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기와 면적
"이번 미션은 계급장을 떼고, 오직 맛으로만 승부하겠습니다."
2024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넷플릭스 요리 서바이벌 <흑백요리사>의 한 장면이다. 이미 명성을 떨친 스타 셰프 '백수저'와 이름 없는 재야의 고수 '흑수저'가 맞붙는다. 시청자들은 열광했다. SNS는 들끓었고, 출연자들의 식당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우리는 왜 이토록 '계급장 떼는 것'에 열광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부모의 자산이 자녀의 학벌을 결정하고, 그 학벌이 다시 소득을 결정하는 세상. 출발선이 다르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 '다름'이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는 거다.
사람들은 "노력하면 된다"는 말을 혐오한다. 현실 모르는 꼰대 잔소리, 기득권의 사다리 걷어차기처럼 들리니까. (솔직히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들의 분노는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질문 하나. 출발선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출발선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운명론'에 빠지는 것. 이 둘은 같은 걸까. 나는 다르다고 본다.
계급(階級). 계단처럼 층층이 나뉜 등급이란 뜻이다. 서양도 마찬가지다. 'class'의 어원인 라틴어 'classis'는 고대 로마에서 재산에 따라 시민을 나눈 구분이었다. 동서양 막론하고 이 단어에는 '태어날 때 정해진다'는 이미지가 새겨져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이걸 '문화자본'이라 불렀다. 돈은 아닌데 세습되는 것. 부모의 말투, 식탁에서 나누는 대화의 수준, 어릴 때부터 접하는 문화적 경험. 명문대 입학이 단순히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라, 공부를 잘할 수 있는 환경 자체가 대물림된다는 얘기다.
엔지니어링의 언어로 바꾸면 '초기 조건'이다. 미분방정식을 풀 때, t=0일 때의 값에 따라 이후 궤적이 완전히 달라진다. 초기값이 엉망이면 아무리 좋은 알고리즘을 돌려도 시스템이 안정되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 태생적 조건이 중요하다. 냉정하지만 수학적인 사실이다.
13년간 연구개발 현장에서 나는 이 '초기값의 중력'을 똑똑히 봤다. 예산 넉넉한 팀은 속도부터 달랐다. 비싼 부품을 여러 개 사서 이것저것 실험해 볼 수 있었다. 시행착오를 겪어도 금방 회복할 자원이 있었다. 반면 예산이 쪼들리는 팀은? 저항 하나 살 때도 상무님 결재가 필요했다. 그 대기 시간만큼 경쟁에서 뒤처졌다.
나의 초기값도 그리 좋지 않았다. 집안 형편 때문에 휴학을 반복했고, 친구들이 스펙 쌓고 어학연수 다녀올 때 나는 아르바이트 현장을 전전했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겨우 첫 직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입사 후 마주한 현실은 더 냉혹했다. 동기들 중에는 대기업 특채 출신, 해외 명문대 석박사가 즐비했다. 회의 시간에 그들이 유창한 영어와 세련된 프레젠테이션으로 주도권을 잡을 때, 지방대 학사 출신인 나는 구석에서 회로도만 들여다봤다. 그때 느낀 건 단순한 부러움이 아니었다. 하드웨어 자체가 다르다는 깊은 무력감. (애초에 설계가 잘못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공학에는 초기값의 불리함을 뒤집는 개념이 있다. 최적화다. 주어진 제약 안에서 성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과정. 자원이 무한하다면 이런 건 필요 없다. 그냥 물량을 쏟아부으면 된다. 공학의 본질은 '제한된 자원'과 '극한의 효율'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데 있다.
<흑백요리사>의 최종 우승자 '나폴리 맛피아'가 이 지점을 증명했다. 그가 가진 재료가 백수저 셰프들보다 좋았나? 아니다. 심지어 편의점 재료라는 최악의 제약이 주어졌을 때도, 그는 불의 세기, 조리 시간, 재료 배합이라는 변수를 정밀하게 통제했다. 남들이 재료 탓을 할 때, 그는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했다. 엔지니어링이 추구하는 효율의 미학이다.
