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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솜사탕 Jul 28. 2022

솜이와 나

그냥 어느 날 밤에 끄적인 일기

사람과 강아지는 어떤 관계일까?

주종관계? 가족관계? 지인(?)


사람과 강아지의 유대감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이 세상에 있을까.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친구로 불려 온 강아지들이 왜 그리도 인간을 좋아하는지 명확히 아는 사람이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솜이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면 위처럼 온갖 생각들을 다 해보게 된다.


또 하나 궁금한 것. 대체 얜 내가 왜 좋지?


밥을 주니까?

그렇다기엔 맛있는 것으로 꾀어내려는 다른 사람들에겐 쉽게 맘을 내주지 않는다.

밥은 누구라도 줄 수 있는걸.


오랫동안 나와 같이 지내서?

글쎄, 그렇다면 어떤 인간이든지 단지 같이 시간을 많이 보내기만 하면 강아지 특유의 그 맹목적인 사랑이 생겨나는 것일까?


이유야 모르겠지만, 이거 하난 확실하다.

나는 저 아이를 너무너무 사랑한다. 그리고 솜이도 그걸 안다.


그래서일까. 강아지는 본능적으로 자길 예뻐해 주는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별한다고 한다.

내가 자길 내 목숨보다 아낀다는 걸 알아서일까.

껌을 물고 있을 때 다가가면 으르렁거리고, 본인이 내킬 때만 뽀뽀해주는, 조금은 새침한 애지만, 가끔 내 맘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아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솜이와 내가 깊게 통한다는 느낌이 든다.


많이 회복되었지만, 가끔씩 적응 장애 증상이 찾아올 때가 있다. 피곤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머리 왼편에 소름이 돋고, 왼쪽 눈썹에 통증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신체적인 증상보다 날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불안감이 온몸을 뒤덮을 때다.


가끔,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밑도 끝도 없이 불안해질 때가 있다. 계속 이어지는 내 삶 자체가 무서울 때가 있다. 내가 앞으로 꼭 잃어야만 하는, 인생에 있어서 필연적인 상실들이 두려울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책을 읽어보려고 하지만 집중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책을 읽기 어렵다면 핸드폰을 들어 뉴스란의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거나, 시답잖은 인터넷 글들본다. 그럼 곧 도파민에 잠식된 뇌가 생각을 멈춰버리고 잠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불안증이 심한 날이면, 어떤 것도 내 불안감을 막을 수 없게 되고, 가슴이 답답한 느낌에 방을 나가 어두운 거실에 홀로 앉아있곤 한다.


그렇게 어두운 거실에 앉아있자면, 분명히 침대에서 코 골고 자고 있던 솜이가 어느새 몸을 부르르 털고 일어나 내 앞으로 달려오는 것이다. 됴됴됴됴 하는 발소리가 나기에 불이 다 꺼져있어도 금세 알 수 있다.



졸려서 꿈뻑꿈뻑하는 눈을 한 채,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하고서는 왜 여기 있냐고 묻는 듯이 날 쳐다본다.


그리고는 내 품으로 뛰어올라 날 빤히 보다가 내 얼굴을 핥아준다. 촉촉한 코랑 축축한 혓바닥으로. 눈이고 볼이고 입술이고 마구 핥는다. 그러면 그게 그렇게도 위안이 되는 것이다. 그 작고 따뜻한 몸이 나한테 와서 안기면, 이 세상 모든 걸 무서워지게 했던 불안감도 잠시 멀어지는 것이다.


콩닥콩닥 뛰는 작은 심장이 맞닿아 있는 왼쪽 팔 부근에서 느껴지고, 사람보다 좀 더 높은 체온을 지닌 그 몸뚱이가 나에게 따끈따끈한 온기를 내준다.


작은 온기가 망망대해에서 간신히 손에 닿은 구명튜브라도 되는 것처럼 소중하게 부둥켜안고 있으면, 금세 차가웠던 나까지 따뜻해지는 것이다.


녀석은 매우 졸리지만, 나와 같이 있어주기 위해 일부러 나와준 것이므로 내 품에 안겨 또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그럼 나는 그 모습을 보다 희미하게 웃고는 솜이를 편히 재우기 위해 안아 들고 다시 방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리를 잡고 눕는 솜이를 보며 편히 잤으면 하는 마음에 나까지 숨죽이고 누워있다가 나 역시 그렇게 잠이 드는 것이다.



이를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작은 아이가 나에게 주는 거대한 사랑을 내 좁은 마음 안에 넘치듯 욱여넣고는 또 하루를 산다.


솜이를 처음 만났을 때 좁은 케이지 안에서 '행복'이란 단어를 들어본 적도 배운 적도 없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기에, 내가  단어를 가르쳐주겠노라 다짐하고 데려왔는데, 정작 배운 건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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