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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Oct 10. 2021

엄마에게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가 서초동에서 안양 관양동 아파트로 이사 간 직접적 원인은 가족 해체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 가족에겐 화성 뱅골에서 제기동으로 이사해 정착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화성 전답을 팔아 서울살이를 시작하는 자체가 모험이었다. 아마 우리들의 교육에 대한 확고한 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제기동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사대문 안이 아니었다. 서울 변두리였다. 내가 중학생일 때다. 일부러 하교할 때 홍릉 근처에서 버스를 내렸다. 교복을 입은 채 도로 주변 인도에 앉아서라도 구경하고 싶은 게 있어서였다. 제기시장 근처 개천가 다리를 건너 홍릉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따라 승마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호기심과 부러움이 섞인 구경이었다. 특히 승마복을 멋지게 차려 입고 말을 타는 여자 기수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면 눈앞에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개천을 끼고 무허가 판잣집이 도열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철없고 어린 마음에도 빈부의 격차는 심각하게 느껴졌다. 

 제기동으로 이사한 시기는 우리들의 학업과 관련이 있었다. 그 엄청난 미션을 엄마는 혼신의 힘으로 감당하셨다. 안양으로 이사할 무렵은 우리들의 교육도 하나씩 마쳐지고 취업을 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엄마 숨통이 트이는 게 맞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학비가 싼 국립대를 들어간 셋째와 막내 두 아들의 뒷바라지조차 버거울 정도가 되었다. 우리 엄마에게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큰오빠가 공주대학교로 부임해 가족을 데리고 내려간 다음 우리는 서초동 인근의 방배동으로 다시 이사를 했다. 역시 2층 전셋집이었다. 거기서 산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 걸 보면 아주 짧은 기간이었을 것이다. 작은 오빠도 얼마 안 돼 결혼을 하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오빠가 취업한 의류회사는 지금은 PAT라 불리는 독립문(?)이었다. 작은 오빠 역시 뭘 가지고 독립한 건 아니었다. 부산에 있는 광안리 해수욕장 근처에 월세를 얻어 살림을 차렸다. 

 작은 오빠가 부산에 살 때 가 보니 큰오빠 네 장기에 있던 집과 비슷한 단칸방에서 인경이가 각종 말썽(?)을 부리며 자라고 있었다. 올케가 잠시 한 눈을 팔라치면 어느새 주인집 안방에 들어가 서랍까지 열어 물건을 꺼내 심지어 오줌(?)까지 싸는 온갖 저지레를 했단다. 마음씨 좋은 집주인 덕분에 작은 올케가 크게 불편해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서초동이나 방배동에 살았던 시간은 기간이 짧아서인지 기억이 흐릿하다. 서초동은 당시 꽃동네라고 불렸다. 그에 걸맞게 여기저기 비닐하우스 화원이 꽤 있었다. 우리가 살던 집 근처 공터에는 키가 큰 아카시아 나무가 있었다. 봄이 되니 나무가 커서인지 아카시아 꽃향기가 창문을 넘어 방으로 들이닥쳤다. 그 향기는 뱅골 복숭아 과수원 길로 자주 나를 데려갔다. 과수원 주변 아카시아 꽃을 꺾던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그러나 2층 내 방 처마에 벌들이 집을 짓는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가을이 되자 벌들은 한기를 피해 내 방으로 몰려들었다. 누워서 잠을 자려고 전등을 꺼도 벌들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윙윙거렸다. 그런 곤경에 처했을 때 휘적거리며 도움을 주는 건 주로 까칠하지 않은 셋째였다. 내가 소리를 지르자 바로 달려왔다. 벌을 퇴치하는 도우미로. 방에 들어온 벌들을 내쫓고 호시탐탐 방으로 기어들려고 기를 쓰는 말벌들까지 쫓아냈다. 나중에는 창턱 아래 벌들이 불법으로 조성한 큼직한 벌집까지 떼어내 처리했다. 

 서초동은 이제 강남의 전설이 시작되려는 초기였던 만큼 집값이 나날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제법 여기저기 있던 녹지도 강남대로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우뚝우뚝 건물들이 들어섰다.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더 버틸 여력도 이유도 없어졌다. 

 우리가 방배동에서 안양 관양동으로 이사했을 때 주변은 이런 상황이었다. 막내의 말이다. 

