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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넨브릴레 May 08. 2023

생일 선물

운 좋은 날

중국 항공사에서 근무 중인 조종사의 비행 생활 이야기입니다.  



내 생일은 5월 5일이다. 

며칠 전, 아이가 "(돈을 주고 사 줄 테니) 어떤 생일 선물을 받고 싶어요?"라고 물었다. 어차피 아이 돈이 내가 준 돈이다. 차라리 그림을 그려 달라고 했다. 

아이가 그려준 그림. 뭔가를 보고 그렸다. 아빠의 어릴 때 모습 같다. 가슴에 5를 그려줬다


아내도 나에게 어떤 선물을 갖고 싶은지 물었다. 갖고 싶은 게 별로 없다고 했다. 아내 돈도 내가 주는 돈이다. 


어느 때인가부터 특별히 갖고 싶은 물건(선물)이 없는데 그게 또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게 뭐든, 필요할 때 사면 그만이다.  

선물은 내 돈 주고 사기엔 아깝고 누군가 사주면 좋을 만한 물건에 이름 붙이기 알맞다. 

이 또한, 여러 해를 살다 보니 사기 아까우면 그냥 안 사면 그만인 삶이 됐다. 

 



긴장의 서막

2023년 5월 5일, 중국의 총 5일이었던 노동절 연휴가 막 끝난 첫날이었다. 나는 하얼빈 공항 조종실 안에서 중국인 부기장과 비행 준비 중이었다. 그 기간 동안 여행을 했거나 가족 방문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승객들이 한창 탑승 중이었겠거니 싶었다. 

갑자기 관제사가 승객 탑승이 완료됐는지 물었다. 이례적이었다. 보통은 탑승이 완료되면 우리가 관제사에게 알리고 엔진 시동 허가를 받는다. 

아직 준비가 덜 됐다는 부기장의 대꾸에 관제사는 18분 후에 이륙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시간을 놓치면 언제 다시 이륙할 수 있을지 가늠이 안 됐다. 

문 닫고, 체크리스트 하고, 엔진 시동 걸고, 이륙 활주로까지 이동하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마침내 사무장이 조종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가 문을 여는 동안 내가 먼저 "야오, 류, 류!(幺六六, 166)"라고 했다. 사무장도 "야오, 류, 류!"라고 하며 조종실 잠김 버튼을 내리고 문을 닫았다. 예정된 166명의 승객이 모두 탑승 완료했다는 의미다. 늘 하는 대화다 보니 점점 간결해지는데 마침 시간에 쫓겨 더 간결하게 했다.  

이제 출발하면 시간을 맞출 것 같았다. 


그때, 부기장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최근 신설된 회사의 규정 대로라면 비행기의 모든 문이 닫히면 조종사는 휴대폰을 끈 채 가방에 넣어둬야 한다. 부기장이 전화를 받았다. 회사 담당자의 전화였다. 보통 우리를 감시하는 회사 담당자도, 부기장도 사실상 규정 위반이었지만, 결국 중요한 정보 전달을 위한 행동이 됐다. 

"밤 8시 이전에 목적지인 창사 공항에 도착하면 예보에 나와 있는 폭우(Heavy rain)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연락이었다. 연료를 아끼도록 유지하는 경제속도(비행기 컴퓨터에 넣는 값, Cost Index)를 무시해도 좋다고도 했다. 경제속도는 보통 저속을 유도하는데 이를 무시하고 가급적 빨리 가라는 것이다. 


회사 직원의 전화 때문인지 더 긴장됐다. 출발부터 긴장되는 비행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날씨 예보는 목적지 공항에 밤 8시부터 폭우가 쏟아질 것으로 돼 있었다. 출발이 지연되지 않도록 서둘렀던 이유다. 

이륙해서 보니, 항로는 비교적 깨끗했다. 도착 예정지가 지저분한(?) 비구름으로 덮여 있을 거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비행기의 컴퓨터는 우리가 그 전인 7시 51분에 도착할 것으로 계산했다. 


