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밤새 찬바람이 불었다. 대지는 꽝꽝 얼어붙었다. 골목길을 오가는 바람이 얼마나 매서운지 창문이 쉴 새 없이 덜컹거렸다. 누가 잡아서 흔들어댄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창문을 열어 골목을 내다보았다. 설핏 내린 싸라기눈이 바람결에 이리저리 날리는 게 보기만 해도 추워 보였다. 창가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다 바람 소리에 걱정이 되어 자꾸 밖을 내다보았다. 새벽시장을 가셔야 하는 엄마 걱정이었다.
엄마는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경동(청량리) 시장이나 용산 시장을 가셨다. 안방 문이 열리고 철로 만든 쪽대문 소리가 삐걱댄 다음에는 내가 잠든 방이 연해 있는 골목길에 엄마의 자박 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찬 겨울바람을 막을 옷이라고는 털스웨터와 목도리에 간편복인 몸빼가 전부였다. 털스웨터는 구멍이 숭숭 난 말만 털이었다. 거의 방한이 되지 않았다.
잘 사는 집 사람들은 당시에도 양모로 만든 코트를 입고 다녔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언감생심이었다. 옷에 돈을 쓸 여유가 없었다. 특히 엄마 당신이 입을 옷을 마련하기 위해 쓸 돈은 항상 우선순위의 맨 아래에도 끼지 못할 정도였다.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 년에 쉬는 날이라야 다섯 손가락 정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악착같이 돈을 버신 이유는? 말해 무엇하랴. 나는 아직도 찬바람이 불며 골목골목에 내려 쌓이던 그날 밤의 싸라기눈을 기억한다. 지금도 가끔 제기동 집 방에서 그 밤에 내다본 창밖 풍경을 떠올린다. 방풍은 잘 되지 않더라도 내 방바닥 아랫목은 연탄을 아끼지 않아 뜨끈뜨근 했다.
우리들이 나름 지독하게 공부라는 걸 하게 된 배경에는 눈앞에 보이는 엄마의 무한 고생이 있었다. 물론 엄마는 자신의 고생을 알아주는 자식들이 있어 고생스럽지 않았다고 하셨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 생각은 많이 달랐다. 엄마의 고생은 우리들이 목격한 것만으로도 두고두고 죄책감을 가질 정도였다. 우리들의 겨울 추억은 나름 따뜻한 기억이 많다. 그것에 비해 엄마의 겨울은 말 그대로 사투에 가까웠다. 칼바람이 부는 골목을 지나 꽤 걸어야 새벽 버스를 타는 정거장이 있었다. 종암 초등학교 후문 쪽을 지나 곧바로 내려가면 고려대학교 공과대학 인근에 있는 버스 정류장이었다. 그 부근에서 엄마는 날마다 새벽 버스를 타셨다. 지금 누구나 겨울이면 입는 두툼한 패딩은 구경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그냥 털실로 짠 스웨터가 유일한 방한복이었다. 겨울 칼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그걸 여미신 채 다니셔야 했다. 그래도 고생이라 여기지 않으셨다.
엄마는 자주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새벽 버스를 타고 용산 시장으로 경동 시장으로 다니실 때 꼭 버스 맨 앞좌석에만 앉으신다고. 당시 버스들은 냉난방 설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출입문이 있어 더 추운데도 맨 앞을 고집하신 이유에는 강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직접 내게 해 주신 이야기다. 자식들이 누구보다 앞에 서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라고.
생선 한 마리를 사도 그 가게에서 가장 크고 싱싱한 놈으로 고르셨다. 돈을 더 주더라도 자식들에게 먹일 것을 싸구려 허드레로 사지 않으셨다고 하셨다. 자신은 시장에서 온갖 사람을 상대로 야채를 팔며 고생을 해도 자식만은 남들에게 대접받는 자리에 우뚝 서기를 바라는 그런 염원. 내가 부모가 되니 엄마의 심정이 더 이해가 된다.
