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날 Aug 19. 2023

그 놈의 신발

우리 둘째 아들은 12월에 태어났다. 12월 끝무렵에 태어난데다가 어릴 적 머리 둘레가 커서 대두증 의심을 받았는데 그로 인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발달과 발육이 모두 느렸다. 단 머리만 빠르게 자랐다. 

병원에서는 이것을 뇌의 문제로 보고 간질약을 먹이자고 했었다. 간질약으로 뇌의 발달을 눌러서 성장을 늦춰야 한다 했다. 계속 이 속도로 커지다가는 뇌압이 상승해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이야기는 벌써 5년전 이야기이다. 훌쩍 뛰어 넘어 8살이 된 둘째 꼬부기. 하도 느려서 꼬부기라 부르겠다. 

꼬부기는 어릴 적부터 잦은 검사와 놀이치료와 발음치료등 다양한 치료를 병행했었다. 

꼬부기에 대해서는 나의 <늦어도 괜찮아 결국엔 거북이가 승리할꺼야>에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이 녀석은 두 돌이 지난 시기부터 나를 힘들게 했는데, 이유인즉슨 말이 느리기에 본인도 답답했던지 짜증이 많이 났고, 말을 해도 다른 사람이 이해를 못하니 자신감이 떨어졌었다. 그래서 발음치료를 시작했고, 후에는 놀이치료를 했다. 

꼬부기가 어린이집에 다닐 때 또래 애들과 비교하면 1살은 어려보였다. 동생들과 키나 발달이나 모든 게 잘 맞는 듯했다. 그래서 꼬부기를 보호하기 위해 1살을 꿇려서 어린이집에 보냈다. 그렇게 3년을 다녔나보다. 

그러다 6세가 되던 해에, 제 나이의 아이들과 다니도록 동갑배기 친구들 무리에 넣어주었다. 

그런데, 또래 애들은 아주 크고 발달도 빠르고 새로운 큰 기관으로 옮긴 탓인지 아이는 불안해 했고, 무서워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실어증처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어린이집을 다녔다. 

훗날 7살에 말을 다시 하기 시작하자 친구들이 "어, 너는 말을 못했는데, 말을 할 수 있게되었네?" 라고 했다. 

말을 못하는 아이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바보같지만 바보는 아니야" 라고 얘기했었다. 그런 대우를 받아왔으니 어린이집에 가는 것이 불편하고 싫었었나보다. 왜 어린이집에 가기 싫은지를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으니 

다른 것으로 트집을 잡곤 했다. 

그 중 하나가 신발이었다. 어린이집 가기 전에 화장실을 몇 번이고 다녀온 뒤에 이미 늦은 시간이어서 재촉을 하며 현관 앞에 서 있으면 제 신발을 신으려다 신발이 이상하다며 자꾸 벗어 제꼈다. 신발이 이상해, 이상해 아악~!이렇게 비명을 지르며 울고 불고 난리를 피우고 신발을 던졌다가 다시 신었다가를 반복했다. 

신자마자 신발안에 압정에라도 찔린듯이 곧장 벗으며 울어댔다. 이 행동을 너무 자주 했다. 과장하면 매일 아침마다 그랬다. 가끔 건너뛰기를 하는 때도 있는데, 그런 날도 나는 늘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불안하지만 감추고 최대한 나는 모른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며 집을 나서곤 했다. 

그러면 가다가 응가가 마렵다며 두 번씩 가서 앉아 있다 나오기도 했고, 가는 길에 신발을 벗어 던지기도 했다. 


반복된 일은 나의 뇌에서 자동화 되어서 바로 큰 데미지를 줬다. 갑자기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작은 기미가 보이면 나는 머리 부터 발끝까지 순식간에 반응이 왔다. 

폭발할때도 있었고, 아이를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려 준적도 있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기만 해도 그 시절의 숨막히는 공기가 나를 압도해버린다. 

지금은 그러지 않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서 그랬던 것인데, 어느 정도 말을 다시 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친구도 생기면서 점차 줄어들었었다. 대신 어린이집 들어가기 전에 응가를 하겠다며 인근의 화장실을 꼭 들렸다 가곤 했었다. 