비행기에는 기상 레이더(Weather Radar)가 있다. 앞을 향해 전파를 보내면 구름(수증기)에 반사되어 다시 돌아온다. 이를 인식해서 구름의 모양과 가지고 있는 수분의 양을 알려준다. 머금고 있는 수분이 낮은 순서부터 초록색, 노란색, 빨간색의 시각 정보로 보여준다. 고생을 해야 하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해서일까? 이 시각 정보가 잔뜩 보이면 왠지 지저분한 느낌을 받는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하자 주변이 온통 노랗고 빨간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노란색이기만 해도 우리는 그곳을 지나가면 안 된다.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리기 때문이다. 

부기장과 상의하고 비교적 구름이 적은 쪽으로 빙~ 둘러 우회해서 공항에 접근하기로 했다. 관제사에게 비행 방향 변경 요청도 마쳤다. 

나는 부기장에게 "원래 허가받은 경로를 이탈해 다른 방향으로 돌아서 공항으로 가도 되는지"를 추가로 물어보라고 했다. 부기장은 이미 허가받아 우측 방향으로 향하고 있으니 관제사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고 했다. 나는 재차 관제사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부기장도 재차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또 한 번, 세 차례나 요구해도 부기장이 관제사에게 물어보지 않자, 나도 모르게 목소리의 톤이 올라갔다. 

"관제사와의 통합 협력(Coordination)을 위해서라도 그냥 물어봐!"

비로소 부기장이 관제사에게 물어봤고 우리는 경로를 바꿔도 좋다는 대답을 들었다. 



부기장

나는 평소 부기장에게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어떤 실수를 해도 그럴 수 있다며 넘어간다. 나의 성격 때문만은 아니다. 중국 항공사에서 중국인인 지금의 부기장은 언젠가 기장이 될 뿐만 아니라 교관이 된다. 나는 계속 일반 기장으로만 비행할 외국인 기장이다. 기장은 주기적으로 교관기장으로부터 평가받아야 한다. 즉, 지금은 부기장이지만 미래의 교관과 함께 다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얼빈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출발했던 터였다. 전날 저녁에 부기장이 호텔이 아닌 밖에서 식사하자고 제안했다. 

부기장은 나를 유명한 꼬치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약간 허름한 느낌이었지만 식당 안은 사람이 붐볐다. 심지어 자리가 없어 근처에 있는 1호점으로 안내받았다. 약 200미터를 골목 더 안 쪽으로 들어가야 했다. 식당에 들어섰는데 여러 테이블 중 어떤 테이블에 여성 일곱 명이 앉아 식사 중이었다. 화장과 옷매무새를 보건대 승무원이었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1, 2호점, 승무원들도 찾는 식당. 식사 전부터 유명세가 느껴졌다. 

나는 한국어로 꼬치라고 설명했는데, 부기장과는 영어로 바비큐(먹으러 가자)라고 표한다
새우가 먹음직스러웠다

식사를 거의 마쳤을 무렵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어린이날 선물을 골랐는데 18만 원짜리라며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고 물었다. 아이를 바꿔달라고 했다. "지금 사줄 수 있지만 벌써부터 그렇게 비싼 걸 사면 나중에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엄마, 아빠가 얼마짜리를 사줘야 하느냐?"라고 물었다. 아이가 "선물은 내가 원하는 거 사줘야 하는 거 아녜요?"라고 하여 옥신각신 하게 됐다. 

내가 통화하는 동안, 부기장이 식사비를 계산했다. 식당을 나서는데, 부기장이 토크쇼를 보러 간다며 나에게 먼저 호텔로 가라고 했다. 본인 비용으로 모범택시를 불러줬다. 그는 사람의 환심을 사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너무 고마워 그에게 감사 인사를 했더니, 

"Just in the cockpit, I'm not good but normally I'm good man."

이라고 웃으며 얘기했다.

우리는 둘 다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대화한다. 그의 영어 표현이 완벽하지 않았지만 "내가 비행기에서는 별로지만 다른 때는 좋은 사람이다"라고 이해하기 충분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어제까지는 그가 너무 고마웠는데, 비행기에 와서는 나의 목소리가 높아지게 고집부렸다. 


