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여행기
어제까지만 해도 내리다 말다 하던 비도 그치고, 하늘을 흐릿하게 가리던 구름마저 사라진, 그야말로 좋은 날씨로 하루가 시작된다. 여행을 와서 날씨가 맑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다.
오늘은 와이프가 그렇게나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성게 미역국을 먹을 예정이었다. 개인적으로 성게 미역국을 여기저기서 먹어본 기억이 있는데, 한 번도 맛있다고 느꼈던 적은 없었다. 개인적으로 소고기의 기름이 떠있는 고기 향 진하게 나는 묵직한 미역국을 좋아하기에, 따뜻한 소금물에 불린 미역과 성계 부스러기를 넣은듯한 그것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내가 먹고 싶다는데, 내 취향이야 뭐가 그리 중요할까? 열심히 지도 앱을 이용해 주변의 맛집 검색을 시작했다. 그리고 의외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의 리뷰와 높은 별점을 기록하고 있는 가게였다. 심지어 위치는 우리가 머물던 숙소로부터 불과 6분 거리!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 가게의 성게 미역국은 분명 평이 좋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하기를 이 가게의 시그니처는 바로 생선 조림. 그리고 이제 제철을 맞은 갈치조림은 반드시 먹어야 하는 메뉴였던 것. 하지만 겉보기에 비해 적게 먹는 우리 부부에게 미역국에 2인분 기본으로 나오는 갈치조림을 추가로 먹기에는 너무도 많은 양이였기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우리가 내린 결론은 바로 '포장'이었다. 우리가 잡은 숙소는 취사가 가능하도록 냉장고에, 조리용 하이라이트, 냄비, 그릇 등 각종 취사도구 일체가 갖춰져 있었다. 그렇게 포장해와 숙소에서 편안히 먹는 아침식사의 맛은 무척이나 훌륭한 것이었다.
우리가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여행을 와, 식당을 다니면서 알게 모르게 느끼는 불편함이 있었다. 캐나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면 우리 부부는 한국어로 잡담을 하기에 주변에 우리 이야기가 어떻게 들리는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 많은 외국인들 가운데 한국말을 알아들을 경우는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따금 보이는 소수의 한국사람들만 조심하면 정말 편안히, 다양한 주제로, 온갖 민감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 오고 나서는 달라졌다. 사방은 한국사람들로 가득했고, 일하는 사람들도 모조리 한국인들 뿐. 이 당연한 사실에 우리 부부의 대화는 이전보다 훨씬 불편해졌다. 자연히 말하는 소리는 작아지고, 잘 안 들리고, 그러면서도 주변의 이야기는 괜히 더 잘 들리는 것 같고, 그러다 보니 말하기를 포기하는 일마저 생긴다. 그렇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끼리의 시간이 줄어든다. 그리고 줄어든 시간만큼 스트레스와 오해는 쌓여간다. 그래서 둘만의 시간과 공간은 한국에서 더없이 중요했다.
그런 우리에게 포장은 너무도 탁월한 해결책이었다. 주변의 시선과 목소리를 신경 쓸 필요 없이 오직 서로 간의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공간에서야 비로소 편안히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둘 뿐인 숙소로 포장해 온 음식은 꿀맛이었다.
성게 미역국은 지금까지 먹었던 모든 성게 미역국에 대한 인상을 바꿔버릴 만큼 맛있었다. 성게 미역국은 맛있는 음식이었다. 그저 지금까지 내가 먹어온 것들이 잘못됐던 것일 뿐. 그런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맛이었다. 갈치조림은 과연 대표 메뉴라 할 만하다는 말이 나올만했다. 정말 가게에서 먹었으면 많이 난감했을 만큼 많은 양의 갈치가 맛이 제대로 배어든 무와 감자 사이에 구석구석 있었고, 그들을 뒤덮고 있는 빨간 양념은 그야말로 최고였다. 반씩 덜었던 햇반이 모자라다고 느껴질 만큼 흰 밥에 비볐을 때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음식이었다.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치고 나니, 싱크대에 설거지거리가 가득 쌓인다. 마치 집에서 밥을 해 먹은 만큼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결말에 조금 허망함이 밀려왔지만, 여전히 입안에 남아있는 기분 좋음에 마음이 풀린다. 모든 정리가 끝나고, 집 밖으로 나오니 그렇게나 맑았던 날씨가 조금 흐려졌다. 맑은 중에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이중섭 거리를 걸었다. 이중섭 화가의 제주 시절 생가가 위치한 곳에 길을 내어 예쁜 거리를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여러 기념품과 소품점들이 들어차 있어 눈과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예쁜 거리에 취해 아래로 아래로 걷다 보니 점점 더 새로운 풍경이 나온다. 그동안 지도 앱을 켜고, 스마트폰의 화면만 쳐다보며 걸어왔는데,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과감히 폰을 주머니 깊숙이 집어넣고 그저 길을 걸었다.
처음 보는 길, 낯선 풍경, 그리고 멈춰 섬.
그러다 우연히 하늘 저편에 무지개를 마주했다. 맑았다, 비가 오다, 바람이 불다, 그러다 마침내 눈에 들어왔다. 그저 목적도 없이 걸었건만, 깜짝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도 담았다가, 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쉬고 있던 스마트폰을 불러내어 사진으로도 남겼다.
지칠 때 즈음에 받아 든 선물에 다시 기운을 차려 걷다 보니 저 멀리 항구가 보였다. 하지만 멀리 보이는 항구에 다다르기 전 우리의 관심을 잡아끄는 표지판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천지연 폭포 1km'
목적 없는 산책에 명확한 목적이 생기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