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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솜사탕 Sep 06. 2023

과민한 뇌를 가진 사람의 이기적인 일기


어제는 병원에 다녀왔다.

한 달 반 혹은 두 달 주기로 꼬박꼬박 병원에 간다.

핸드폰 캘린더에 '병원'이라고 쓰인 글자가 보이면

별일 없을 거 알면서도 괜스레 침이 꿀꺽 넘어가고, 손에 땀을 쥔다.


아팠던 사실을 잊고 현실을 살다가

병원에 가면, 기억이 되살아나고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싫다.


큰 대학병원을 다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정말 북적북적하다.

산소호흡기를 끼고 베드째 옮겨지는 환자, 휠체어를 타고 있는 환자,

아들딸의 부축을 받아 걷는 어르신들, 상복을 입은 사람들까지 로비에 우글거린다.

생사를 다투는 일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을까?

현실에서 하던 모든 고민들이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비하면 너무 보잘것없게 느껴진다.


그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지나가며

내가 살면서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병원에 와야 할지 생각해 봤다.

수백 번? 수천번? 벌써 지겨운데?


'이런 곳에 꼬박꼬박 다니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은 정말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소란스러운 대기실에 앉아 눈을 꾹 감는다.


병원에 다녀온 날은 머릿속이 시끄럽다.

해야 할 생각들과 안 해도 될 생각들이 서로 손잡고 짝짜꿍 난리를 친다.

오늘 역시 머릿속에 글자들이 둥둥 떠다니기에

오랜만에 하나둘 모아 본다.



어느 날,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자기 연민에 가득 찬 사람이 아닐까.

그 누구도 아니고 본인 자신이,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데.

제 발로 들어간 늪에서 누가 꺼내 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다가 내 일기가 자기 연민을 부추기면 부추겼지,

나아지게 하진 않는 것 같아서 투병일기를 마무리 지었었다.

(많이 건강해져서 끝낸거지만 저 이유도 다.)


게다가 이만하면 다행인거야, 행복한거야 하는 생각에

무슨 일이 생겨도 글을 쓰지 않고 넘겼다.


그런데 있었던 일을 덮어두고 그냥 지내다 보니

오히려 더 비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젖은 빨래를 쫙 펴서 햇빛에 널어두었으면 벌써 다 말랐을 것을

꽁꽁 싸매고 감춰두어서 마르지도 않고 냄새만 나는 기분.


덮어두기보다 글을 쓰면서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고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오히려 자기 연민과 부정으로부터 날 꺼내는 길이 아닐까.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내 안에서 꺼내 글자로 바꾸어놓으면

제3자처럼, 별거 아닌 해프닝처럼 볼 수 있는 게 좋다.


그런데 힘들었던 시간들을 그대로 안고사니,

내가 느낀 감정이 나와 분리되지 않고 계속해서 내 안에 남아있는 것이다.

꺼내서 먼지도 털고 옷도 입혀서 글자로 새단장해두면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기 편한데,

있는 그대로 내 안에 스며들어 있으면 나중에 떼려고 해도 끈적하게 달라붙어서 떼기 힘든 감정이 된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는가? 이해 못 한다 해도 이해한다. 나도 가끔 내가 별 생각을 다 하고 산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래서 늦게나마 꺼내서 단장해 보는 거다 지금.

사실 꽤나 피곤하기 때문에

단추도 엉망으로 끼워주고 음 예쁘네 하고 대충 내보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일단 더 끈적해지기 전에 떼어내 본다.



4월 말, '나는 이제 완치되었고 해피엔딩이에요' 하고 행복한 일기를 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 6월, 극심한 어지럼증이 시작되었다.


뇌졸중 재발을 의심했을 정도로 심한 어지럼증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얼굴이 45도로 기울어졌고, 힘주지 않으면 몸이 한쪽으로 무너졌다.

걸을 때 가장 어지럼증이 심해져서 걷는 게 너무 힘들었다.

비가 자주 올 때라 우산을 지팡이 삼아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걸어 다녔다.

눈앞이 뿌얘서 눈도 잘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과 눈앞에 늘 안개가 끼어있는 느낌이라 무언가에 집중하는 게 굉장히 곤욕이었다.

한 가지 일을 하다가도 쉽게 판단이 흐려져 다른 생각이 끼어들곤 했다.


급히 병원을 찾았고,

의사는 두 가지 가능성을 내놓았다.