공항은 동서남북 접근 방향에 따라 접근 절차를 미리 정해두고 있다. 우리는 서쪽에서 접근하면서 그에 맞는 접근 절차 허가를 받을 예정이었고, 컴퓨터에도 미리 입력해 둔 상태였다. 그러나 구름 때문에 방향을 공항 동쪽으로 바꾸어 접근해야 했다. 이때, 관제사에게 방향을 전환해 공항으로 접근 가능한지 물어보는 것은 ①우리의 의도를 미리 알리고, ②생각하지 못한 다른 변수가 있는지에 대한 간접 질문이 되는 것이기도 했다. 굳이 의미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한 부기장과 의견이 충돌했던 것이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그냥 좀 물어보지... 상황을 의견 충돌 형태로 만들건 뭐람.  


마침 관제사는 우리에게 허락을 내주면서, 이미 10분 전부터 공항에 내리는 항공기가 한 대도 없었으며, 1분 전에는 어떤 비행기가 다른 공항으로 회항했다는 정보를 줬다. 



궂은 날씨, 정답 없는 눈치 작전 

고도를 낮춰 내려가니 레이더에 나온 대로 온 사방이 구름뿐이었다. 종종 구름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렸다. 

우리가 활주로를 직선으로 연장한 접근로 주변을 맴돌고 있을 때였다. 어느 순간 베트남 국적의 비엣젯 항공기(VietJet Air)가 나타났는데 여성 조종사가 관제사와 대화했다. 그녀는 종종 관제사에게 "Say again?"이라고 했다. 못 알아 들었으니 다시 얘기해 달라는 것이다. 교신 능력이 조금 미숙한 듯했다. 주변 항공기들도 구름을 피하느라 관제사에게 반복해서 항로 변경 요청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장시간 관제사와 대화를 하니 답답하기도 했다. 그녀가 "Say again?"이라고 했을 때, 우리도 다급하게 끼어들어 관제사에게 비행 방향 변경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따금 비엣젯에서 남성 조종사가 나타나 관제사와 얘기를 하는 것으로 보아 남성 기장과 여성 부기장으로 편조된 듯했다.  

그랬던 비엣젯이 먼저 접근을 시도하겠다고 나섰다. 

몇 년 전, 중국 국적 샤먼항공사의 비행기가 비가 많이 내리는 마닐라 공항에 착륙하다가 활주로를 벗어난 사고가 있었다. 이를 계기로 중국 민간 항공 총국(Civil Aviation Administration of China)은 낮에 폭우(Heavy rain), 밤에 중간 정도의 비(Moderate rain)가 보고 되면 착륙을 할 수 없게 규정을 강화했다.  

이미 밤이 되었고 지속적으로 공항에 폭우가 내린다고 보고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주변을 맴돌던 10여 대의 비행기 중 유일하게 중국 국적이 아닌 항공기가 비엣젯이었다. 그들만이 착륙 접근 시도가 가능했다. 

우리와 같은 시각에 비엣젯 항공기가 있었던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그들을 통해 접근로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폭우가 내린다고 보고 되어도 접근로와 활주로 착륙 지점에는 약한 비가 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눈치를 보아하니 그들이 내리면 우리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접근을 시도하겠다고 요청하고는 그들의 뒤를 따랐다. 

공항으로 접근할수록 활주로로 접근하는 경로 위에 점 모양의 빨간색 구름이 나타났다. 우리는 판단하기 조금 난감했다. 노란색도 안 된다고 했다. 빨간색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부기장과 상의하고 있는데, 앞섰던 비엣젯항공의 여성 조종사가 다급하게 접근 포기를 요청했다. 그녀의 영어 발음은 나보다도 훌륭했지만 접근 포기 때조차 관제사와 몇 번을 다시 교신해야 할 정도로 관제 실력이 아직 서툴렀다. 그들을 따라 우리도 접근 포기 요청 후 비행기를 상승시키며 공항 주변에서 둥글게 원을 그렸다.   