고등학생이 된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엄마가 새벽시장에 나가는 시간에 일어나 불을 켜고 책상에 앉았다. 다소 늦긴 했지만 내 성적이 수직으로 상승한 시기는 그때부터다. 아마 엄마의 고생을 목격하고 그렇게 힘들게 번 돈으로 공부한다면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철이 들 무렵이었던 것 같다. 비록 기초가 부족해 영어나 수학에 고득점을 내지는 못했지만 암기와 이해를 중심으로 하는 과목은 점차 자신감을 회복해 갔다. 나중에는 책 한 권의 암기도 어렵지 않았다. 대학에 가서는 고등학교에서 익힌 암기 능력이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
우리들에게 암기는 익숙한 단어다. 당시만 해도 학교 공부는 주로 이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심지어 우리 집에서조차 이 방식이 지배적이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영어 교과서를 몽땅 암기하라고 강조하셨다. 큰오빠는 중학교 1학년 영어 선생님으로 아버지의 방식을 고수하는 분을 만났다고 했다. 그 선생님의 별명은 ‘미친개’였다. 그분은 영어 교과서를 몽땅 암기시키셨다. 수업시간에 아무나 지적해서 암기를 잘하지 못하고 더듬거리면 커다란 손으로 바로 매타작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너!’라는 지적을 당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경험을 자주 했다는 것이다. 지적당하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줄줄 나오게 암기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나. 그 선생님 덕분에 영어 교과서를 몽땅 암기했다고 했다. 지금이라면 무자비한 폭력 교사로 신문에 나는 것은 물론 당장 교단에서 내려와야 할 일이다. 하지만 덕분에 영어로 해야 할 고생을 안 할 수 있었다는 게 큰오빠의 지론이다.
아버지의 방법을 온전히 받아들인 사람은 막내다. 중학교 영어 교과서 3권을 몽땅 암기해 날 놀라게 했다. 그 덕분에 고학년이 되어서는 영어에 고생을 하지 않은 것 같다. 막내는 대학에 입학해 선배에게 1:1로 배운 일어, 고등학교 제2 외국어로 배운 독어까지 3개 국어에 나름 출중한 실력을 쌓았다. 나는 그게 많이 부러웠다. 내가 석사 과정을 밟으면서 영어 시험 통과에 들인 노력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아마 암기 능력이 부족했으면 석사 학위를 받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다.
엄마의 고생은 긴 시간의 노동에서만 찾을 일은 아니다. 우리들을 위한 학자금 마련을 위해 엄마는 나름 아이디어를 짜내고 본인의 노동력을 활용하여 수익을 만드는데도 온갖 노력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작은 이익에 충실했다면 엄마는 더 큰 이익을 낼 수 있는 일을 꾸준히 찾으신 편이다. 나는 자주 엄마의 장사 머리에 대해 놀랐다. 단순히 수완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수완은 손님에게 불이익을 준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엄마의 경우는 그게 아니었다. 예를 들어 채소 이외에 각종 조개를 사다 까서 파셨다. 또 무에 물을 들여 단무지도 만들어 파셨다. 손이 조금 더 가면 적어도 2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을 꾸준히 찾으신 것이다. 가끔 엄마의 손을 잡고 들여다보면 조개를 까느라 부르트고 험해진 손마디가 그냥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장사를 하며 하루 종일 뛰어다니느라 발바닥은 쩍쩍 갈라져 피가 나는 일이 잦았다. 발바닥 통증이 장난 아니게 심해져야 겨우 안티푸라민이나 글리세린을 사다 바르셨다. 거기에 평생 엄마를 따라다녔던 만성 두통까지. 두통이 얼마나 심하셨으면 하루에 두통약을 몇 개씩 삼킬 정도였다.