1) 편두통성 어지럼증(전정편두통)

2) 뇌경색 재발


내 증상은 작년 증상과 확연히 달랐고, 오히려 1번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기저질환이 있었던 환자이기에 2번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내가 죽도록 싫어하는 MRI, 안구운동검사 등 다시 여러 검사들을 받게 됐다.


의사는 빠른 검사를 위해 입원을 제안했지만,

지난 입원들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던 나는 입원을 거부했다.

그리고 시간이 좀 많이 걸리더라도 외래 검사로 받기로 했다.

(이땐 몰랐다. 외래 검사는 실비가 많이 안 나온다는 것을....나중에 병원비 폭탄맞고 알았다.

실비보험 있으면 웬만하면 입원하세요...호호...)


어지럼증이 심하니 운전도 할 수 없고, 혼자 다니기도 어려워서

엄마가 검사를 같이 다녀주었다.


MRI 검사 당일, MRI실에 들어가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갑자기 의료진이 두세 명 정도 들어오더니

괜찮을 거라며 날 안심시켰다. 담요도 잘 덮어주고 춥진 않은지, 불편한 곳은 없는지, 링거줄도 한번 더 체크해 주었다.


뭔가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밖에 있던 엄마가

내가 MRI를 못 견뎌하는 걸 알고 걱정이 돼서 안절부절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들어와서 좀 더 신경 써주셨다고.

(아직까지도 다 큰 딸 걱정하느라 바쁜 울엄마)


아무튼, 그래서 MRI가 시작되고 나서는 어떻게 버텼느냐...

한창 '그레이트 서울 인베이젼(GSI)*밴드 음악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빠져있었을 때라

MRI의 귀를 찌르는 소음이, 음향이 좀 나쁜 락페스티벌 소리라고 정신승리하면서 버텼다.


'2023 MRI 락페스티벌!!'


내 옆에 유다빈밴드와 터치드, 오월오일이 공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끝까지 버텼다.

그러니 의외로 버틸만하더라!

(아마 평생 MRI 자주 찍고 살 것 같은데 종종 써먹어야겠다. 락페 놀이)


그리고 뭐 피 뽑는 거나..간단한 검사들은

견딜만한데, 종종 하는 안구운동검사가 꽤 힘들다.


깜깜한 방안에 들어가서 VR 기기 같은걸 머리에 쓰고

한 시간 정도 가만히 앉거나 누워서 움직이는 빨간 불빛을 눈으로 쫓아야하는 검사다.

(전에도 일기에서 몇 번 언급했던 적이 있다.)


한두 번 하면 괜찮은데 반복될수록 지쳐간다.

그리고 어두운 곳에서 빨간 점만 보고 있으니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기분이다.

(아 맞다 나 이런 거 하는 '환자'였지! 하고 깨닫게 해주는 검사랄까)


나는 눈운동신경에 문제가 있었던 환자라서 이 검사를 하기도 하지만,

이게 어지럼증 검사이기도 해서 같이 진행했다.


어쨌든 결과는,

1번 편두통성 어지럼증으로 결론 났다.

이전부터 들어온 얘기지만 나는 과민한 뇌를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생각이 너무 많은 것도 그래서일지도)

그런 사람들은 작은 일에도 쉽게 자극을 받는다.


그리고 생각보다 아무 이유 없이 편두통성 어지럼증을 겪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물론 대부분 나이대가 좀 나보다 높지만)


편두통성 어지럼증은 말 그대로 편두통이 어지럼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흔히들 편두통 하면 두통만 생각하는데,

그게 두통으로 나타나는 주기가 있고, 어지럼증으로 발현되는 주기가 있다고 한다.

대부분 4,50대 이상이 되어서 두통이 어지럼증으로 바뀐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 주기가 빨리 찾아왔다고 했다.(세상엔 참 알 수 없는 일들이 많다)


편두통성 어지럼증은 생활습관, 식습관이 정말 중요한 질병이라 몸에 좋은 것만 먹고, 푹 자고, 스트레스 안 받으면 나아질 수 있다고 한다.(난 이미 그렇게 산 것 같은데..)

얼마나 식습관의 영향이 크냐면, 자극적인 분식 한 끼 먹고 도지는 사람도 있다고.

(TMI로 요즘 채식에 관심이 많다. 매끼는 아니어도 하루 한 끼 정도는 하려고 하는 편. 건강히 먹는 게 내 어지럼증에 좋다고 한다.)


물론 약물치료도 병행해야 한다.