나는 조직의 중심에서 밀려난 시간을 나만의 기회로 삼았다. 남들이 사내 정치에 에너지를 쏟을 때, 나는 퇴근 후의 시간을 붙잡았다. 도서관으로 달려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었고, 인문학 책을 탐독하며 글을 썼다. (사실 처음엔 도피였다.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한 자존감을 어디서든 보상받고 싶었으니까.) 낮에는 회로를 설계하는 논리적인 뇌를 쓰고, 밤에는 문장을 다듬는 감성적인 뇌를 썼다. 이 둘이 결합되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글쓰기 회로가 완성됐다. 엔지니어의 분석력으로 세상을 해부하고, 작가의 감수성으로 위로를 건네는 글. 대기업 특채 출신도, 명문대 석박사도 갖지 못한 나만의 무기였다.
초기값이 좋은 사람은 분명 유리하다. 부정할 생각 없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초기값만 믿고 변수 통제에 실패할 때, 초기값은 낮아도 치열하게 프로세스를 조율한 시스템은 결국 그들을 따라잡는다. 내가 회사를 나와 전업 작가가 된 건, 내 인생의 초기값을 바꾼 게 아니다. 나의 함수를 재설계한 거다.
기울기가 만드는 면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수학적으로 인생을 표현한다면, 초기값은 t=0일 때 좌표평면에 찍힌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생은 멈춰 있는 점이 아니다. 시간의 축을 따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선'이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등장한다. 고등학교 수학 시간에 배운 '적분'. 함수의 그래프와 시간 축 사이 면적을 구하는 것.
인생에서의 적분이란 뭘까. 매 순간 쏟아붓는 노력과 태도, 즉 삶의 '기울기'를 시간으로 쌓아 올린 총합이다. 초기값이 100이고 기울기가 0인 삶을 상상해 보자. 시간이 지나도 100 언저리에 머문다. 반면, 초기값은 0이지만 매일 기울기가 조금씩 증가하는 삶이 있다. 처음엔 전자가 압도적으로 높아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후자가 만들어내는 면적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대기만성. 그 말의 수학적 증명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13년도 그랬다. 초기값은 형편없었다. 늦은 졸업, 늦은 취업, 늦은 시작. 하지만 퇴근 후 도서관에서 보낸 시간, 새벽까지 문장을 고치던 밤, 퇴짜 맞고도 다시 투고하던 끈기. 그것들이 쌓였다. 한 편, 두 편, 열 편. 브런치에 올린 글이 백 편을 넘어갈 때쯤,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비교리즘』이 세상에 나왔다. 초기값 0에서 시작한 그래프가, 어느새 제법 볼만한 면적을 만들어낸 거다. (물론 아직도 한참 멀었다. 그건 나도 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초기값이 0이라며, 혹은 마이너스라며 출발조차 않고 주저앉는다. 그 마음 안다. 나도 한때 그랬으니까. 하지만 오늘 하루 흘린 땀, 고민한 시간, 치열하게 읽어낸 책 한 줄. 그것들이 그래프에 양의 기울기를 더한다. 그 기울기가 만드는 면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흑백요리사>가 끝나고,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출발선은 다르고, 수저 색깔은 쉽게 안 바뀐다. 나폴리 맛피아도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자기 가게로 돌아갔겠지. 내일도 새벽부터 반죽을 치대고, 손님을 맞고, 설거지를 하겠지. 화려한 무대는 끝났지만, 그의 적분은 계속된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창밖은 어둡고 커피는 식었다. 내일 아침이면 또 원고 마감에 쫓기겠지. (편집자님, 이번엔 진짜 제때 보낼게요.) 거창한 건 없다. 그냥 오늘도 한 문장, 내일도 한 문장. 그게 나의 기울기다. 결국 중요한 건 출발선이 아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나아졌는가. 그 작은 기울기들이 모여 면적이 된다. 초기값은 바꿀 수 없지만, 적분값은 내가 만든다.
적분값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