지금도 그 시절을 돌아보면 오 남매의 엄마로 살기가 얼마나 힘드셨을까 안타깝기만 하다. 좋은 부모의 조건이 뭘까? 나도 부모로 살면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자식이 많으니 엄마는 나보다 더 이런 질문을 자주 하셨을 것이다. 자식들 문제로 본인은 원치 않는 각종 선택 역시 수없이 하셨을 것이다. 그래도 어떤 것이 자식의 앞날을 위해 더 비전이 있는지에 대한 노력은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아무리 상황이 힘들어도 우리의 학업을 중단시키지 않으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들의 학비 문제로 아버지와 다툼도 잦으셨다. 나만 열심히 노력한다고 모두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도 엄마의 도전은 항상 자식들의 앞날과 비전에 있었던 건 분명하다. 그걸 위해 희생하고 노력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구운몽>을 쓴 서포 김만중은 유복자로 태어난다. 대대로 쟁쟁한 재상과 학자 집안에 태어났지만 이미 가세는 많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그의 어머니 윤 씨도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러나 아들 둘만 가진 양반가 과부가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던 시대였다. 서포의 어머니는 당시 유일한 돈벌이 수단인 베짜기로 아들 둘을 키워냈다. 형제가 어렸을 때는 책을 빌려 필사해서 직접 가르쳤다. 다행히 두 아들은 모두 뛰어난 실력으로 관직에 올라 중요한 보직을 맡아 승승장구했다. 큰아들은 당시 왕이었던 숙종의 장인으로 부원군에 이르렀다. 둘째인 서포 역시 당대 빼어난 학자며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두 아들을 훌륭하게 성장시킨 서포의 어머니는 천수를 누리며 잘 먹고 잘 사셨을까?
대학에 입학해 서포에 대해 공부하던 나는 그 어머니의 말년에 대해 안타까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의 일생에서 초년이나 중년의 고생은 노년의 추억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말년에 고생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포는 하필 가정 문제 해결에 젬병이었던 숙종이 다스리던 시기에 정계에 진출한다. 덕분에 경륜과 학식이 높더라도 피해 갈 수 없었던 당파 싸움의 희생자가 되어 유배지를 전전한다.
그의 대표적인 소설 <구운몽>의 집필 동기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온갖 벽지로 귀양 다니는 아들 걱정에 눈물 마를 날 없던 늙은 어머니를 위해 <구운몽>을 썼단다. 아들의 효심 또한 만만치 않다. 나는 서포에 관련된 공부를 하면서 우리 엄마를 많이 생각했다. 손가락 마디마다 상처가 그칠 날이 없고 발바닥이 갈라져 피가 나도록 노력하신 엄마의 노동도 서포의 어머니 못지않았다.
서포가 어린 시절 있었던 일이다. 어머니 윤 씨는 봇짐장수가 툇마루에 펴놓은 책 앞에 형제가 다가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걸 본다. 그 순간 베틀에서 짜고 있던 삼베를 가위로 싹둑 잘라 당장 그 책을 사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 사람의 손으로 짜야하는 삼베는 아주 고가에 팔렸다. 우리 엄마는 어떠셨을까?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식이 배우겠다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서포의 어머니처럼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바로 행동하셨다.
우리 오 남매는 모두 엄마에게 일종의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다. 엄마는 웬만한 집안의 대소사에 대한 결정에 대해서는 아버지 의견에 따르시는 편이셨다. 그러나 자식의 학업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결코 양보나 타협을 하지 않으셨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시간이 지나면 후회하지 않을 결과가 있다고 믿으신 것 같다. 그러니 그런 혹독한 시간도 감내하신 게 아닐까? 우리들은 지금도 엄마가 아니었으면 모두 대학을 다니는 건 꿈도 못 꾸었을 거라고 말한다. 왜 대학을 나오신 아버지보다 엄마의 영향력을 더 강하게 느끼는 걸까?
나 역시 살아오면서 경제적으로 힘든 상태에 처한 적이 자주 있었다. 아들들 문제로 힘겨운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아무리 힘들어도 엄마의 제기동 시절과는 비교 불가하다는 깨달음이었다. 내가 하는 고생은 손가락 마디마디가 변형되고 발바닥이 다 터져 피가 나올 정도의 노동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경제적인 상황이 긴박해서 두통으로 어지러울 정도 역시 아니었다.
엄마가 딸인 나를 끝까지 공부시키신 이유는 적어도 본인과 같은 노동과 경제적인 어려움을 감내할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장 크셨을 것이다. 그래서 딸이 중학교 선생이라는 사실을 얼마나 자랑하시는지 알기에 내 직업에 대한 자존감이 그렇게 높았던 게 아닐까? 때로 교육 현장에서 내 자존감을 갉아먹고 눈물을 삼키게 하는 일 앞에서도 그렇게 당당하게 견디고 열심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나갈 수 있었다. 그런 엄마의 후원을 누가 외면할 수 있는가? 이게 딸인 내 본심이다.
