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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패치 노트

플레이어와 개발자

by COS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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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퇴근길, 지독하게 막히는 순환도로 한복판에 갇혀 있을 때였다.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해버린 아스팔트 위에서 나는 핸들을 툭툭 치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아, 진짜 망겜이네." 요즘 세대의 비명이다. 내가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상황. 공정하지 못한 보상. 도무지 재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반복적인 일상. 이런 현실을 마주할 때 우리는 우리가 속한 세상을 '망겜'이라 부른다. 화면 속 캐릭터가 벽에 끼어 움직이지 못하는 버그를 만났을 때처럼, 현실의 나 역시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허우적대는 기분. 이때의 우리는 철저히 플레이어다. 주어진 환경이라는 콘텐츠를 일방적으로 제공받는 손님. 그 서비스가 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 실망하고 분노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운영자에게 항의할 게시판이 없다는 게 더 환장한다.)


우리가 인생을 망겜이라 부르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피해를 입은 소비자'의 위치에 놓는다. 게임이 재미없으면 앱을 삭제하고 떠나면 그만이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임은 로그아웃 버튼이 고장 났다. 끝없이 이어진다. 비극의 시작이다. 플레이어로서의 우리는 늘 보상을 기다린다. 퀘스트를 수행했으니 경험치를 달라고, 적절한 아이템을 떨어뜨려 달라고 세상에 요구한다. 하지만 세상은 친절한 운영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공략집을 읽지 않았다고 비웃거나, 패치 노트를 공지도 없이 바꿔버리는 무책임한 시스템에 가깝다. 우리는 이 거대한 오픈 월드에서 길을 잃는다. 누군가 내 캐릭터를 구원해 줄 업데이트만 간절히 기다리는 처량한 플레이어가 되어간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시선을 돌려 모니터 너머의 풍경을 상상해 본다. 플레이어가 "재미없다"고 소리를 지를 때, 그 소음을 뚫고 모니터의 푸른 빛 아래서 묵묵히 숫자를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있다. 개발자다. 그들에게 게임은 즐기는 감각의 대상이 아니다. 의도를 가지고 설계해야 하는 논리의 구조물이다. 플레이어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분노하며 키보드를 내려칠 때, 개발자는 그 현상이 발생한 뿌리를 추적한다. 캐릭터가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운이 없어서가 아니다. 좌표값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플레이어와 개발자는 같은 세계를 본다. 하지만 전혀 다른 층위의 언어를 쓴다. 우리는 왜 이 두 시선의 차이를 이해해야 할까.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삶이라는 시스템. 이건 만드는 사람의 계획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을 직접 굴려보는 사람의 마찰이 있어야 비로소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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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의 세계는 철저히 체감의 영역이다. 가벼운 감각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무늬를 가장 선명하게 느끼는 상태다. 오늘 마신 커피의 씁쓸함. 팀장의 무심한 말 한마디가 일으킨 파동. 지금 이 공기가 나를 얼마나 질식하게 만드는지.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플레이어만이 가진 직관이다. 플레이어는 정직하다. 재미없으면 재미없다고 말하고, 아프면 비명을 지른다. 삶의 비극을 비극으로 인지하고, 기쁨을 환희로 받아들이는 그 날것의 감정.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플레이어는 시스템 안에서 가장 활발하게 에너지를 소모한다. 설계자가 예상하지 못한 경로로 뛰어나가 세상을 확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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