이제 우리는 다른 도시의 공항으로 회항할 가능성이 높다고 회사에 알릴 수밖에 없었다. 회사는 연료가 10,000파운드가 남으면 계림(桂林, 중국 발음 귈린)으로 회항하라고 했다. 계림산수갑천하(桂林山水甲天下)라는 말이 있다. 계림은 하늘 아래에서 최고라는 뜻으로 절경으로 유명한 도시다. 

우리에게는 11,800파운드의 연료가 남아 있었다. 부기장과 20분 정도만 더 지켜보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회항하자고 의견을 맞추었다. 


조금 후, 샤먼 항공이 접근을 시도하겠다고 다시 나섰다. 연료 상황 때문에 마냥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릴 수 없는 것은 모든 항공기가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다시 상황을 살폈다. 그들 뒤에 붙어서 가다가 여의치 않으면 접근을 포기하면 될 것 같았다. 낮은 고도로 내려 갈수록, 접근을 포기하고 다시 상승할 때 더 많은 연료를 소모하게 된다. 누군가 먼저 접근할 때 뒤따라 가게 되면 함께 접근을 시도하면서도 연료를 좀 더 아낄 수 있다. 

즉시 우리도 접근을 시도하겠다고 했다. 부기장과는 이번 한 번 접근에서 실패하면 바로 회항하기로 했다.

우리의 뒤를 이어 비엣젯 항공기도 접근하겠다고 다시 나섰다. 관제사가 우리와 비엣젯 항공기에게 각각 얼마의 연료가 남았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20분을 알렸고 비엣젯은 10분이라고 했다. 비엣젯이 먼저 순서를 받았다. 



운 좋은 날

극적으로 착륙했다. 샤먼 항공기에 이어 비엣젯이 내렸고 우리의 바퀴는 세 번째로 활주로에 닿았다. 


목적지인 창사 공항 부근에 도착하여 구름을 피하기도 하고, 원을 그리기도 하면서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다렸다. 비행기는 공중에서 연료가 없으면 큰 문제가 된다. 결과적으로 50분을 기다렸지만, 그 당시에는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의사결정이 쉽지 않다. 


위 그림은 기상 레이더 사진이다. 모니터 중·하단의 삼각형이 내가 탄 비행기 위치다. 중·상단에 하얀색 마름모와 숫자 -21이 있는 것이 우리보다 앞선 비엣젯 항공기다(약간 희미하긴 한데, 확대해서 보면 어느 정도 보인다). -21은 우리보다 2,100피트 아래에 있다는 의미다. 활주로에 가까워질수록 착륙해야 하므로 땅과 가까워진다. 

앞선 비행기 바로 옆에 있는 빨간색 점이 처음 접근할 때 있었던 반드시 피해야 할 구름이다. 한동안 공항을 배회하다가 두 번째 접근할 때, 마침 바람에 밀려 활주로 접근로를 벗어났다. 우리는 이때를 틈타 공항에 착륙할 수 있었다. 


조종석에는 대부분 기장 한 명과 부기장 두 명이 있다. 부기장 중 한 명은 조종석에서 비행 업무를, 다른 한 명은 뒤에 앉아 모니터링한다. 
사진은 조종석 뒤에 앉은 부기장이 우리를 모니터 하면서 순간 찍었다. 착륙하지 못하고 재이륙(고어라운드)할 경우를 대비해 증거를 남기고 싶었던 것 같다. 나와 조종석에 앉아 있던 또 다른 부기장은 규정상 사진을 찍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럴 겨를도 없었다.


관제사의 "활주로의 왼쪽 도로로 빠져나가라"라고 하는 지시에 대꾸하는 부기장의 음성이 조금 떨렸다. 애써 태연한 척 하지만 긴장했던 것 같다. 

나도 착륙하자마자 희열을 느꼈다. 순간 부기장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싶을 정도였다. 다른 도시로 갈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조종실은 계속 녹음이 되고 있는지라 참았다. 비행 중에 딴짓하는지 회사 직원들이 모니터링한다.  

지상 이동하면서 흥분이 조금씩 가라앉았지만, 언성을 살짝 높였던 적도 있으니 하이파이브 같은 제스처로 좋은 분위기를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기장에 도착해 엔진을 끄고 체크리스트를 마치자마자 왼 손을 어깨 위로 번쩍 들어 천천히 부기장 쪽으로 향하는데 부기장이 먼저 한마디 했다.  