엄마가 처음으로 자신의 생일을 챙기신 해가 있었다. 집안의 어른이신 할머니까지 돌아가신 이듬해였던 것 같다. 큰 아들은 결혼을 했고 나는 임용고시에 합격해 교사로 임용되었다. 셋째는 그렇게 원하던 서울대에 합격해 입학했다. 며느리도 들인 데다 줄줄이 집안에 좋은 일이 생겼으니 그해 생일은 그냥 지나가지 말라는 시장 주변 이웃들의 권유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안방에서 생일상에 앉아 음식을 드시던 주변 친구 분들이 인사를 하는 내게 갑자기 엄마 생신 축하 노래를 한 곡 청하셨다. 흔한 ‘해피 버스 데이’가 아니라 다른 곡으로 말이다. 새내기 교사로 대중 앞에 서는 일에 제법 뻔뻔해지고 있기는 했지만 지금 기억해도 많이 당혹스러워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갑자기 닥친 일이라 선곡이 문제였다. 그래도 할 수 없이 엄마의 생일에 노래를 한 곡 불렀다.
고등학교에서 배운 이 노래는 가끔 마음이 울적하면 혼자 흥얼거리던 가곡이었다. 생신 노래로 적절한지 아닌지 잠시 머리를 굴린 것 같다. 당시 유행하는 가요는 가사를 끝까지 기억하지 못할까 봐 대신 이 노래를 불렀다. 내가 불러드린 노래는 <님이 오시는지>다.
물망초 꿈꾸는 강가를 돌아
달빛 먼 길 님이 오시는가.
갈 숲에 이는 바람 그대 발자췬가.
흐르는 물소리 님의 노래인가
내 마음 외로워 한 없이 떠돌고
새벽이 오려는지 바람만 차오네
백합화 꿈꾸는 들녘을 지나
달빛 먼 길 내님이 오시는가.
풀물에 배인 치마 끌고 오는 소리
꽃향기 헤치며 님이 오시는가.
내 마음 떨리어 끝없이 헤매고
새벽이 오려는지 바람이 이네
바람이 이네
나는 엄마에 대한 고마움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았다. 그런 내가 엄마의 생일에 노래를 불러드린 것은 이게 유일하다. 부모의 생일을 거의 의무로 알고 지냈으니 당연하긴 하다. 그러나 그 일이 지금에 와서 마음에 사무칠 정도일지는 몰랐다. 노래를 가만히 들으시면서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남들이 뭐라고 해도 딸을 대학에 보내고 선생님까지 만들었으니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셨을까.
우리들은 나날이 성장하고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만들어가는 시기였지만 엄마의 당시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막내 삼촌이 하시던 제본소를 아버지가 맡으시면서 수원 상회는 엄마 혼자 운영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가게 운영은 물론 가족들 부양에 대한 책임을 전부 엄마에게 넘기셨다. 게다가 아버지는 툭하면 엄마에게 ‘집안 식구들은 네 식구. 공장 식구들은 내 식구’라고 하셨다. 이미 오래전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도 딸인 내게 하소연하신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엄마가 그 말을 하실 때 섭섭해하시던 어조와 한숨 소리까지 기억할 정도로. 엄마가 얼마나 많은 걸 보듬어 안고 참아 가며 사셨는지….
더 나중 일이다. 한 번은 엄마와 우리 집에서 가족 드라마를 함께 본 적이 있다. 여운계 씨가 나이 든 엄마 역이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여운계 씨가 마지막 생일을 가족과 함께 보내면서 노래를 한 곡 한다. 여학교 때부터 즐겨 불렀다는 멘트와 함께 부르던 노래는 <메기의 추억>이었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매기 아 매기 희미한 옛 생각
동산 수풀은 없어지고 장미화는 피어 만발하였다
물레방아 소리 그쳤다 매기 내 사랑하는 매기야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매기 아 내 희미한 옛 생각
지금 우리는 늙어지고 매기 머린 백발이 다 되었네.
옛날의 노래를 부르자 매기 내 사랑하는 매기야 내
사랑하는 매기야.
그 장면을 보시면서 엄마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도 가족들 앞에서 저런 노래를 불러봤으면 좋겠다고. 무심한 딸은 그 부러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는 했다. 그냥 말없이 앉아 있었다. 적어도 그 순간 엄마에게 그 노래를 가르쳐 드리겠다는 말이라도 했어야 했다. 엄마에게 <매기의 추억>은 여학교라도 끝까지 다닌 사람들만 부를 수 있는 수준 높은 노래였다. 본인처럼 중간에 그만두는 일 없이 말이다.