 ‘관양동 연립. 삼우아파트 2동짜리. 엄마가 대치동 청실아파트 단지에서 채소 장사를 하시면서 돈을 모아서 샀지 아마. 당시 평촌은 논밭에 비닐하우스만 가득하고 개천 건너에는 대한전선 공장이 있어 약간은 시골스러운 정취도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상전벽해가 됐어. 아파트 단지가 가득하니. 나는 대학을 주로 거기서 다녔어.’

 이미 생활인이자 가장이었던 큰오빠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좀 더 현실적이다.

 ‘관양동 연립은 소형 건설 회사에서 소개했는데 대출이 많았어. 월마다 분담금을 냈는데 다 갚는데 십 년 정도 걸렸던 것 같아. 엄마가 그 때문에 계속 일을 하셨어.’

 막내는 시골스러운 정취가 있다고 했지만 그냥 밭이 있던 곳에 달랑 아파트만 두 동 지은 곳이었다. 80년대 초반. 아직 평촌은 터를 닦지도 않았다. 과천은 정부청사를 이전하기 위해 조금씩 터가 닦이고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우리 집이 있던 개천 건너 대한전선의 거대한 굴뚝에서 나오던 연기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지금이라면 매연의 심각성을 주장할 테지만 당시는 그런 관심조차 무의미하던 시절이었다.

 우리가 관양동으로 이사 갔을 당시 그곳은 우리 연립 외에는 거의 논밭이었다. 아파트 입구는 포장이 되지 않았다. 비 오는 날이면 꽤 멀리 진흙길을 걸어 나가야 버스를 타고 안양으로 나갈 수 있었다. 비 오는 날의 그 진흙길은 나를 상당히 곤혹스럽게 했다. 적어도 흙투성이 상태로 출근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안양 시내로 버스를 타고 나가야 아현동으로 가는 좌석을 갈아탈 수 있었다. 지금처럼 전철이 연결되어 있기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밤이면 대학원을 다녔기 때문에 출퇴근길은 힘겨운 미션이었다. 환승 제도도 없던 시절이라 좌석 버스와 일반 버스 요금을 번갈아 내야 하니 차비도 장난이 아니었다. 

 국어는 주요 교과라고 아침저녁으로 보충 수업까지 하던 시절이었다. 거의 무료 강좌였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인 연합고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요 교과 교사는 빼박이었다고나 할까. 오후가 되면 다리가 퉁퉁 부어도 월급은 정말 쥐꼬리였다. 한 학기 대학원 학비가 60만 원이었는데 거의 두 달 월급이었다. 

 내가 임용되었을 때 하필이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던 사람들이 정권을 잡았다. 아이러니하지만 비도덕적인 사람들이 한 일 중 하나가 도덕교육의 강화였다. 뜬금없이 학교에 윤리부를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학교 교사들을 옥죄기 시작했다. 쥐꼬리 월급은 그대로 두고 교사들의 높은 도덕성은 강요한 것이다. 기존에 학교에 근무했던 교사들은 부족한 월급을 과외로 때웠다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주요 교과 교사들 중 일부는 보기에 과하게 살림을 불린 분들이 꽤 있었다. 막 정부청사가 옮겨가는 과천에 몇 채의 아파트를 산다던가 심지어 영어나 수학교사들 중 제법 연세가 있는 분들은 빌딩이나 버스 같은 운송회사 지분까지 있다며 자랑했다. 좋은 전례는 아니지만 그분들은 자녀들 양육도 우리처럼 갑자기 오른 인건비로 고군분투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적어도 가정부를 두고 자녀를 양육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안양에 살 때는 이미 가족이 단출해졌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길거리 장사를 마치고 돌아오시면 저녁을 먹고 가끔 나와 개천을 따라 늘어선 논밭 주변 산책을 다녔다. 어느 날은 어두워진 콩밭 주변을 걷다 이런 말씀도 내게 해 주셨다. ‘밤이면 콩밭의 콩잎들도 잠을 잔다고.’ 과연 콩잎들을 보니 모두 잠을 자고 있었다. 탄소동화 작용을 할 필요가 없는 콩잎들이 축 늘어져 있는 걸 그렇게 표현하신 것이다. 그 모습을 잠을 잔다고 표현하는 엄마의 감성은 당시에도 나를 꽤 감동시켰다. 과학적인 지식보다 자신의 감성으로 터득한 지식을 딸에게 전수하는 게 어떤 건지 그때 깨달았다. 이렇게 보면 내가 국어 선생이 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이도 있고 장사하는 게 힘드시니 이제 그만 접는 건 어떠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는 내게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나는 장사를 하면서 단순히 채소만 파는 게 아니라 사랑도 같이 판다고. 그래서 별로 힘들지 않다고.’ 지금도 노상에서 장사를 하시는 분들을 보게 되면 저분도 우리 엄마처럼 물건에 사랑을 얹어 파실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엄마에게는 아직 학업을 마치지 못한 아들들이 있었다. 취업은 했더라도 힘들게 가정을 꾸려가는 자식들에게 기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다. 엄마의 고생을 목격해 온 데다 건강도 걱정이 되었던 나로서는 당시 들었던 이 말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비록 자신이 하는 일이 남들이 선망할 만한 일은 아니더라도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로 그것을 대해야 하는지 배운 것이다. 내게 닥친 상황과 처지가 아무리 힘들어도 사랑을 잃지 말고 진심을 담아서 해야 한다는 것을. 

