학이 서울대였다. 지금은 서울대를 가는 것도 경제 능력이 기본이니 세월이 참. 교육 사다리가 언제부터 끊어졌는지 씁쓸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모두 100년도 안 되는 시간을 살다 간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에도 순탄하던 인생이 갑자기 급회전해서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틀어지는 경우가 있다. 어린 시절은 부모의 사업 실패나 이혼 등으로 원치 않는 변화를 겪을 수 있다. 나이 들어서는 결혼이나 취업 등으로 본인의 뜻과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된 사람들이 허다하다.
이런 인생의 변곡점은 원하든 원치 않던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이 변곡점이 인생의 어느 시기에 오는가에 따라 결정적 방향타가 되기도 한다. 우리 집도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어려운 경제 상황이 따라왔다. 그러나 아버지의 실패가 우리 남매들의 삶을 뿌리째 흔들지는 못했다.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을 기본적인 실력들이 있었다. 다들 공부에 남다른 노력을 들인 데다 엄마의 교육에 대한 강한 소신이 우리들의 지지대로 부족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우리들의 노력도 나름대로 보답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평탄하던 삶에도 잔인할 정도의 위기가 온다. 개인의 잘못된 판단이나 실수 등에 기인하는 경우는 남의 탓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무자비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에 의해 아무 죄가 없는 개인의 삶이 파괴당하는 경우. 그건 개인의 탓이 아니다. 안타깝지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그런 비극이 일어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내가 대학시절에도 일부 학우들이 그런 상황에 처했다. 후배 하나는 노점을 하는 소년 과부의 무남독녀였다. 시위 현장에서 붙잡혀갔다 돌아온 후배는 무슨 고문을 당했는지 정신줄을 놓았다. 결국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지금도 학과 사무실로 찾아와 울부짖던 후배 엄마의 억장이 무너지는 울음소리가 가끔 떠오른다.
어느 날이었다. 막내가 갑자기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다 자취를 하는 친구 집에서 자고 오는 일이 있긴 했다. 하지만 아무 연락도 없이 며칠씩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공부나 일상생활이나 성실의 아이콘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 하나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복형사라는 사람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중죄인을 잡으러 온 것처럼 당당하게 모녀만 있는 집에 신발도 벗지 않고 막무가내로 들어섰다. 고압적으로 막내의 방을 물어보더니 아무 허락(무슨 명목의 압수 수색이라는 종이 한 장도, 신분증조차 보여주지 않고)도 없이 마구잡이로 뒤져대기 시작했다. 책장의 책과 노트를 함부로 빼서 방바닥에 던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심장이 덜컥거렸다.
엄마와 나는 그냥 얼어붙었다. 시국은 아직도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광주에서 5.18로 난리가 났고 군인들이 사람들을 함부로 죽였다는 소문만 자자했던 게 떠올랐다. 엄혹한 시절이니 엄마와 내가 바닥에 주저앉을 만큼 놀란 게 당연하다. 막내는 그 흔한 운동권이 아니었다. 중학생 때 반공 일기 쓰기나 그 비슷한 소재의 독후감으로 상을 챙겨 오는 녀석이었으니. 나는 지금도 확언할 수 있다.
우리 남매들은 엄마의 혹독한 고생을 목격하며 자랐다. 당연히 운동권에서 멀리 비켜나 있었다. 우리들 모두 방과 후에는 곧바로 집에 돌아와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심지어 큰오빠는 모 여자대학 시간 강사를 하던 시절에도 오후가 되면 가게로 나가 자전거 배달을 도왔다. 배달을 갔다 제자들을 만나 민망한 일도 겪었다. 배달 바구니를 나르는데 우연히 만난 여학생들이 어리둥절해하며 인사를 하더란다. 하긴 몇 시간 전 자신들을 가르쳤던 교수님이 자전거로 야채 배달을 하고 있으니 인사를 하면서도 얼마나 의아하게 느꼈을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우리들은 다소 내성적인 편이다. 남들 앞에 나서는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다들 샌님 스타일이었다. 운동권이 되기에는 여유 있는 시간도, 성격도 적절치 않았기에 그런 활동을 할 꿈조차 꾼 적이 없었다.
사복형사들은 그날 책갈피까지 샅샅이 훑고 대학노트까지 이 잡듯이 뒤져댔다. 별 성과가 없자 교과서로 쓰던 책 몇 권을 허락도 없이 가져갔다. 무슨 이유로 왜 왔는지 아무 설명도 없었다. 물론 미안하다는 소리 한마디 없었다. 그냥 득달같이 들이닥쳐 함부로 뒤져대더니 사과 한 마디 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제야 엄마와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막내를 찾아야 했다.