가족들이 모였을 때 오래 자식들 기억에 남을 노래 하나 불러본 적이 없다는 것에 대한 쓸쓸함을 담은 말이었는데. 부러움 담긴 그 마음을 분명 내가 읽은 것 같은 데 영민한 엄마에게 그 노래를 가르쳐 드릴 생각은 왜 하지 못했을까? 그게 어려운 일은 분명 아니었을 텐데. 이미 돌아가신 뒤에 이런 것까지 후회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사람들이 부모님을 여의면 마음으로든 글로든 다양한 사모곡을 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들고 괴로운 일이 생기면 왜 나를 낳았냐며 앙칼진 소리로 부모에게 원망도 할 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치는 어려움을 무엇으로 극복할까? 고난을 오히려 도움닫기로 생각하는 진취적인 사람들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
우리 오 남매도 살아오면서 갖가지 고난에 맞서야 했다.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래로 씩씩하게 나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우리들의 엄마가 있었다. 자식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고 깊은 사랑으로 헌신한. 그런 엄마를 부모로 가진 우리야말로 진정한 행운아들이다. 그저 우리들에게 이런 엄마를 주셔서 신에게도 고맙고 감사하다. 우리 엄마 용인 이 씨 이순상 여사님! 아직은 엄마를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핑그르르 돌고 가슴이 일렁거려도 그 은덕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싶은 날이다.
제기동은 우리들이 사춘기를 거쳐 대학생이 되고 더 자라 사회인이 되기까지의 추억을 오롯이 간직한 곳이다. 나 역시 초등학교 6학년부터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임용되기까지의 시간을 제기동에서 보냈다. 오 남매가 자라는 동안 나름의 흑역사들도 만만치 않게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피식 웃음을 흘릴 추억 또한 넘치게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상당히 시간이 흐른 뒤 제기동 집 근처를 일부러 지나가 본 적이 있다. 우리가 살던 집은 오래전 철거되고 넓은 도로로 바뀌어 있었다. 수없이 드나들었던 정겨운 골목도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이상한 곳에 와서 길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은 것을 가져갔지만 우리들 기억까지 가져가진 못한 모양이다. 아직도 나는 그 집의 세세한 곳까지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재구성해 낼 수 있으니 말이다.
철 대문을 열고 골목을 나서 조금만 내려오면 우물가 건너에 있던 슈퍼는 내 친구네 집이기도 했다. 큰오빠가 결혼을 하고 여경이와 인하가 연년생으로 태어났다. 여경이는 남자 아이라 그런지 비교적 조용한 편이었다. 오랫동안 아기가 없던 집안이 여경이로 인해 활기가 생겼다.
여경이와 제기동 집의 어렴풋한 기억 중 하나는 오목을 두던 풍경이다. 할아버지와의 내기에도 연전연패였는데 어린 조카에게도 연전연패하는 일 때문에 어찌나 민망했는지. 오목을 두면서 훈수는 물론 물러주기까지 해도 결과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 시절부터 나는 여경이의 뛰어난 지력을 인정했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하는 막내보다 더 재수 없는(?) 인간의 탄생이라고 속으로 혀를 찼다.
인하는 태어나자마자 특별했다. 우리 집안에 드물게 태어난 여자애라 그럴 수도 있다. 게다가 타고난 활기와 애교로 곧 가족들의 사랑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외모보다 우리를 더 열광시킨 건 상상을 초월하는 엉뚱함이었다. 사건 사고도 자주 일으켰다. 인하가 걷기 시작하면서 가끔 집에서 사라지는 일이 생겼다. 굳이 먼 곳을 찾으러 다닐 필요도 없었다. 내 친구네 가게 아이스크림 통 앞에 홀린 듯 서 있을 가능성이 컸으니까. 지금처럼 차량 통행이 잦으면 기겁을 했겠지만 당시는 서울 시내인데도 차량 통행이 별로 없어 다행이었다.