(굉장히 강한 약물치료를 2달째 지속하는 중이다. 처음 먹었을 때 너무 세서 심장을 부여잡았다. 그대로 잘못되는 줄)


매일 복용하는 약 이외에도

증상이 너무 심할때 먹는 비상약을 늘 가지고 다는데

맨 처음 그 약을 먹었을 때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어지럽지 않게 하는 편두통 약인데,

나는 어지럼증이 아니라 편두통으로 인한 안개증상(정식 명칭은 아니다. 그냥 내가 이렇게 부르는 것 뿐.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 같아 집중이 잘 안되고 눈 앞이 뿌옇게 보이는 증상을 뜻한다.)에 약효가 있었다.


처음 약을 먹은지 5분이 채 되지 않아서

뿌옇던 세상이 한순간에 워셔액 뿌린 차창처럼 깨끗해져서

회사에서 컴퓨터 화면을 보다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둘러봤을 정도다.


머릿속도 너무 말끔해져서 집중이 얼마나 잘되던지!

남들은 늘 이런 깨끗한 머리로 일한단 말이야? 하는 맘에 왠지 억울했다.

(근데 이런 드라마틱한 약효도 처음에만 이럴뿐, 나중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

그래도 점차 나아지는 것을 느끼며 열심히 복용했다.


약이야 뭐 원래도 매일 한 움큼씩 달고 사는 사람이라 그러려니 하는데

운동을 금지당해서 그게 좀 힘들었다.


작년 12월부터 헬스장에 다니며 PT를 받고 건강을 많이 회복했는데, 약물 치료하는 동안 웨이트를 금지당해서 PT를 못 받았다.


기복이 있으면 안 되는 내 병에 심장을 빠르게 뛰게 하는 웨이트는 그리 좋은 운동이 아니라고 한다. 의사 선생님은 요가나 필라테스를 추천했다.

웨이트 할 때만큼은 환자도 아니고 그냥 튼튼한 운동러1이 된 것 같아서 좋았는데...답답했다.


그래서 유산소만 하거나 집청소를 미친 듯이 했다.(청소기가 팔운동이 되더라)


그리고 걷는 연습을 많이 했다.

작년에도 걷는 연습을 했었는데 올해도 또 하려니 현타가 와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우선은 어지러워도 걸어야 회사도 가고 생활은 할테니...

몸에 힘을 주고 자꾸 걸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어지러워도 걷는 법을 터득했다. 한 발을 떼고 휘청하기 전에 빨리 다음 발을 내딛는 거다.)


아무튼, 그렇게 치료한 지 두 달이 넘었다.


어제 병원에서는 경과가 아주 좋다고 했다.

어지럼증도 거의 사라져 잘 걸어다니고, 눈도 좋아졌다.

물론 작년에 나빠진 시력이 돌아오진 않았지만

눈앞이 뿌옇던 안개증상은 사라졌다.(집중도 전보다 잘 된다)


그래서 어지럼증 약을 하루 2회에서 1회로 줄이기로 했다.

(원래 먹던 뇌경색예방약이 하루 2회라 횟수는 같지만)


심장이 느리게 뛰는 약을 먹고 있어서 그런가

예전보다도 더 차분하게 살고 있다.

(과민하게 반응해서 어지럼증에 좋을 게 없기 때문)


...쓰다 보니 결론은 지금 잘 지내고 있다는 얘기다.


병원에 다녀오고 나면 일상이 더 소중해지기 때문에

모든 것에 감사해하고 있다.


일기를 끝마칠 쯤이면 긍정적으로 끝내야 한다는 병이 있는 건가,

처음에는 병원에 다녀오고 나서 급격히 다운된 마음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써놓고 보니 이러한 시간들을 거쳐서 힘들었고! 근데 지금은 많이 나아졌고! 아직 치료 중이지만 경과가 좋다! 하고 희망적인 흐름이 됐다.


...방금 실시간으로 깨달은 건데,

어쩌면 이게 일기쓰기의 순기능인 걸까.

왜 내 일기마다 우울하게 시작해 놓고 결말은 긍정일까 싶었는데, 일기가 날 그렇게 만든 거였구나 싶다.


있었던 일들을 꺼내놓고 새 단장해서 보고 나니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역시 글쓰기는 최고의 테라피.


아무튼 쓰고 나니 철저히 나의 감정 정리를 위해 쓴 이기적인 글이 됐다. (일기란 게 원래 그런 거 아니냐며 합리화해 본다)


단추를 제대로 채웠는지 양말을 짝짝이로 신겼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나에게서 떼어낸 이야기.(별거 없다)


조만간 또 내보낼 감정이 생기면 또 이기적인 글로 찾아올지도.


모두들 건강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점 명심하시고,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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