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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송목 Jan 01. 2024

돈으로부터 자유는 가능한 것인가?

칼럼

사람은 누구나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다. 특히 돈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한다.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불행은 가난으로부터 오며, 가난은 고통이자 우리의 삶을 옥죄는 구속이기 때문이다. 우리 생활의 대부분의 풍요는 돈에서 나오고 그래서 우리는 항상 돈이 필요하다. 돈은 현실에서 대부분의 욕망을 실현시켜 주는 마법의 지팡이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눈만 뜨면 돈, 돈 하면서 돈을 추구하는 현실적 이유다. 


나는 한 때 파산 후 바닥까지 떨어져 생활고를 겪은 경험이 있다. 교통비가 없어 절친한 친구 부친상에 가지도 못하고 부조금조차도 전달하지 못했다. 친구에게 전화로 솔직하게 사정을 털어놓긴 했지만, 수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이 불편하다. 경조사 불참을 일일이 변명하는 것은 우습고 구차한 일이다. 상대방은 대개 오해한다. ‘그렇게 잘 나가던 사람이 설마 그 정도도 돈이 없어서 나한테 이렇게 섭섭하게 대하나?’ 하며, 필시 자기를 홀대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경조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네 문화에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셈이다.


이 경우 돈은 곧 인격이다. 특히 사업하는 사람에게 돈은 곧 관계의 척도다. 사업의 크기와 내가 지불하는 돈은 우정을 가늠하는 바로메트다. 즉, 자주 연락하는 사이가 이니라도 좀 많은 액수의 부조금을 내면 금방 절친 대접받고, 반대로 아무리 절친이라도 거르게 되면 소원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업하는 사람들은 상황이 어려워도 경조사에 화환 보내고 부조금도 내면서 인격 활동을 유지하는 것이다. ‘너와 나’의 관계가 건재하다는 것을 알리는 일종의 비즈니스 시그널 같은 것이다. 


특히 사업하는 사장에게 돈은 현실에서 사업을 구현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다. 돈은 곧 생명이고 무기이며 그 의미와 쓰임새는 실로 다양하다. 돈이 있어야 세금을 내고, 월급을 주고, 거래처에 대금을 지급한다. 만약 돈이 없어 세금을 체납하면 순식간에 범죄자가 되고, 월급을 제때 못 주면 악덕 사장이 되고, 거래처에 대금을 지급하지 못하면 부도가 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돈으로부터 자유는 물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경제적인 자유가 모든 자유의 원천 ‘전가의 보도’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 졸업 후부터 바로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고 생활의 대부분을 돈벌이에 쏟아붓는다. 돈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다른 많은 걸 희생하면서까지 전력투구하는 것이다. 예컨대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기 위해 젊음을 통째로 바치는 경우나 그것도 모자라 평생을 그러고 사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얻은 돈이 과연 어느 정도의 자유를 주었던가? 충분한 돈이 기대만큼 자유를 주었을까? 


지금까지 살다 간 많은 사람들의 결론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한평생 애써 벌어도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이가 대부분이고 설령 벌만큼 벌어도 그가 당초 기대한 ‘돈으로부터 자유’는 얻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많은 상처와 희생만 치렀던 경우도 허다했다.


돈을 많이 벌어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진정한 돈으로부터 자유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돈으로부터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까? 상황과 성향 가치관에 따라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결론은 있다. 예컨대, 돈이 많던 적던, 돈의 절대적 크기와는 상관없이 현재 내가 가진 돈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돈으로부터 자유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돈벌이는 하되 돈에 집착하지 않고 설령 돈벌이가 신통치 않더라도 돈에 비굴하지 않는 태도다. 돈이 다소 부족해도 돈에 대한 구차함이나 눌림 현상이 없고, 돈이 많이 있어도 우쭐하여 교만하거나 더 이상 돈의 욕망과 남들과의 비교 경쟁에 불안해하지 않는 마음이다. 