간신히 연락된 막내 친구들이 관악경찰서에 잡혀 있을 거라고 알려 주었다. 며칠 전 학교 도서관 옥상에서 누군가 삐라를 뿌렸단다. 짭새(당시 각 대학에는 사복형사들이 상주해 있었다)들이 전단을 뿌린 학생을 잡지 못하자 도서관에서 중간고사 공부를 하던 학생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갔는데 거기에 막내가 있다고 했다. 특히 학생증 검사를 해서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과 위주로 잡혀갔단다.
막내는 동양사학과였다. 법대를 가라는 아버지의 강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과를 갔으니 열심히 공부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운동권도 아니고 평소 그런데 관심도 보이지 않던 동생이라 우리는 그런 일로 경찰서까지 끌려가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결국 놀라 드러눕게 생긴 엄마를 대신해 내가 관악경찰서로 찾아갔다. 어설프게 내 교육공무원 신분증을 꺼내 형사에게 보여주었다. 동생의 이름을 대고 여기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요청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를 악물었다. 혹시 그 소문 자자한 남산에 끌려갔을까 봐 겁이 났다. 그러나 형사들은 아무것도 확인해 주지 않았다. 심지어 눈도 마주치지 않고 돌아가라는 소리만 반복했다. 형사들의 불쾌한 태도 때문이었나 보다. 졸아 있던 가슴에 순간 불이 확 일어났다. ‘나도 공무원이지만 민원인들을 빚쟁이 치우듯 대우하지는 않는다. 왜 여기 동생이 있는지 확인을 안 해 주느냐. 내 동생은 데모하러 다니는 애가 아니다.’고 언성을 높였다. 물론 결과는?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 취급만 당하고 경찰서에서 쫓겨났다.
막내는 불법 구금 2주 만에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시위를 구경하면서 노래는 따라 했다는 자술서를 쓰라.’는 끈질긴 회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곧이어 막내는 무기정학을 당했다. 언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을지 끝을 알 수 없는.
그 시절은 그런 억울함을 어디 항의하거나 호소할 곳도 없었다. 내 생각에 6.25 전쟁 통에 서울 대학생이란 이유로 3개월도 안 되는 기간 강제로 떠맡았던 아버지의 전력이 수십 년 후 막내아들의 무기정학에 영향을 준 건 아닐까 싶다. 막내는 그 일 때문에 관악 경찰서에 끌려가서 자신이 요 관찰 대상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6.25 이후 3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연좌제는 멀쩡히 살아 아무 죄도 없는 자식들의 목줄을 흔들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큰오빠가 취업했던 공주대학교는 국립 사범 대학교였다. 큰오빠의 임용에는 두 분의 조력이 있었다. 유교수님과 의구 아저씨다. 유교수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정신문화 연구원장을 지낸 분이시다. 큰오빠는 그분의 애제자였다. 유교수님은 오빠의 결혼식 주례로 오셔서 엄마와 내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얼마나 반짝이는 눈으로 수업을 열심히 듣는지. 권 군에게 첫 수업시간에 반했다'라고. 이미 교사였던 나는 교수님의 그런 마음을 넘치도록 이해할 수 있었다. 의구 아저씨는 아버지의 대학동창이셨다. 단신 월남해서 생계가 어려워 공부하기가 힘들어졌을 때 아버지의 도움을 많이 받으셨다고 한다. 나중에 행정고시에 합격하시고 교육부로 발령 나셨다. 아저씨는 어렵게 공부하던 시절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우리들이 공무원으로 임용되는 걸 적극 도와주셨다. 내가 임용되던 해 교육부 감사실장으로 근무하고 계셔서 내 임용 순위 등도 알려주셨다. 덕분에 큰오빠와 나는 교육공무원으로 무사히 임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셋째가 카이스트 대학원에 진학하려 했을 때와 막내의 무기정학은 손을 쓸 수 없었다. 신원보증의 기회도 없었다. 당시 서울대 이공대에서 카이스트 대학원 진학은 하향 지원이었다. 셋째는 가정 형편이 어려우니 국가에서 전액을 지원받는 카이스트에 입학하려고 서울대 대학원 진학을 포기했다. 하지만 건강상 문제가 있다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입학이 좌절되고 말았다. 지금까지 어디가 아프다고 병원에 입원 한 번 하지 않고 잘 살고 있는데. 유치환의 <바위>를 책상에 붙여 놓고 공부하던 셋째는 그렇게 대학원 진학의 꿈을 접었다. 결국 중소기업인 한국 컴퓨터에 취업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원은 한국 컴퓨터에서 미국 지사장으로 파견되어 실리콘 벨리로 가 근무할 때 그곳에서 다녔다. 우리 가족에게 연좌제의 서슬은 여전히 시퍼런 낙인이었다. 80년대에도 사회는 정체된 채 앞으로 나가지 못한 모양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죄도 없는 학생들을 학교에서 몰아낸 인간들은 어떤 벌을 받았을까? 사회에서 매장되었나? 반대로 아직도 우익 보수라며 큰소리칠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았던 그들이 아직도 멀쩡한 사람을 빨갱이로 거침없이 몰아 대며 보수 단체 시위를 주도한다면. 그 죄의 대가는 도대체 언제 받는가. 아직도 전직 대통령이라며 세금으로 각종 혜택을 받고 있는 인간을 생각하면 울화가 저절로 끌어 오른다. 그 정권의 막전막후에서 자신의 배를 불리고 엄청난 부를 축적해 부끄러운 줄 모르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인간들도.