그러고보니 지금 그것도 없어졌다. 얼마나 감사한지..


놀이치료를 1년 이상 다닌 것 같은데, 주 1회 차를 운전해서 집을 좀 벗어나 번화가 거리로 갔다. 그곳은 내가 사는 동네와 달리 식당도 많고 도로도 8차선이었다. 그리고 맛집도 많았다. 롯데리아, 빠리바게트, 베스킨라빈스가 있는 그런 곳이었다. 

한번은 형이 자신을 앞질러 달려가자 꼬부기의 감정이 폭발했다. 형을 우상으로 생각하면서도 형이 자신보다 잘하는 것에 대해 참지 못하고 경쟁하려 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형이었지만, 그래도 점점 자신감이 생기고 있었나보다. 

형이 자신보다 더 빨리 달려가는 바람에 부아가 치밀었는지 횡단 보도 앞에서 신발을 벗어던졌다. 그리고는 이상해 불편해 를 외쳤다. 쌩쌩 달리는 차들 안에는 창밖을 여유롭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으니 도로가나 횡단보도를 건너는 일은 이목을 집중시켰다. 

모든 차들이 신호를 기다리며 멈춰있는 상태에서 꼬부기의 행동과 나의 당혹스러워하는 몸짓은 재미있는 구경꺼리였으리라. 

그렇게 신발을 재빨리 신겨주는데 금새 벗어버리기를 여러번. 내가 많은 눈 때문에도 화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지 더 대담하게 벗었다. 

파란불 신호등이 들어오자 수많은 사람들이 건너기 시작했다. 여기는 신호등이 동시에 바뀌어서 대각선으로도 지나갈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나는 아이를 얼르고 달래서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하는데, 횡단보도 한 가운데서 다시 벗어 제낀다. 

나도 더 참을 수 없어서 못 본 듯 뒤도 안보고 그냥 건너기 시작했다. 꼬부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지만, 도로 위라서 다른 소리에 묻혀서 못들은 척할만했다. 

도로 위에 혼자 남겨진채 빨간 불로 바뀔까 싶어서 마음이 조마조마 했으나 못본 척 한 이상 끝까지 유지해야 했다. 

형은 저런 동생이 부끄러우면서도 걱정이 되었던지 뒤를 힐끔거렸다. 

우리는 횡단보도를 다 건너왔지만 꼬부기는 중간 즈음에 있었다. 

파란 불이 꺼지고 빨간불로 바뀌었다. 이제는 내가 나서야 하는 순간이었다. 횡단보도로 다시 뛰어가서 데려오던지 해야 하는 순간, 꼬부기는 축지법이라도 쓴마냥 빠른 속도로 건너왔다. 울고 있었지만 걸음은 재빨랐다. 그리고 횡단보도를 건너자 마자 다시 신발을 벗었다. 

이미 다 본데다가 횡단보도도 다 건너왔는데, 아까처럼 절절맬 일 있겠나. 그냥 못 본 듯 걸어갔다. 

꼬부기는 다시 신발을 신은 채 잽싸게 따라오기 시작했다. 자 동치료가 되었다. 신발치료, 떼쓰기 치료가 도로가에서 저절로 되었다. 

언제 울었냐는 듯 울음도 그치고 내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이런 속썩이는 아들 있으신가요? 너무 괴로웠던 그 시절, 나는 피곤했고, 여유가 없었고, 지쳐있었다. 번아웃이 왔고, 우울했다. 

지금은 그랬던 꼬부기가 1학년이다. 1학년 1학기 끝을 앞두고 있는데 지난 고생을 다 잊어버릴 만큼 잘해내고 있다. 어느 날은 "엄마 나 돼지 국밥을 먹어보고 싶어. 엄마 나 축구 경기를 보여줘"라고 한다. 그런 얘기에도 아이의 성장을 볼 수 있다.  

내가 한번도 해준 적 없는 것인데, 친구들 얘기를 듣고서 궁금했었나 보다.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었는데 자신이 모르는 것이어서 알아가고 싶었나 보다. 

그게 왜그렇게 기특한지 꼬부기가 자기의 속도로 자라고 있음을 느낀다. 

 


작가의 이전글 독서교실 오픈 준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