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과 결과물
얼마 전, 꽤 큰 마음을 먹고 최고 사양의 노트북을 구매했다. 소위 '전문가용'이라 불리는 그 제품은 제조사가 자랑하는 최신 칩셋을 탑재했고, 메모리는 웬만한 서버 컴퓨터에 버금갈 정도로 넉넉했으며, 디스플레이는 인간의 눈으로 구분할 수 없는 영역의 색상까지 표현한다고 했다. 결제 버튼을 누르는 순간 손끝에서 전해지던 짜릿함. 일종의 고양감이었다. 이 정도 장비라면 당장이라도 세상을 놀라게 할 대작을 집필하거나, 우주선의 궤도 계산쯤은 거뜬히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제품이 도착하고 포장을 뜯는 순간의 설렘은 절정이었다. 흠집 하나 없는 매끄러운 알루미늄 바디. 마치 완벽하게 제련된 보석 같았다. 나는 그 완벽한 기계를 책상 정중앙에 모셔두고 경건한 마음으로 전원을 켰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그 슈퍼컴퓨터로 유튜브에서 고양이 동영상을 보며 킬킬거렸다. 인터넷 뉴스 기사에 달린 댓글을 읽으며 시간을 죽였다. (기계는 무죄다. 운전자가 문제였다.) 성능은 슈퍼카급이었으나, 운전자가 동네 마실만 다닌 셈이다.
이 우스꽝스러운 일화는 비단 나만의 경험은 아닐 터. 우리는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앞서 '장비발'을 세우는 데 익숙하다. 그리고 그 습관은 물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을 설명할 때도 기능보다는 제원, 즉 스펙에 집착한다. 입사 지원서나 자기소개서를 쓸 때를 떠올려보자. 토익 점수가 몇 점인지, 학점이 4.5 만점에 얼마나 가까운지, 자격증이 몇 개인지. 우리는 숫자와 등급을 나열하며 내가 얼마나 '고성능'인지 증명하려 애쓴다. 노트북 제조사가 칩셋의 성능 수치를 자랑하듯, 우리도 숫자로 자신을 포장한다.
물론 높은 점수는 성실함의 증거이자 학습 능력의 지표다. 하지만 여기서 불편한 질문을 하나 던져야겠다. 토익 990점 만점을 받은 사람은 영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하며 외국인 바이어를 설득할 수 있는가? 기사 자격증을 세 개나 가진 신입 사원은 현장에서 설비가 멈췄을 때 매뉴얼 없이 원인을 찾아낼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현장에서 내가 목격한 대답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였다. 오히려 화려한 스펙을 가진 이들이 사소한 변수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나는 숱하게 보아왔다.
스펙의 정의를 다시 짚어보자. 스펙은 제조사가 사용자에게 건네는 약속이다. "섭씨 25도, 습도 40퍼센트, 안정적인 전압. 이 조건이 맞으면 이만큼의 성능을 내겠습니다." 핵심은 '가정'이다. 조건이 맞으면. 스펙 시트에 적힌 모든 숫자는 통제된 실험실 환경에서 측정한 최댓값이다. 현실이 아니라 이상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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