나는 막내의 경우와 비슷한 처지였던 똑똑한 젊은이들이 오래전부터 휴전선 인근 군대로 내몰리고 있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도 주변에 그런 경우는 아주 흔했으니까. 그 당시 휴전선 인근 근무 조건이 나쁜 곳에 갑자기 끌려온 서울대 생이 많았다는 건 소문이 아닌 사실이었다.
학교에서 무기정학을 당하기 전까지 막내에게 어려움이란 무엇이었을까? 막내는 성적이 숫자로 표시되고 등수가 드러나는 중학생 시절부터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엄마에게 각종 상장을 안겨주고 자장면을 사 내라는 일이 일상일 정도로 공부가 특기이자 취미였다. 막내 책상 서랍에 가득 들어있던 상장은 종류도 다양했다. 머리가 특출 나게 좋았던 작은 오빠가 어려서부터 영재성을 드러냈다면 막내는 중학생이 되어서야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거기에 타고난 성실함까지 갖추고 있어 내게는 공부가 가장 쉬운 사람으로 보였다. 막내에게 학교는 놀이터이자 자기 역량을 인정받는 막강한 울타리였다.
막내의 무기정학은 자신의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함정에 빠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아들들을 판검사로 만들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막내에게 집요할 정도로 법대를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아버지의 집요한 설득을 뿌리치고 동양사학과를 지망했으니 무기정학을 당하지 않고 졸업했다면 당연히 사학자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막내가 누구보다 열심히 학자의 길에 매진할 사람이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소속을 중시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나 역시 학교를 퇴직하기 전에는 퇴직과 동시에 엄청난 자유가 생기는 줄 알았다. 식구들이 나가고 나면 혼자 햇살 가득 들어오는 창가에 기대 음악을 들으며 향기로운 차를 음미하는 시간을 즐길 수 있을 거라는. 그러나 34년 동안 내가 짐 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나의 공고한 울타리였다는 걸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퇴직 후 1년 이상 나는 학생들의 등하교 시간에 밖에 나가는 걸 꺼렸다. 이상했다. 심리적으로 생기는 위축감이 장난 아니었다. 웃긴 소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울증 증세까지 나타날 정도였다. 다행히 내가 그걸 극복하는 데는 친구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막내는 든든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 주던 학교라는 조직으로부터 갑자기 퇴출당했다. 그런 부당함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의 가장 낮은 곳으로 뛰어들었다. 꿈에도 가 본 적도 갈 생각도 없었던 곳이었다. 경제 논리로 압박받는 사람들이 있는 노동 현장으로 말이다.
우선 집을 나갔다. 부천 어디라고 했다. 신분을 숨기고 위장 취업을 한 것 같았다. 그 당시는 그런 학생들이 꽤 있었다. 학교를 쫓겨난 똑똑한 학생들이 맨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을까? 산업화의 그늘은 어디에나 있었다. 빈부의 양극화와 노동착취는 이미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어떤 결심이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거기까지 가게 된 과정도 모른다. 내가 아는 건 막내가 그 가운데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들었다는 거다. 그리고 문민정부로 정권이 완전히 바뀌기 전까지 그 현장에서 고군분투했다는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다.
사람이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누가 가장 괴로울까? 나는 본인이 가장 괴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주변 사람들도 힘이 들지 않는 건 아니다. 특히 엄마의 낙담과 괴로움은 말해 무엇하랴. 노점 장사를 하시는 틈틈이 막내아들을 찾아 여기저기 발품을 파셨다. 막내를 만나기도 하시고 못 만날 경우도 있다며 낙담해서 돌아오신 날도 꽤 있었다. 그러나 세상 누구보다 착하고 똑똑한 아들의 안타까운 상황을 어찌하겠는가? 우리 남매들은 어려서부터 다들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했다. 그러나 막내는 유난히 독립적인 성격이었다. 아버지의 권위조차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런 막내아들의 결심을 엄마도 꺾을 수 없으셨을 것이다.