"Happy birthday~"

나의 생일에 특별한 상황이 벌어진 아이러니를 표현한 것일까? 아니면 운이 좋았다고 하는 것일까? 나는 고맙다고 말하며 그와 하이파이브했다. 

나중 일이지만, 부기장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비 때문에 원래 예정된 비행시간 보다 50분이 더 걸려 공항에 도착했다. 고생도 했고, 50분어치 급여가 더 생겼으니 그만큼을 내 생일 선물 사는데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생일선물

어렵게 공항에 착륙한 뿌듯함을 미소로 머금으며 조종실 밖으로 나왔다. 승무원이 수고했다면서, "기장, 생선(fish) 안 좋아해?"라고 영어로 물었다. 처음엔 무슨 말인가 했다. 

'아! 내가 기내식을 먹으며 반찬 중에 생선은 손도 대지 않은 것을 봤구나!' 

뒤늦게 깨닫고는 "니 칸러마(你看了吗, 네가 봤구나!)?"라고 중국어로 되물었다. 그녀가 "Sorry?"라고 반문했다. 내가 무슨 말하는지 못 알아듣겠다는 것이다. 옆에서 함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무장이 "네가 봤냐고 하잖아~!"라고 웃으며 중국어로 말했다. 그제야 그녀도 중국말로 "아~ 이제는 중국말도 못 알아듣네"라며 깔깔거렸다.


비행 출발 전, 조종사, 승무원, 안전 보안 요원 모두 모여 호텔에서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한 상 거하게 차려진 김에 "오늘 내 생일이야"라고 중국어로 말했다. 

여덟 명의 식대가 20만 원 넘게 나왔을 정도로 거했다. 물론 일하러 간 것이기 때문에 회사가 비용을 지불한다

내가 말을 뱉은 지 1초도 안 됐다. 사진 위에 있는 두 명의 승무원이 손뼉 치며 한국말로 "생일축하 합니다~ 생일축하 합니다~" 노래를 불렀다. 

나에게 생선 질문을 했던 승무원이 그중 한 명이었다. 영어도 곧잘 하는데 한국말도 조금 할 줄 알았다. 내가 중국어로 얘기하자 오히려 못 알아듣는 상황이 웃겼던 것이다.  


우리는 비행기에서 알루미늄 용기에 담긴 밥과 반찬들을 쟁반에 올려두고 식사한다. 승무원이 차려서 조종실로 넣어준다. 식사를 마치면 면으로 된 커다란 냅킨으로 쟁반 전체를 덮어서 다시 승무원이 치우도록 준다. 승무원은 대개 그대로 버리게 마련이다. 먹다 남은 음식인데 자세히 볼 일이 있으랴! 

이 승무원은 내가 생선 반찬을 아예 먹지 않은 것을 봤고, 심지어 좋아하지 않는지까지 확인하려 했다. 다음에는 생선 반찬을 주문하지 않겠다는 질문 같았는데, 처음 겪는 일이다. 한국어 생일축하 노래에 이어 그 배려심이 고마웠다.      


비행을 모두 마치고 회사로 가기 위한 버스에 올랐다. 생선 질문 승무원이 마지막에 탔다. 갑자기 내게 뭔가를 내밀며 "Happy birthday"란다. 비행기에서 판매하는 쌀로 만든 면 두 개였다. ㅋㅋ Better than nothing, 그래도 챙겨준 게 어디야? 


버스 옆 좌석에는 안전 보안 요원이 앉아 있었다. '그가 본인 생일이라고 했다면 부기장이나 승무원이 챙겨줬을 정도로 화제가 됐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위를 포함해 여러 복합적인 상황이 있지만 어쨌든 상대적으로 잠시나마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데 대해 감사했고 기분이 좋았다.  


내 돈 주고 사기엔 아깝고 누군가 사주면 좋을 만한 물건뿐만 아니라, 나를 즐겁게 해주는 행동도 훌륭한 생일선물이었다. 




덧붙임. 

