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과 문
"저는 거절을 잘 못해요. 누가 부탁하면 무리해서라도 들어줘야 마음이 편하거든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른바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의 단골 멘트다. 그들은 항상 웃는 얼굴로 타인을 맞이한다. 힘든 일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고, 남의 하소연은 밤을 새워서라도 들어준다. 사람들은 그들을 향해 "마음의 벽이 없는 사람", "소통을 잘하는 사람"이라며 칭송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정작 그렇게 칭송을 듣는 당사자들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상담실을 찾는 사람 중 상당수가 바로 이 '경계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번아웃을 호소한다. 내 시간, 내 감정, 내 통장 잔고까지 남들을 위해 다 퍼주었는데, 돌아오는 건 공허함과 "호의가 계속되니 권리인 줄 아는" 무례한 사람들뿐이라고 토로한다.
우리는 흔히 '벽'을 부정적인 단어로 인식한다. 벽을 친다, 벽이 느껴진다는 말은 소통의 부재나 단절을 의미하는 욕처럼 쓴다. 반대로 '문'은 무조건 긍정적이다. 마음의 문을 연다는 표현은 관용과 사랑의 상징이다. 그래서 우리는 강박적으로 벽을 허물고 문을 활짝 열어두려 애쓴다. 그래야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으니까.
하지만 엔지니어의 관점에서 볼 때, '벽이 없는 상태'는 소통이 아니라 '보안 실패'다. 모든 포트(Port)가 열려 있는 서버는 해커들의 맛집이다. (나도 한때 그런 서버였다. 누구나 접속 가능, 24시간 무료 상담. 결과는 시스템 다운이었다.) 아무나 들어와서 데이터를 휘젓고, 악성 코드를 심고, 쓰레기 파일을 던져두고 간다. 결국 트래픽 과부하로 서버는 다운된다. 사람도 똑같다. 벽 없이 모든 것을 받아주는 사람은 착한 게 아니라, 나를 지키는 방화벽이 붕괴된 상태다. 누구도 막지 못하는 상태는 '소통'이 아니라 '무방비'다. 관계에 지쳐 쓰러진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더 넓은 문이 아니라 더 단단한 벽이다.
건축학적으로 벽의 본질은 '단절'이 아니라 '구획'이다. 벽이 있어야 '여기까지는 외부', '여기부터는 내부'라는 공간의 정의가 생긴다. 벽이 없는 집을 상상해 보자. 그건 집이 아니라 광장이다. 광장에서는 누구나 지나갈 수 있지만, 누구도 편히 쉴 수는 없다. 비바람을 막을 수도 없고, 잠을 잘 수도 없다.
인간관계에서 벽을 세운다는 건 "너를 싫어해"라는 거절의 메시지가 아니다. "여기까지는 내가 통제해야 하는 나의 고유 영토야"라는 선언이다. 심리학에서는 이걸 '바운더리(Boundary)'라고 부른다. 나의 감정, 나의 시간, 나의 에너지는 무한하지 않다. 이 한정된 자원을 지키기 위해서는 외부의 침입을 막아낼 물리적인 경계선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