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편지
"그동안 아픈데 없이 잘 지내셨는지 궁금했습니다."
...
이 한마디에 담긴 복잡한 감정. 첫 문장이 가장 강력하게 독자를 끌어들인다.
1993년 시 <얼음꽃>으로 등단하기 1년 전, 연세문화상에서 수상한 작품 <편지>이다.
대학교 4학년의 그녀는 살아온 세월이 제곱이 됐나 싶을 만큼의 진득한 그리움과 고독의 감정을 시에 담아냈다.
그녀만의 언어로.
한강의 작품을 필사하다 보면, 침묵으로 다양한 감정을 일으킨다는 것이 느껴진다.
간결한 필체로, 응축해 표현하는 것이 탁월하다.
'어둡고 슬픈 것이 좋지 않으냐'는 그녀의 삶의 순간이 궁금하다.
어쩌면, 인간의 불안정함을 왜곡하거나 승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그녀가,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편지> - 한강
그동안 아픈데 없이 잘 지내셨는지 궁금했습니다.
꽃 되고 지는길 그 길을 떠나 겨울 한번 보내기가 이리 힘들어
때 아니 삼월 봄눈 퍼붓습니다.
겨우내내 지나온 열 끓는 세월 얼어붙은 밤과 낮을 지나며 한 평 아랫목의 눈물겨움 잊지 못할 겁니다.
누가 감히 말하는 거야 무슨 근거로 무슨 근거로 이 눈이 멈춘다고 멈추고 만다고...
전지에 퍼붓는 이 폭설이 보이지 않아? 휘어서 부러지는 솔가지들,...
퇴색한 저 암록빛이, 이, 이, 바람 가운데,
기댈 벽 하나 없는 가운데, 아아... 나아갈 일조차 묻혀버린 곳, 이곳 말이야...
그래지낼 만하신지
아직도 삶은 또아리튼 협곡인지
당신의 노래는 아직도 허물리는 곤두박질인지
당신을 보고 난 밤이면 새도록 등이 시려워 가슴 타는 꿈 속에 어둠은 빛이 되고
부셔 눈 못 뜰 빛이 되고
흉몽처럼 눈 멀어 서리치던 새벽 동트는 창문빛까지 아팠었지요.
......... 어째서... 마지막 희망은 잘리지 않는 건가
지리멸렬한 믿음 지리멸렬한 희망 계속되는 호흡 무기력한 무기력한 구토와 삶, 오오, 젠장할 삶
악물린 입술 푸른 인광 뿜던 눈에 지금쯤은 달디 단 물들이 고였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한번쯤은 세상 더 산 사람들처럼 마주 보고 웃어보고 싶었습니다.
사랑이었을까... 잃을 사랑조차 없었던 날들을 지나 여기까지,
눈물도 눈물 겨움도 없는 날들 파도와 함께 쓸려가지 못한 목숨, 목숨들 빨밭에 뒹굴고
당신 없이도 전시에 봄이 왔습니다 눈 그친 이곳에 바람이 붑니다
더운바람이,
몰아쳐도 이제는 춥지 않은 바람이
분말 같은 햇살을 몰고 옵니다
이 길을 기억하십니까
꽃 피고 지는 길
다시 그 길입니다
바로 그 길입니다.
"뽑힌 소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을 줄 알았다. 추억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그때는 잘 몰랐다.
앓아누운 밤과 밤들의 사이, 그토록 눈부시면 빛과 하 늘을 기억한다. 그들이 낱낱이 발설해 온 오래된 희망의 비밀들을 이제야 엉거주춤한 허리로 주워 담는 것이다.
•••목덜미가 아프도록 뒤돌아보며.
뽑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기쁨, 내 모든 눈물겨운 이들의 것입니다.
한 강 <국문과 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