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퇴원 날은 하루 종일 퇴원 수속만 밟느라 한 게 별로 없다. 그래서 간략히만 쓰고 그 이후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써보도록 하겠다.
퇴원 날 새벽 5시에 간호사가 찾아와 눈을 떴다. 수액을 체크하길래 뭔가 했는데 오늘 퇴원 확정이니 벌써부터 링거 바늘을 빼주겠다고 했다. 이렇게나 빨리 빼는 걸 보면 오늘 생각보다 일찍 집에 가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퇴원이란 생각에 잠이 싹 달아나 한숨도 자지 못했다. 동생은 여전히 코를 골았지만 전날과 다른 게 있다면, 자길 깨워달란 동생의 부탁을 성실히 이행한 내가 동생이 코를 심하게 골 때마다 흔들어 깨웠다는 거다.(피도 눈물도 없이 세차게 흔들어 깨웠으니 아마 엄청 피곤했겠지...)
그리고 7시가 되자 아침식사가 나오고, 동생과 밥을 먹는 도중 전공의 선생님이 찾아오셨다.(왜 의사 선생님들은 밥 먹는 시간에 맞춰서 오시는 걸까..? 밥을 먹으려면 자리에 있어야 하니 환자의 노쇼 가능성이 적어서?) 선생님은 어제 한 수면 내시경의 결과를 말씀해주셨다.(비수면 아니고 '수면'내시경 맞다.)
"일단...역류성 식도염이 있어요."
예상했던 결과였다. 아무 문제도 없는데 흉통이 그렇게 강하게 올 리가 없었다. 이미 식도염일거라 생각했던 나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지만, 선생님의 말이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이어졌다.
"그리고 위염."
예??? 하는 사이 빠르게 다음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십이지장염까지 발견됐어요."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쓰리콤보였다. 어우 이 집 인심 좋네, 하난 줄 알았는데 세 개나 주고. 어안이 벙벙해 있자 의사 선생님이 말을 이어갔다. 식도염, 위염은 그렇다 쳐도 십이지장염은 생소할 수 있는데, 식도와 위를 거쳐 위의 아래쪽에 위치해있는 십이지장까지 염증이 뻗쳤다는 이야기라고 했다. 표정이 굳은 날 본 의사 선생님은 현대인이라면 이런 증상쯤은 다 가지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자리를 떠나셨다. (대체 요즘 현대인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거야... 이 정도면 상당히 잘못 살고 있는 거 아냐?)
그리고 9시쯤, 아까 나에게 쓰리콤보를 먹인 전공의쌤과 함께 담당 교수님이 회진을 오셨다.(외래 진료를 보시는 바로 그분이다. 내 담당 의사 선생님들 중 대빵이라고 할 수 있다.) 교수님은 날 보자마자 "아이고~~ 뭘 그리 많이 신경 썼길래!!!!" 라며 내 팔을 잡고 흔들어댔다. 나는 할 말이 없어서 머쓱하게 웃고만 있었다.(이것도 신경성인가 보구나...ㅎㅎ) 어쨌든 결론은 이제 신경과, 안과, 부인종양과로도 모자라서 소화기내과의 진료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일단 오늘은 퇴원하고 약물치료를 꾸준히 하되, 2주 후에 다시 외래 진료를 오라고 했다.(아주 종합병원이구만)
회진이 끝나고, 간호사 한 분이 찾아와 처방약이 11시 이후에나 나올 것 같다고 전해주었다. 그렇지만 나는 9시부터 짐을 다 싸놓고 기다렸다. 연락이 오면 언제든 바로 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고 나서 진행된 기나긴 보험 서류 수급과 퇴원 수속, 원외 약국 방문 등등 기타 퇴원 과정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하도 할게 많아 동생이 있어서 다행이었다는 것 외에 할 말이 없다.
이대목동병원의 꽃, 잭슨 피자
병원을 나온 동생과 나는 잭슨 피자집부터 들렀다. 지난번에 먹었던 마가리타 피자를 잊지 못해 제일 큰 사이즈로 한 판을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다 식었지만 여전히 맛이 훌륭했다.