돈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방법 중 돈을 많이 가졌다거나 부유한 입장은 비교적 이해하기 쉽지만, 그 반대로 빈궁함에도 불구하고 당당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상당히 힘든 태도인 것 같다. 생활의 거의 대부분이 돈이고 돈이 절대적인 기반인 우리더러 돈이 없음에도 당당해지라는 것은 실생활과 다소 거리감이 있고 객관성이 떨어지는 논리 전개가 아닐까? 돈을 포기하고 아예 ‘수도자가도 되라는 건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6.25 이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난이라는 말은 ‘굶어 죽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통했지만, 지금의 가난은 ‘생활의 불편’을 의미하는 정도로 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파트 평수, 좋은 자동차, 명품을 사고 못사고의 차이정도다. 그런 점에서 요즈음 가난은 옛 그것에 비해 다소 여유로운 가난이 되었다. 아무리 가난하다 한들 최빈국 가난처럼 아사나 죽음에까지 이르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적어도 선진국 반열의 한국에서는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우리는 돈을 많이 벌고, 돈이 풍족하면 행복할 거라는 등식을 진리처럼 알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 인간 대부분은 태생적으로 가난이 주어졌다고 본인 스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부를 상속받지 못하고 태어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를 벗어나려는 욕망 즉, 돈을 많이 벌려는 욕망을 가지는 것이다. 여기서 상대적인 부의 비교하는 마음까지 가세하면 생활의 과시 욕망을 자극하게 되어 돈벌이가 모든 가치의 중심이 되고 마침내 돈의 굴레를 뒤집어쓰고 매몰되는 것이다. 


현대의 많은 이들이 이런 금권 만능주의를 신봉하거나 풍조에 젖어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앞서 언급한 돈벌이에 대한 태생적이고 본능적 욕망에 더하여 주변 부자들의 화려한 외형과 풍요로움이 다른 주변 걱정거리도 동시에 해소해 줄 거라는 후광효과(Halo Effect)도 한몫한다. 한 껏 고조된 돈벌이 과정과 돈의 풍요 속에 파묻혀 살다 보면 돈이 모든 자유를 줄 것 같은 착시에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돈의 본질은 양날의 검이다. 돈은 현실에서 중요한 필수품이고 동시에 위험한 물건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돈의 부족, 빈곤은 우리 삶을 고달프게 하고 재앙도 되지만, 반면에 갑작스러운 부, 감당하기 어려운 큰돈도 파멸의 단초가 되고 재앙이 된다. 또 돈은 실생활에서 편의성과 많은 자유를 누리게 해 주지만, 돈이 많을수록 풍요와 자유가 비례적으로 커지는 것은 아니다. 나침반 바늘이 360도를 지나치면 다시 0부터 시작되듯이 돈의 욕망 또한 도달 즉시 ‘리셋’되어 다른 욕망으로 대체된다. 이때 기껏 확보한 자유도 같이 리셋되어 다른 틀에 갇히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또 돈이라는 욕망의 충족은 그 완성 즉시 다른 하나를 잃는 등가의 법칙이 적용된다. 돈을 얻음으로 인해 그동안 다른 욕망으로 채워져 있던 공간에 돈이 메워졌을 뿐, 전체 욕망에서 행복의 구도와 면적에는 변화가 없는 것이다. 즉, 돈 결핍으로 고민하면서 살다가 돈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다른 문제로 옮겨가는 것이다. 


찬찬히 생각해 보면, 태어나 살면서 우리는 한순간도 문제가 없는 때는 없었다. 그때그때 문제의 주제만 달라졌을 뿐이다.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또 다른 문제가 주어지는 문제풀이의 연속이었다. 거의 모두가 돈과 관계된 끝없이 계속되는 허들경기 같은 것이다. 돈이 없거나 부족해서 걱정, 너무 많아서 줄어들까 사라질까 또는 뺏기지 않을까 걱정이다. 


한편 흔히 가난이라고 하면 주어진 태생적 가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선택된 가난도 있다. 선택된 가난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성직자, 수도자다. 주어진 가난 즉 어쩔 수 없는 가난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선택된 가난은 당당하고 즐거운 일이다. 본인의 '자유의지'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어진 가난은 강제된 것이지만, 선택된 가난은 스스로의 자율적인 선택이다. 종교 수도자는 당연하다치고 그 외 일반인이 의도적으로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의도적으로 가난을 선택한 공식적인 사례를 하나 소개한다. 2002년 수학계의 중요한 난제들 중 하나인 푸앵카레 추측을 증명한 러시아 천재 수학자 그리고리 페렐만(1966∼ )이다. 16살이던 1982년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만점으로 금메달을 수상한 바 있는 그는 상금 100만 달러를 거부하고 허드렛일을 하는 어머니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좁은 아파트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스탠퍼드대학교, 프린스턴대학교 등 교수직도 거절했고, 필즈상, 밀레니엄 상 등 수학계의 여러 상도 거부했다.