 최근 스웨덴 작가의 <오베라는 남자>라는 책을 읽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작가의 말까지  유심히 읽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작가는 아버지 유전자의 일부라도 제대로 가진 아들이 되는 게 희망이었다고 썼다. 그런 아버지를 가졌다는 게 부러웠다. 감동이 되었다. 사회적으로 봤을 때 엄마와 내 직업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취업했을 때부터 나는 선생님이었다. 자부심을 가져도 될 만큼 사회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부러움이었다. 자식이 부모의 좋은 점을 받아들여 모두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는 쉽지 않다. 부모가 된 지금은 인생의 선배로서 자녀의 기대치를 충족하는 부모가 되기는 더 힘들다고 느낀다. 그래서 부러웠던 모양이다. 

 나의 엄마는 배움이 우리보다 적었다고 자녀의 기대치보다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훨씬 좋은 학벌을 가진 아버지에 비해 더 폭넓은 지적 능력과 책임감 그리고 소통 능력이 뛰어나셨다. 대인관계가 좋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도 열심이셨다. 치매로 많은 것을 잊어가셨지만 나를 놀라게 한 일이 있다. 거의 삶의 말년까지 엄마는 수입을 얻는 방법을 찾으셨다. 그걸 보면서 나는 어떻게 인생의 후반기를 보내야 하는지 많이 배우고 깨달았다. 

 주변 친구들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의외로 놀라는 경우가 많다. 특히 엄마와의 관계에 깊은 상처를 받은 친구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자라면서 남자 형제들과의 차별은 물론 나이 들어 딸에게 말과 행동으로 상처까지 주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엄마들도 있었다. 딸을 호구처럼 부리며 습관적으로 닦달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이가 없다 못해 충격까지 받을 정도였다. 그래서 청소년기에 다소 고생을 하고 자랐다고는 해도 엄마에 대한 추억을 행복하게 되뇔 수 있는 내가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오늘도 하는 모양이다.          


                                          자두                      이상국

 

                          

 나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대학 보내 달라고 데모했다

 먹을 줄 모르는 술에 취해

 땅강아지처럼 진창에 나뒹굴기도 하고

사날씩 집에 안 들어오기도 했는데 

아무도 아는 척을 안 해서 밥을 굶기로 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우물물만 퍼 마시며 이삼일이 지났는데도

아버지는 여전히 논으로 가고

어머니는 밭 매러 가고

형들도 모르는 척

해가 지면 저희끼리 밥 먹고 불 끄고 자기만 했다

며칠이 지나고 이러다간 죽겠다 싶어 밤 되면 식구들이 잠든 걸 확인하고

몰래 울 밖 자두나무에 올라가 자두를 따 먹었다

동네가 다 나서도 서울 가긴 틀렸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낮엔 굶고 밤으로는 자두로 배를 채웠다

내 딴엔 세상에 나와 처음 벌인 사투였는데

어느 날 밤 어머니가 문을 두드리며

빈속에 그렇게 날 것만 먹으면 탈 난다고

몰래 누룽지를 넣어주던 날

나는 스스로 투쟁의 깃발을 내렸다

나 그때 성공했으면 뭐가 됐을까 자두야    

        

                        설날 강도 방죽에서 - 스케이트를 신고 한복을 입고 계신 분이 아버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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