피자를 먹고 나서는 한참 동안이나 처방받아온 약을 정리했다. 병원생활 후 약을 받아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원내에서 주는 약은 원외 약국에서 약사님이 아침, 점심, 저녁 이렇게 맞춰서 조제해주시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아예 약통째로 주는 것도 있고, 지퍼백에 스무 알쯤 와르르 담아서 주기도 한다. 환자가 알아서 약 때마다 이 봉투, 저 봉투에서 약을 잘 골라 먹어야 하기 때문에 복약지도서는 필수다.
진짜 많아도 너무 많은 약들
퇴원 후 내가 받아온 약들이다. 약봉지가 저렇게나 많다. 사진이 흐리게 보이는 건 여러분의 눈이 침침한 게 아니라, 사방팔방에 내 개인정보가 쓰여 있어 일일이 지우기 귀찮았던 내가 사진 전체에 블러를 먹인 탓이다. 원래 복용하던 신경과 약에, 소화기내과 약과 정신적인 약물까지 추가되는 바람에 진짜 너무너무 약이 많고 헷갈렸다. 게다가 아침 점심 저녁이 아니라, 아침 기상 후와 자기 전 약도 추가되었다. 그냥 하루죙일 약만 먹고 사는 거다.(배부르겠어 아주)
여기까지가 퇴원 날의 이야기다. 그 이후로는 꾸준히 시키는 대로 약을 먹고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한없이 우울해지는 날도 있었고, 바람을 쐬러 나가 웃는 날도 있었다.(퇴원한지 고작 3일 됐지만, 다사다난했음) 이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일기에 대한 내 마음이다. 일기를 쓰는 것도, 나르시시즘마냥 다시 읽는 것도 참 좋아했었는데, 이상하게 최근의 일기는 다시 읽는 게 좀 힘들다.
일기를 쓰면서 힐링이 된 건 맞지만, 너무 온전히 그리고 빠르게 내 감정과 대면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흘려보냈을 감정들이 사라지지 않고 글이라는 실체가 되어 다시 날 마주했다. 나는 내 자신의 나약함이 일기에 드러날 때마다 자책감을 느꼈다. 그러다 끝없이 우울해져 결국 눈물이 터질 때면 의사 선생님 말이 맞았나봐 하는 맘에 더욱 우울해졌다. 내가 스스로 바보같이 느껴진다. 행복이란 수면에 손 끝이 닿을 듯 가까이 있으면서도 작은 거 하나하나에도 힘들어하며 스스로 우울이란 깊은 바닷속으로 빠져드는 게. 그럼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을 걱정시키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하는 게. 나는 내가 너무 바보 같다. 우울증 약을 먹는 것 자체가 나의 불안한 정신 상태를 확인 사살당하는 것 같다. 사실 내 스스로가 문제라고 인정해야만 하는 것 같고 또 그게 싫다. 이런 기분이 드는 나 자체가 바보 같다.
그런 생각에 빠져 살다가, 할 수 있는 게 그거밖에 없어서 또 화살을 외부로 돌려버린 나는 문득 내가 매일 보는 약봉지 탓을 하기 시작했다.
이 시뻘건 향정신성약품이라는 표시! 난 이게 보기 싫었다. 하루 한 번도 아니고 아침저녁으로 챙겨 먹어야 해서 하루 두 번이나 보는데, 볼 때마다 내 자신의 나약함이 드러나는 것 같아서 너무 기분이 나빴다. 이걸 볼 때마다 더 우울해지는 기분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 약을 복용하고 나서부터 모든 증상들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효과는 좋다고 인정해야 할 것 같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이 약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나는 아직도 내가 우울증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반감이 크다.)
게다가 위에서도 말했듯이 약이 하도 많아서 매일 골라 먹는 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하루 이틀 정도는 냉장고에 때마다 먹는 약 이름을 써붙여놓고 일일이 찾아 먹었지만, 곧 이 불편함과 약봉지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기 위해 더 쉽게 먹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수많은 검색 끝에 내가 스스로 약을 소분하기로 마음먹고 쿠팡에서 약 포지를 샀다. 약사님들이 쓰는 약봉투처럼 약을 넣어 밀봉하면 쉽게 뜯어먹을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아래는 내가 약봉투를 만든 과정이다.
제대로 안 보고 대충 샀더니 수백 장을 사버렸다. 필요하신 분 연락 주세요...