다른 한편, 과도한 풍요도 자유를 옥죌 수 있다. 돈에 대한 욕망의 크기는 먹고사는 최소한의 기준점을 지나게 되면, 절대적, 객관적 상한. 하한 기준점이 사라진다. 즉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의적으로 기준점을 에스커레이트처럼 상향 조정하기 때문에, 스스로 멈추지 않으면 영원히 계속되는 욕망의 쳇바퀴 굴레에 갇히게 된다. 어떤 이는 돈을 좇다가 돈을 사랑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돈에 취하여 돈다발에 얼굴을 파묻고 존경을 표하고, 어떤 이는 돈 많은 부자에 휘둘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빚진 돈 때문에 평생 노예로 살아가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 굴레를 벗어나려 발버둥 치지만 쉽지 않은 난제다. 그래서 부자 솔로몬 왕이 “나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십시오.”라고 기도했는지도 모른다.  


성경에서 말하는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의 과시’는 우리 인간에게는 태생적인 욕망이고 유전적 욕망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브레이크가 존재하지 않는다. 상당한 이성의 결단을 발휘해야만 비로소 그 굴레가 풀어진다. 마치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나방으로 변신하는 것과 같은 전혀 다른 철학적 사고와 태도의 전환이 요구된다. 그래야 돈으로부터 자유가 가능하다. 


사업에서는 어떨까? 사업하는 사람들은 일반인들보다 좀 더 큰 욕망을 품은 사람들이다. 돈에 대한 욕망의 브레이크 밟기가 더 어렵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 사업은 자전거 페달 밟는 것과 같아서 한 번 사업이라는 안장 위에 앉으면 어떻게든 페달을 계속 밟아야만 하는 성장. 가속의 속성이 있다. 멈추면 넘어지기 때문에 페달 밟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욕망의 성취가 반복되다 보면 욕망은 관성화 되고 결국은 ‘지속 성장’이라는 치유 불가능의 병(病)에 걸리게 된다. 요즈음 각종 광고에 유행어처럼 나오는 ‘지속성장’, ‘지속발전’ 등이 그것이다. 좋은 의미의 단어로 쓰이고 있지만, 한편으로 ‘무한 욕망’이 내재된 단어다. 


이때 성장의 멈춤은 사실상 사업 중단이나 실패로 인식하게 되어 제어가 불가능하다. 스타트업 초기에는 주로 돈벌이 수단으로 사업이 출발하지만, 어느 정도 성장 궤도에 진입하면 사업은 성장 본능에 충실하게 됨으로써 달리는 경주마 같은 광기를 발휘한다. 인간 질병 중 성장이 지나쳐 생기는 대표적 질병이 ‘암’이다. 암세포는 다른 세포대비 너무 빨리 성장하는 바람에 생기는 것이다. ‘지속 성장’도 암과 유사한 속성을 내재하고 있다.  


해결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론적으로는 명쾌하고 간단하다. “이 정도면 됐어! 스톱! “하고 그냥 멈추면 된다. 그러나 달리는 열차에서 중간에 뛰어내리기가 쉽지 않다. 실제 현실에서 행동으로 옮기기가 어려운 것이다. 생각보다 현실은 달콤하고 실타래처럼 엉킨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항아리 속의 바나나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잡히는 원숭이와 같은 형국이다. 움켜쥔 바나나만 놓으면 쉽사리 도망갈 수 있는데도 욕심 때문에 손을 놓지 못하고 사냥꾼의 의도대로 결국 포획되고 만다. 


우리는 각종 학습이나 역사공부, 경험담의 교훈들도 이런 해결에 크게 실천적 기여는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다들 역사를 통해 배우고는 있지만, 욕망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역사적 교훈이나 주변의 뼈아픈 경험담마저도 영화의 한 장면정도로 그때만 고개를 끄덕이는 일시적 수긍일 뿐 돌아서면, 바로 눈앞의 감정과 성장 본능에 충실하곤 한다. 열심히 사는 것이다. 돈벌이를 위하여.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돈으로부터 자유는 가능한 것인가? 이상에 불과한 것인가?

현실에서는 다들 ‘조금만 더... 더’하다가 매번 360도를 넘기고 리셋되는 바람에 정점을 놓친다. ‘적당한’ 돈에서 멈추고 ‘적당한’ 자유에 만족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적당한’이라는 말을 너무 자의적으로, 지나치게 상대적으로 비교하기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 자유를 누리는 유일한 방법은 ‘미완의 자유’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실에서 완벽한 자유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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