1. 결국 아이의 어린이날 선물은 18만 원짜리를 사되 엄마, 아빠 그리고 아이가 똑같이 6만 원씩 나눠서 내기로 했다. 

처음에 엄마, 아빠가 5만 원씩 내고(얼마 전 아이 생일 선물 금액) 아이에게 8만 원을 내라고 했더니, "왜 내가 받는 선물인데 내가 돈을 내야 해?"라며 펄쩍 뛰었다. 옥신각신 하다가 "그럼 공평하게 6만 원씩 내자"라고 했더니 순순히 받아들였다. 처음 8만 원보다는 적은 금액이라서 받아들인 듯했다. 사랑스러웠다. 이런 사랑스러움이 아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아이가 빨리 크지 않았으면 좋겠다.  


2. 여성이어서 관제사와 통신을 못했다는 글로 읽힐까 우려된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조종사는 같다. 나도 신입 부기장 때 "Say again?"을 남발한 적이 있다. 그 과정이 있어야 능숙한 조종사가 된다. 


3. 부기장에게 시키지 말고 직접 관제사에게 물어보지 그랬냐고 할 수 있다. 관제사와의 통신은 부기장 업무였다. 그가 하지 않는다고 내가 그의 업무를 가로채는 행동을 하기 싫다. 


4. 중국인이 한국어로 생일축하 노래해 주는 모습이 신기해 동영상을 찍어 가족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승무원들은 화장을 안 했다는 이유로 밝게 웃으며 거절했다. 

가족들은 생일인데도 내가 중국에서 고생한다며 안타까워한다. 적어도 이런 작은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5. 나에게 주는 선물을 골랐다. 

코로나가 한창 유행일 때, 몇 개월 동안 비행을 못하게 된 적이 자주 있었다. 비행도 악기 연주나 골프처럼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 비행을 못하는 대신 컴퓨터로 비행 연습을 하며 감각을 유지하곤 했다. 코로나가 길어지면서 이게 습관이 됐다. 

2021년 새로운 형태의 컴퓨터 게임용 비행 조종기(Yoke)가 나왔다. 새로운 기술을 체험하고 싶어 사고 싶었지만 70만 원이 넘는 가격 때문에 계속 구매를 망설였다. 무려 2년 여를 망설이다가 생일 선물에 대해 생각하게 된 김에 나에게 주는 선물로 구입했다.


6. 40대 남성이 물건 사는 방법 

일단 가격이 비싸 중고로 알아봤다. 당근과 중고나라에 제품명을 등록해 두고 기다렸다. "게임하는데 그 돈 쳐들이냐!"라며 아내에게 혼났는지 미개봉 상태로 내놓은 중고도 가끔 올라왔다. 그 마저도 비싸다고 생각해 계속 기다렸다. 

인터넷을 뒤져 최저가 판매처를 찾아냈다. 판매처 제휴 신용카드를 만들고, 생일 쿠폰 등을 써서 17%를 더 할인받았다. 그동안 올라왔던 가장 낮은 중고 가격 보다 더 저렴하게 샀다. 이틀 내내 이것만 알아본 결과다. 친구한테 자랑했다. 


7. 누나와 동생에게 사진을 보내고 내 생일 선물이니 돈을 보태라고 했다. 둘이서 40만 원을 보내줬다. 며칠 후 어버이날이 됐다. 받은 돈을 고스란히 양쪽 어머니께 나눠 드리라고 아내에게 보냈다. 

생일이고 뭐고, 40대가 되면 다들 이렇게 살지 않을까 싶다. 


8. 아내의 생일은 나와 불과 3일 차이인 5월 8일이다. 아내도 생일 선물로, "갖고 싶긴 한데 돈 주고 사긴 아깝고 누군가 사줬으면 좋겠는 그런 거 있잖아요~ 애플워치 사줘요 히히"라고 했다. 

코스트코를 갔는데 마침 할인행사 중이었다. 내가 사자고 하는데 아내가, "에잇, 그냥 사지 말아요. 막상 필요 없을 것 같긴 해요."라고 했다. 우리는 부부였다. 

결국 사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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