딱 하나씩만 먹으면 되는 공복약과 자기 전 약 같은 건 빼고, 각각의 봉투에서 6개씩 골라 먹어야 하는 아침과 저녁 약봉투를 만들기로 했다. 봉투를 꺼내 네임펜으로 글씨를 썼다.
그러고 나서는 섞이지 않게 조심조심, 때마다 먹을 약을 골라 넣으면 된다.
그리고 입구부분을 고데기로 스윽 밀어주기만 하면 끝. 실링기도 해보고 고데기도 해봤는데, 확실히 고데기가 훨씬 빠르다. 단, 틈새가 없도록 꼼꼼하게 밀봉해야 한다. 이렇게 넣어서 복용하니 내가 무슨 향정신성인지 항정살인지 뭐시기를 먹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편하게 먹을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
내 맘대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다른 언어로 커스텀도 가능하다. 아침, 저녁 구분만 되면 되니까.
글씨만 쓰다 한번은 그림도 그려봤다. 꽤 마음에 든다. 약 먹기 싫은 맘이 조금은 사라지는 것 같다.(다이어리 꾸미기도 아니고 약봉투 꾸미기라니...이게 바로 약꾸?)
그렇게 만든 나의 약봉투 완성물이다. 진짜 꼼꼼히 보고 넣었으니 '잘못 넣은 거 아냐?'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이미 이틀간 약을 골라먹은 경험으로 어느 정도 외웠다.) 이전에도 모두 투명 지퍼백에 담겨있었으니 빛을 보면 안 되는 약물 같은 것도 없다. 그래도 어둡고 서늘한 서랍 안에 보관할 예정이지만.이렇게 정리하니 얼마나 좋아! 이건 무슨 약이고, 이건 무슨 약이고...하면서 시간을 들여 골라먹지 않아도 된다. 그냥 한 봉지 탁 뜯어서 꿀꺽. 끝. 최고다! 단점이 있다면 이것도 비닐이라 추가적인 쓰레기가 나온다는 것....(지구야 미안해)
추가로, 약봉투에 이름이나 개인 정보가 적혀있어서 버리기 찝찝하신 분들은 봉투를 모아 잠시 미온수에 담가두면 된다.(이제야 좀 실용적인 브런치 같은걸..?)
한데 모아놓은 약봉지들. 나의 개인정보가 가득하다.
이 약봉지를 모아서 물에 담그면 1분이 채 안되어서 글자들이 둥둥 떠다닌다.
바로 이렇게. 그럼 글자 물을 쪼르륵 따라버린 후, 비닐만 모아 재활용 쓰레기로 버리면 된다. 참 쉽죠?
아무튼, 약물치료 덕분에 내가 갖고 있던 증상들은 모두 완화되고 있다. 아직 모두 사라진 건 아니지만, 편두통도 소름 돋는 증세도 많이 나아졌다. 흉통도 식전 약을 먹은 후로는 많이 나았다. 이렇게 꾸준히 약물치료를 하다 보면 곧 건강해질 수 있을 것 같다.(급 희망차게 마무리하기)
내가 좋아하는 빵집의 크루아상 샌드위치를 사 먹으며 행복해하기도 하고,
푸른 잔디밭을 뛰어노는 솜이를 보며 웃기도 하고,
지난 일기를 본 친구들이 깜짝 선물한 크리스마스 양말에 기뻐하기도 한다.(어떤 양말을 좋아하는지 써두었었는데 그에 맞춰서 골라 보내준 섬세함에 감동ㅠ)
아무튼, 잘 지내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던 일기에 대한 나의 감정 변화 때문에 당분간 투병일기 말고 그냥일기를 써볼까 한다. 투병생활 말고 다른 얘길 담은 일기를 써보고 싶은지 꽤 됐지만,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을 읽고 나서 생각난 나의 꿈 이야기나, 솜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이야기 등 소소한 일상 일기를 써보고 싶다. 이제 '나는 아프고 나는 나약합니다.' 같은 건 당분간 쳐다보기 싫어서 말이다. 2주 후에 외래 진료를 가니 그때나 다시 투병일기를 쓰려나.(이래 놓고 갑자기 낼모레 다시 투병일기를 쓸지도, 이래 놓고 그냥일기는 평생 안 쓸지도)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우선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예정이다.(상당히 무책임한 작가로군) 열심히 약 먹고, 더 나아진 몸과 마음으로 돌아오겠다. 그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