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강신주
인간은 죽을 때까지 시집을 몇 권이나 읽을까? 아니면 질문의 범위를 조금 줄여서 인간에겐 평생 기억하고 싶은 시가 몇 편이나 있을까?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부끄럽게도 필자는 제대로 읽은 시집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학생 시절 시험 때문에 몇 편의 시를 억지로 외운 게 전부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시를 읽을 때면 '글을 읽는다'는 기분은 전혀 없었고 그냥 '글을 느낀다'라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시를 읽어도 매번 드는 생각은 '이게 무슨 말이지'였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 한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억지로 이해하려고 하다 보니 힘들고 지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다시 찾는 일은 없는 법, 그렇게 시는 나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철학도 마찬가지였다.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필자에게 철학이란 '스노비즘(snobbism)에 중독된 꼰대들의 어려운 말장난' 정도였다. 다행히 지금은 많이 사회화(?)되어 철학의 가치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지만, 철없던 시절 당연한 말을 어렵게 꼬아 놓은 것처럼 느껴져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직도 철학이 결코 만만한 대상은 아니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읽을수록 모르는 게 많아지는 신기한 경험을 철학 서적을 읽을 때마다 느끼고 있다. 물론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쉽고 친절한 (독자 친화적인) 책도 분명히 있겠지만, 여타 재미있는 책에 비해 외면받는 게 현실이다. 철학에서 흥미를 느끼기란 점심 메뉴 선택보다 어렵다. 그러다 만난 것이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이다.
시를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여러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주관적인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대화한다고 해서 타인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글만으로 시인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더욱더 힘든 일이다. 게다가 그 글에 사용된 언어가 주관적, 함축적, 상징적이라면 해석은 고사하고 인식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반대로 철학을 이해하는데 가장 난해한 부분은 철학자는 보편 진리를 추구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유의 광활한 바다에서 등대 역할을 할 수 있는 진실을 발견하는 일이 철학의 중요한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자는 고독과 고뇌의 순간들을 수없이 겪으면서 진실에 다가간다. 결국 닿지 못한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사유와 사고를 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철학의 본질이다. 이처럼 시와 철학 중에 하나라도 제대로 배우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둘을 같이 접하면 오히려 쉽게 둘 다 이해할지도 모른다는 놀라운 상상력을 한 작가가 있다. 그 어려운 일에 도전하고 빛나는 과실까지 얻어낸 책이 여기 있다. 강신주 작가의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이 바로 그런 책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주체적인 삶을 꿈꾼다. 하지만 영원한 권력이라는 불가능한 꿈을 키우는 데 열중한 나머지 주변을 돌아볼 틈이 없는 위선자들은 시인과 철학자의 탄생을 반기지 않는다. 개인의 기쁨과 자유를 교묘한 논리로 감추고서 더욱 근면하면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세뇌하고 있다.
이런 주입식 관습과 폐단을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하는 시인과 철학자가 그들에게 반가운 대상일 리 없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러한 시와 철학이 사유되지 않는다면 남는 것은 공멸뿐이다. 존재를 낯설게 바라보고 그에 대한 자신만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기쁨과 자유의 철학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 그러한 여정에 든든한 동반자로 이 책은 손색이 없다. 따뜻한 철학, 명료한 시에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이 책에는 있다. 시와 철학의 관계를 고찰하는 일이 이리도 아름답게 느껴질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저자의 풍성한 인문학적 지식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적인 문장들을 소중한 사진처럼 간직하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
따라서 시와 철학의 숙명과도 같은 ‘난해함’은 오히려 즐거운 지적 유희의 대상이 된다. 저자의 해석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맨 앞에 등장했던 시를 다시 읽을 때의 뿌듯한 감동은 모든 독자를 분명 매료시킬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의 따뜻하고 친절한 설명과 해석은 중독적이다. ‘과연 이 시는 어떤 철학자와 어울리는 것일까?’ 혹은 ‘다음에 등장하는 철학적 사유는 어떤 것일까?’라는 생각에 조바심마저 생긴다. 따라서 상당히 두꺼운 책이지만 끝까지 읽는 데 큰 공을 들였다는 생각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시와 철학이 소개되지 않아 아쉬움이 남았다. 그 정도로 가독성도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가을밤을 시와 철학으로 우아하게 물들이고 싶다면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펼쳐보자.
시와 철학은 인문학의 양극단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와 철학은 모두 이성복의 말처럼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해" 친숙한 세계를 낯설게 하는 인문학의 본령에 충실한 것들입니다. 앞서 말한 뇌과학의 현대 이론이 타당하다면 시는 정서와, 철학은 사유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을 겁니다.
▶︎ 시와 철학의 역할. 인문학과 우리의 삶에서 시와 철학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그 역할과 위치가 조금 더 명확해질 것이라는 기대가 생겼다. 우리가 이 책을 읽고 시인과 철학자로 거듭나야 하는 이유는 우리를 둘러싼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권력과 관습은 인간의 자유와 기쁨의 사유를 교묘하게 감추려 하기 때문이다.
'사이-나눔'과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요? 하이데거에게서 이 두 가지는 결국 같은 것으로 사유됩니다. 밝지 않으면 사물들이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역으로 말해서 사물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밝음도 의미가 없겠지요. 김춘수의 시를 빌리자면 '유리알', '나전', '눈망울' 등은 밝음이 있어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고, 역으로 밝음은 '유리알', '나전', '눈망울' 등이 있어야 자신이 있다는 것을 보일 수 있는 겁니다.
▶︎ 존재와 존재자, 사이-나눔은 결국 같은 것을 사유한 다른 모습일 뿐이다. 어둠에서 밝음으로 가야 존재자들을 볼 수 있고, 존재가 있어야 어둠과 밝음을 구분할 할 수 있다. 사물(존재자)과 밝음(존재)은 그렇게 존재한다. 결국, 하이데거와 김춘수는 다른 시대에서 다른 삶을 살았지만 같은 생각을 했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아케이드란 가운데에 긴 보도가 있고 양쪽에 상점들이 길게 줄지어 늘어서 있으며 그 상점들 위로는 밝은 채광을 위해 유리 아치로 뒤덮어 놓은 그런 건축 양식을 가리킵니다.
▶︎ ‘아케이드’의 정의. 시작은 건축양식의 한 종류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또한, 아케이드 게임이란 사람의 소통이 많고 혼잡한 곳에 들어가는 업소용 게임을 말한다. 가정용 게임과 다르게 회전율이라는 것을 고려. 그래서 최대한 여러 사람이 많은 동정을 넣고 즐길 수 있도록 ‘내용을 짧고 강렬하며 스피디하게 만드는 것’이 이런 아케이드 게임의 특징이다.
시와 철학의 인문학
이런 분께 추천드려요!
인문학의 진수를 느끼고 싶은 분
사유의 즐거움을 만끽하실 분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저자 : 강신주
출판 : 동녘(2010)
지식/정보 : ★★☆☆☆
감동/의미 : ★★★★☆
재미/흥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