그 어느 날의 일이다. 막내가 있는 울산에 다녀오신 엄마가 우리 집에 오셨다. 아마 내 조카딸인 정후의 돌을 챙기러 가셨던 모양이다. 울산 터미널에 내려 우연히 뉴스를 보게 되셨단다. 마침 지역 뉴스에서 울산 지역 노동자들이 데모를 하는 장면을 방영하고 있는데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른 채 노동자들 앞에 서서 데모를 주도하고 있는 막내의 얼굴이 나오는 걸 보셨다며 한숨을 쉬셨다.
가출한 막내는 직업학교를 다녀 용접공 자격증을 따 울산으로 내려갔다. 그런 막내를 찾아갔다 텔레비전 뉴스로 아들 모습을 먼저 보신 것이다. 엄마는 용접공 자격증까지 따 울산까지 가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던 터라 많이 낙담하셨다. 더구나 아들이 용접공으로 일하며 몸 여기저기 데인 자국이 있는 걸 보고 오셨으니. 잠이 제대로 오지도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우리들이야 본인 소신대로 사는 게 당연하니 놔두자며 많이 포기한 상태였지만 엄마만은 마음이 얼마나 씁쓸하셨을까.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우리 모녀를 만나러 왔다. 막내가 근무하는 회사의 과장이라는 분이었다. 사실 우리는 막내가 어떤 이름의 회사에 다니는지도 몰랐다. 그냥 용접공으로 취업했다는 정도가 아는 것의 전부였다. 그분은 이제 정권도 바뀌어 복학도 할 수 있으니 제발 막내를 강제 퇴사시킬 수 있게 가져온 서류에 서명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남들은 가지도 못하는 서울대인데 지금이라도 복학하는 게 어떠냐고 말이다. 제발 부탁한다면서 모녀에게 읍소를 했다.
지금에야 말이지만 당시 나는 불을 뿜는 용처럼 막내가 화를 내지 않을까 약간 겁이 났다. 그러나 더 이상 막내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엄마와 나의 사인을 가지고 돌아간 뒤 막내는 바로 강제 퇴사(해고?)가 된 모양이었다. 다행히 우리 집에 찾아와 난리를 부리는 일은 없었다. 내가 보기에 누가 퇴사하도록 뒤에서 조종을 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학교 복학은 쉽지 않았다. 무기정학으로 학교를 쫓겨나는 일이 어이없을 정도로 쉬웠던 것에 비하면 말이다. 학교는 이미 구제 기간이 지났다며 복학 신청을 받아주지 않았다. 다행히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병원을 운영하던 분이 계셨다. 사당 의원 병원장이시다. 그분은 막내에게 가짜 진단서를 발급해 주셨다. 결핵 치료로 복학을 하지 못했다는 진단서였다. 병원장의 특별한 소신이 없었다면 이런 진단서를 떼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막내는 복학했다. 졸업을 하기 전에 가스공사에 합격해 취업도 했다. 재미있는 건 취업을 한 가스공사 지사가 안양 관양동 우리 집 맞은편이었다는 거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회사를 다니면서 행정고시 공부를 했다. 숙직을 자원해 가면서까지 밤낮 없는 노력을 하더니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부천에서 함께 노동운동을 하던 친구들에게서도 속속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외무고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심지어 3가지 고시를 모두 패스한 친구도 있다고 했다. 아직도 사법고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셨던 아버지가 막내를 압박해도 소용이 없었다. 무조건 노동부에 가야겠다고 했다. 해고로 등지고 올 수밖에 없었던 노동현장을 이제 정부 행정 차원에서 도와야겠다고 결심한 게 가장 큰 이유였을 거라 생각한다. 큰오빠는 기왕이면 교육부로 오라고 권유했다. 그걸 마다한 걸 보면 그 이유가 맞을 거라고 본다.
1998년 우리나라 경제에 엄청난 먹구름이 끼었다. IMF 사태가 온 것이다. 나는 그 무렵 잠실중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들어서는 순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무실 가운데 대형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강제 해직을 당해 전 국민이 힘들어하던 시기였다. 뉴스는 노동부 브리핑 중이었다. 브리핑하는 사람이 내가 잘 아는 얼굴이었다. 막내였다. ‘어?’ 하며 텔레비전 앞에 서서 막내를 구경했다. 내 기억에 브리핑 내용은 전혀 없다. 솔직히 막내 얼굴만 선명하게 보였다. 또박또박 노동부의 입장을 전하는 모습에 순간 엄마가 울산터미널에서 보셨을 장면이 겹쳐 보였다.
83년 3학년 때 무기정학, 90년에 복학. 94년에 행정고시를 통해 노동부에 입사. 우리 막내가 겪은 일은 우리나라의 현대사와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문민정부의 끝에서 인생의 강력한 태클인 변곡점을 극복하고 학자가 아닌 공무원으로 살고 있는 동생을 보며 저것도 삶의 의미는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생겼다. 동생이 가는 길에 대한 누나로서의 자부심도 함께.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