어느 날은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길래 제 엄마가 어디서 났느냐고 물었더니 슈퍼 아저씨가 줬다고 했단다. 가게에 가서 물어보니 꼬마 아가씨가 손가락을 빨고 아이스크림 통 앞을 벗어나지 않고 한참을 서 있어 보다 못해 주인이 하나 줬다고 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아이스크림을 지금은 거들떠도 안 보니 거기에도 세월의 흐름이 있나 보다. 사람의 행동이나 마음을 완전히 바꿀 정도로 긴 시간의 흐름이.
아현중에 임용된 첫 해 겨울이었다. 여경이와 둘이 달고나 뽑기를 하다 제자에게 걸려 민망한 꼴을 연출한 적이 있다. 종암 초등학교 교문 근처 햇볕 잘 드는 양지바른 담벼락 아래 설탕 뽑기를 하는 아저씨가 상주했다. 달고나는 추억의 간식이다. 국자에 설탕과 소다를 넣고 끓여 넓적한 판에 붓는다. 각종 모양을 찍어 모양대로 실수 없이 떼어 내면 하나 더 뽑게 해 주었다. 그래서 일명 뽑기다. 물론 하나 더 뽑을 일이 거의 없는 게 함정이지만. 그 정도로 어려웠다. 무엇보다 뽑기는 일종의 불량식품의 대명사였다. 거기서 어린 여경이와 쭈그리고 앉아 뽑기를 하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제자에게 걸렸다. 부임한 학교가 제기동과는 거리가 먼 아현동이라 설마 했는데. 그 탓에 입막음을 위해 제자에게 먹을 것으로 회유했다. 다행히 소문은 나지 않았다. 며칠 그 일로 전전긍긍하긴 했지만. 그 남학생 녀석의 능청맞은 놀림이 지금도 선하게 떠오른다.
제기동을 떠나기 전 우리 집은 여러 변화가 생겼다. 나는 학생에서 교사로 변신해 학교를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집안 경제의 심각한 변화에 민감하지 못했다. 내가 초임 발령을 받은 학교는 일명 귀빈로로 불리는 곳에 있었다. 1981년에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대통령은 유독 해외 국빈 방문을 좋아했다. 무엇보다 수시로 귀빈로를 오가며 학생들을 동원해 태극기를 흔들며 환송받기를 즐겼다. 그 말은 토요일이나 일요일도 동원되는 학생들 인솔을 위해 교사들이 시간과 관계없이 출근을 하거나 퇴근을 미뤄야 한다는 의미였다. 지금은 당연한 초과 근무나 휴일 근무 수당도 없었다. 밤늦게 근무해야 할 일이 생겨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에 근무하던 5년은 이런 유형의 말도 안 되는 부당 근무를 수시로 했던 기억이다.
연좌제로 큰오빠가 국립대 전임강사 자격에 문제가 생긴 것처럼 나도 임용될 때 문제가 있었다. 시험 성적은 좋아 3월 초에 발령을 받았는데 두 달이 다 지나가도록 발령장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신원조회에 걸렸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나에 대한 보고가 수시로 교장을 통해 정보기관에 보고되었다는 사실도. 추측이 아니라 직접 교장에게 불려 가 들었으니 합리적 의심이다.
아버지의 일 년도 안 되는 청년 시절 과거는 수십 년이 지난 뒤 자녀들의 삶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두 달 가까이 월급도 없이 근무만 했던 억울함도 어디 가서 하소연하기 힘든. 당시에는 임용이 취소될까 봐 오히려 전전긍긍했다. 사회에는 다양하고 엄청난 변혁이 일어나던 때였음에도 이런 문제는 사람들을 옥죄기 위한 수단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사회 곳곳에 드리웠던 연좌제의 그늘이 없어지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앞에서 나는 엄마가 어떻게 수원 상회를 운영하고 얼마나 힘들게 집을 마련하셨는지 이야기했다. 그렇게 힘겹게 얻은 수원 상회와 제기동 집이 모두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된 이유는 대충 이렇게 알고 있다. 막내 외삼촌이 경영하시던 양동사라는 이름의 제본소를 어떤 연유인지 아버지가 인수하게 되었다. 외삼촌이 거래처와 함께 공장을 아버지에게 넘긴 것이다. 외삼촌은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힘겹게 사는 우리 엄마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시려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외삼촌이 잘못 본 것이 있다. 우리 아버지는 장사를 하던 사업을 하던 그 일에 적절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거다.
