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E. H. 카
‘질문’은 당연히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행위겠지만, 무의식적이고 단순한 행동이기에 앞서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대화를 위해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특히, 그 질문의 형태나 대상이 근원적일 경우 이후 이어질 이야기의 방향이 더 생산적일 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웃음이란 무엇인가?’처럼 말이다. 근원적인 질문이 우리에게 당혹감으로 다가오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대답하기 무척 까다롭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막막하다. 누구나 역사가 무엇인지 대충 알고는 있지만 타인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해박한 역사적 지식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흔하게 볼 수 없다.
마찬가지 이유로 E. H. 카(Edward Hallett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많은 사람이 알고는 있지만 제대로 읽은 사람은 별로 없다. (오해하지 말자, 필자도 마찬가지다) 이제 겨우 3번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의 당혹감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 책은 1,960대라는 시간적 제한과, 크게는 영어 문화권 작게는 영국이라는 지역적 제한, 그리고 역사학자라는 전문가적 제한을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어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책에서 등장하는 인용문을 저자가 의도한 문맥에 맞게 온전히 해석하려면 전문가 수준의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애초의 이 책은 대학 강좌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책이며, 강좌의 대상이 20세기 초반 영국의 지식인(특히 역사학자)이었다.
두서없이 글을 쓰다 보니 서평이 아니라 이 책을 읽지 말라는 말처럼 돼버렸지만, 쉽게 술술 읽히는 책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할까? 그리고 왜 읽어야만 할까?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그동안 읽어온 수많은 역사 서적의 대부분은 이 책 『역사란 무엇인가』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아왔고 지금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이 어려운 이유는 복잡해서라기보다는 낯설기 때문이다. 생소한 역사학자와 역사책, 그리고 잘 모르는 역사적 사건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느끼게 된다. 저자인 E. H. 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다지 생소하거나 복잡하지 않다. ‘역사란 역사가와 그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이 유명한 문장이 등장하는 책이 바로 『역사란 무엇인가』이다. 누군가는 진부하다는 평가를 내질지도 모르겠지만, 글을 좋아하는 필자에게 이보다 역사를 이토록 아름답고 지적으로 정의한 문장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이 문장 딱 하나만 기억해도 이 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문장 이외에도 기억할 만한 문장과 문단이 넘쳐난다. 그러니 만약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들에겐 모든 것을 한 번에 파악하겠다는 욕심보다는 마음에 닿는 문장을 찾겠다는 희망으로 읽기를 권한다. 한 가지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역사가 자신도 역사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는 E. H. 카의 주장이다. 고대 그리스의 주인공이 아테나와 스파르타인 이유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람이 가장 많은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순한 사실이나 기록을 역사로 만드는 것은 역사가의 해석이며, 해석이라는 행위에는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사상이 담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역사 서적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책을 쓴 사람, 즉 역사가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역사책을 말할 때 책만 뚫어지게 바라본다고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아니다. 책을 왜 그렇게 썼는지 알아야 동의할 수도, 저항할 수도, 비판할 수도 있다. 또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다룬다는 의미에서 메타 인지적 역사책이라고 감히 말해본다. 여러모로 독자 인식의 지평을 활짝 펼쳐주는 책이다. 합리적 이성의 지평을 지향하는 것은 고전의 필수 조건이다. 그리고 『역사란 무엇인가』는 이 조건에 가장 적합한 책이었다.
의무감으로 읽게 되었지만 기대 이상의 현학적 만족을 주었다. 물론 E. H. 카의 논리와 사료들을 모두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이런 강좌를 왜 하는지 그리고 책까지 내면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는 알게 되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그래도 역사는 움직인다. 시대에 굴복하듯 작게 속삭이던 갈릴레오의 심정은 경험주의의 타성에 젖어있던 기득권들의 역사의식을 향해 소리쳤던 카의 심정과도 같을 것이다. 강의마다 역사학자의 역할과 중요함 그리고 쉽게 빠지기 쉬운 애매한 오류의 문제들을 꼼꼼하게 분석, 분류해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책에서 만나 뵙게 되었지만, 친절한 교수님이 귀엽기까지 하다. 69세의 노년 학자의 걱정스러운 잔소리처럼 지겹기도 하지만 계속 읽다 보면 빠져들게 된다.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영어 사용권 세계의 지식인들과 정치사상가들 사이에서 이성에 대한 신념이 약화하여 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계에 대한 그 충만한 감각이 상실되었다는 사실이다.
▶︎ 변화에 무감각한 것이 큰 문제이다. 저자는 ‘그래도 - 그것은 움직인다’라는 대답으로 결론지었다. 역사가는 언제나 변화에 민감해야만 한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였다.
역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일관된 연관성을 확립할 때에야만 의미와 객관성을 가지게 된다.
▶︎ 과거와 미래 사이의 일관된 연관성을 확립하는 것은 역사의 의미와 ‘객관성’을 부여하는 행위이다.
산업혁명의 가장 광범한 사회적 결과는 사유할 수 있게 된, 즉 자신들의 이성을 이용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의 수가 점차 증가했다는 점일 것이다.
▶︎ 산업혁명의 가장 주목할 성과는 사유: 자신의 이성을 이용하게 된 사람의 수가 증가했다는 것!
메타 인지적 역사서
이런분께 추천드려요!
진지한 역사서를 읽고 싶은 분
역사를 다룬 고전이 그리웠던 분
현학적 만족이 필요한 분
역사란 무엇인가
저자 : E. H. 카
번역 : 김택현
출판 : 까치(2015, 1쇄 1997)
지식/정보 : ★★★★☆
감동/의미 : ★★★☆☆
재미/흥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