제기시장에서 수원 상회를 운영하실 때도 두 분의 다툼은 아버지의 답답한 고집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다. 엄마는 나름 이재에 밝은 편이었다. 세상의 변화에도 민감하셨다. 단골손님들도 엄마가 자리를 비우고 아버지 혼자 계시면 물건을 사러 왔다 그냥 갈 정도였다. 엄마가 새벽시장을 굳이 다니신 이유도 물건을 보는 안목이 아버지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맛난 채소들을 보는 엄마의 안목에 놀랄 때가 많았다. 그냥 눈으로 보기만 해도 더 맛있는 채소들이 구분되신다고 해야 할까?
단골들은 엄마의 물건을 말 그대로 믿었다. 제사만 십 수번에 해당하는 종가 집 맏며느리의 각종 레시피도 엄마의 장사 강점이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레시피를 손쉽게 찾을 수 없던 시절 엄마의 손맛과 입담은 손님들을 매혹시켰다. 입맛이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손님들도 엄마를 많이 좋아하셨다. 그게 엄마의 장사 비결이었다.
물건을 사러 오는 손님들을 대할 때도 엄마는 기민하게 대처하셨다. 물건을 꼭 살 사람인지 아닌지를 파악하는 능력이나 소통 역시 아버지는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시는구나 싶은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직접 장사를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런 장면을 수시로 목격했다. 심지어 다른 곳으로 갔던 사람도 결국 되돌아와 엄마의 물건을 사는 걸 말이다. 우리가 봐도 아버지는 그런 소양이 부족하셨다. 그냥 공무원이나 연구원 아니면 학자 등 혼자 하는 일을 해야 할 사람이 엉뚱하게 혼란의 시대에 원치도 않고 소양도 없는 장사와 사업에 내몰려야 했다고 보는 게 적절할 것이다.
우리들이 얻을 수 있는 교육의 기회를 100으로 본다면 나는 80 이상을 엄마가 제공했다고 본다. 나만 그렇게 느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엄마 자신의 능력과 확고한 자녀 교육에 대한 신념 덕분에 우리는 모두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덕분에 사회에 나가 꿀리지 않고 독립적인 삶의 터전을 만드는 게 가능했다.
나는 무슨 돈으로 외삼촌의 제본소를 인수했는지는 잘 몰랐다. 큰오빠는 양동사를 인수하기 위해 뱅골 집과 남아 있던 논밭을 정리한 걸로 알고 있었다. 아마 그랬을 수도 있다.
그 와중에 제기시장은 재래시장에서 커다란 단독 건물로 재건축되었다. 수원 상회 역시 밝은 지상에서 지하처럼 어둑한 곳으로 이사해야 했다. 그 수원 상회와 제기동 집이 어느 순간 모두 남의 손에 넘어가고 있었다는 걸 나는 잘 몰랐다. 아마 제본소에 들어가는 자본 마련과 운영비에 엄마의 안타까운 노력과 결실들이 허무하게 사라졌음을 짐작할 뿐이다.
이런 와중에 무슨 돈인지 엄마는 사기도 당하셨다. 뱅골 시절에 한 동네 살던 친인척 중 한 명이 엄마에게 돈을 빌려가 끝내 갚지 않은 것이다. 그 돈을 받기 위해 많이 노력하셨지만 결국 조금도 돌려받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은 이런 경우 적절하려나.
제본소 운영은 들인 노력과 투자에도 완전히 빈손이 되었다. 외삼촌이 제본소를 아버지에게 넘기실 때 흑자를 내는 게 아니었던 건 분명하다. 손을 털고 싶으나 적당한 사람이 없어 조금 쉬운 아버지에게 넘겼다고 보는 게 내 짐작만은 아니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책임을 온전히 외삼촌에게 지우기에 무리가 있다는 걸 나는 아버지만 잘 이해하지 못하셨다고 본다.
제본소를 운영할 때 가장 혹사를 많이 당한 사람은 작은 오빠였다. 지금도 막내는 그 일에 대해 아버지에게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큰오빠는 결혼을 한 데다 대학원을 다니고 곧 여기저기 출강을 하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어 끌어다 일을 시키지는 못한 것 같다. 아직 대학생인 작은 오빠는 아버지의 성화를 이기지 못해 제본소에 자주 불려 가 힘든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기동 집을 떠나 서초동 꽃마을로 이사를 올 때 다행이었던 일은 조부모님 두 분이 타계한 뒤였다는 거다. 우리들 역시 하나씩 취업을 했다. 가족들이 굶주릴 정도의 위기에서도 조금씩 벗어났다. 엄마는 서울고등학교 근처 꽃마을로 이사를 결정하셨다. 대가족이 살만한 공간을 서초동에서 찾으신 것이다. 그리고 대치동 청실 아파트 근처에서 혼자 야채 노점상을 시작하셨다. 대가족의 생계 역시 아직은 엄마의 손에 많이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사 갔을 당시 서초동은 지금과 같은 초현대적인 강남의 모습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흙바닥에 비닐하우스가 산재해 있었다. 신축 건물인 그 집 이층에 산 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다. 큰 오빠 네가 공주 장기로 단칸방을 얻어 독립을 했기 때문이다. 공주 읍내도 아니고 깡 시골로 들어가 버스로 출퇴근을 해야 했던 그 어려운 시절의 모습을 뭐라고 말하겠는가? 다만 국립대 전임강사로 부임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까? 오빠의 독립에 도움을 줄만한 여윳돈도 아버지의 사업 자금으로 날린 탓이었다.
우리 오 남매는 독립 자금 일부라도 집에서 지원받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오 남매 모두 보증금도 거의 없는 사글세로 살림을 시작했다. 그 당시 이런 게 아무리 대세였다고는 하지만 조금 여유 있게 출발하는 친구들을 보면 부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아버지의 경제에 대한 이해와 능력 부족에 안타까움이 남은 건 아니다. 그냥 아버지의 삶도 만만치 않았다는 건 이해가 된다. 다만 그걸 본인보다 학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떠넘기듯 실패의 책임을 지우고 심지어 마음의 상처를 주신 잘못을 이제는 좀 아셨으면 해서다.
치매와 기력 부족으로 엄마는 마지막을 요양병원에서 마치셨다. 이미 많은 것을 잊으신 상태였는데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잊지 못하고 계시는구나 싶었던 날이 있었다. 아버지의 말에 깊은 상처를 입고 계셨던 것이다. 본인 연령대의 다른 분들은 한글도 계산도 일본어도 전혀 모르는데 그렇지 않은 자신을 아버지가 평생 무시했다고 원망하셨다.
나도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힘들게 내 자리를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눈물까지 흘리며 큰 소리로 하소연하던 모습 때문에 면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내내 우울했던 기억이 가끔 생각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가르시아 로르카 지음 제목 모름
은빛 백양나무들이
물 위에 고개를 숙이고 있네.
그들은 다 알지만 결코 말은 하지 않으리.
연못의 백합은
자신의 슬픔을 외치지 않네.
모든 것이 인간보다 고귀하도다!
별빛 반짝이는 하늘 앞 침묵의 지식은
꽃과 벌레만이 소유한 것.
노래하기 위해서 노래하는 지식은
중얼대는 숲들과
바닷물만의 것.
대지의 생명에 대한 깊은 침묵은
장미 덤불에 활짝 핀 장미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
우리는 우리 영혼이 안에 가둬둔
향기를 자유로이 풍겨야 하리!
우리 모든 것이 노래고
빛이고 선함이어야 한다.
우리 활짝 가슴을 열고
검은 밤 앞에서
불멸의 이슬로 자신을 채워야 하리!
우리 육체를 불안한 영혼 속에
잠들게 해야 하리!
저 너머의 빛을 보지 않게 눈을 가려야 하리.
우리 가슴의 그늘을
자세히 바라보고
사탄이 뿌린 별들을 솎아내야 하리.
우리는 항상 기도하고 있는
나무처럼 되어야 하리.
영원 속에 자리 잡은
물길 속 물처럼 되어야 하리.
슬픔의 발톱으로 영혼을 파내어
별 가득한 수평선의 화염이
들어오게 하여라!
좀먹은 사랑의 그림자에서
어머니같이 자애롭고 고요한
여명의 샘물이 솟아나리.
도시들은 바람 속에서 사라지리.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께서
구름 위를 지나 시는 모습을 보게 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