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 때인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설국(雪国》을 꾸역꾸역 읽다가 지겨워 그만뒀고,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단편소설《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의미도 모른 채 문자만 우격다짐으로 밀어 넣었던 기억이 납니다. 주변에 자랑하기 위해, 나도 노벨문학상 책을 읽어봤다는 일종의 숙제로 말이죠. 지금 돌이켜 보니 어린 나이에 부족한 지식, 짧은 경험이 대작가를 수용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더구나 단순 번역물이 대세이던 시절이라 작가의 원뜻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노벨문학상 받은 책을 번역 없이 원서로 바로 보게 되다니감격스럽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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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2014년 <소년이 온다> 출간 당시 소설을 집필하는 내내 '압도적인 고통'을 느꼈다고 고백했습니다. 열두세 살 무렵 아버지가 건넨 사진첩을 보고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간접적으로 목격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참혹하게 변한 시신, 그리고 그들을 위해 헌혈을 하려 병원 앞에 모인 시민들. 한강은 그 모습을 양립할 수 없는 숙제처럼 느꼈다고 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의미를 찾고, 때로는 길을 잃기도 하고, 때로는 단호하기도 했으며, 그들의 모든 노력과 모든 강점이 저의 영감이 되었습니다.”겸손하면서 정갈한 그의 인터뷰도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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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서는 한강을 역사의 외눈박이라 비난합니다. 5·18은 1970년생 광주출신 한강이 10살이었을 때 일어난 일이라는 거지요. 역사의 왜곡, 확대 심지어 포르노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소설이니까 허구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겠습니다. 한편으로 소설이니까 당연하고 다른 한편으로, 가공된 역사를 그대로 역사라고 후손들이 받아들이는 걸 우려하는 이들의 걱정도 이해는 갑니다. (이런 논란에 대해서는 '한강 노벨상, 찬사와 데모의 중심에서' 별도로 다뤘으니 관심 있으시면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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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떤 책이길래, 어떤 내용이길래? 노벨위원회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 표현했습니다. 소설이라 하지 않고, 시적 산문이라고? 왜 '시적'에 방점을 뒀을까?
제가 어린 학생 때 의무감처럼 읽었던 노벨상 작품이 머리 희끗한 지금은 어떤 마음으로 읽힐까?
대구태생인 제가 한민족이라는 테두리 속의 또 다른 경계 전라. 경상도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까? 동쪽에서 난무하던 소문이 서쪽에서는 과연 어떻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을까? 이 작품이 과연 시대정신을 대표할 수 있을까? 아니면 지역정신에 불과할까? 단순 피해자 트라우마 편향일까 아니면 진실의 정시(正視)일까?
이 독후감을 쓰기 위해 작가의 뉴스와 글, 인터뷰, 동영상을 몇 봤습니다. 나름 그와 동화되기 위해서, 시선을 같이 하기 위해서. 일종의 호흡 맞추기랄까요. 그게 대작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이 들어서. 결코 편치 않은 마음으로 책을 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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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는 6장과 에필로그까지 총 7단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 어린 새
2장 검은 숨
3장 일곱 개의 빰
4장 쇠와 피
5장 밤의 눈동자
6장 꽃 핀 쪽으로
이야기 속에는 온통 시체와 죽음이 널브러져 있고 고통과 트라우마가 깔려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왠지 하늘의 천사가 지구를 취재하러 온 듯 잔잔합니다. 기자의 감정 없는 보도처럼. 그렇게나 많이 ‘너’, ‘나’, ‘당신’이라는 직접 화법으로 당사자 이야기하는 것처럼 썼지만, 제삼자,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은 아마도 작가 한강의 멀찍한 타자 필법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 같은 따옴표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누구의 말이고 누구의 독백인지를 알아보게 했습니다. 가끔 누가 말한 건지 한참을 앞뒤 살펴봐야 하기도 했지만요. 다소 불편하면서도 왠지 행간에서 서성이는 시간을 주려는 듯한 그런 전개였습니다. 아! 그래서 ‘시적 산문’이라 했구나. 퍼뜩 생각이 닿았습니다.
나오는 인물들은,총맞거나 칼에 찔려 죽은 시민들의 시체를 지켰던 중3 동호, 대학 1학년 진수, 수피아 여고 3학년 은숙, 양장점 미싱사 선주, 그리고 동호의 집에 세 들어 살던 정대와 정미 남매 등입니다.
그들의 시선은 오직 하나의 사건에 골몰하고 집중합니다. 열흘간의 항쟁과 죽음, 그리고 세월이 지난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입니다. 죽음과 시체 묘사가 한 페이지를 넘기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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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강은 이 글을 쓰면서 '압도적인 고통'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이 문장이 그 말 아닐까 싶네요.
저는 그 폭력의 경험을, 열흘이란 짧은 항쟁 기간으로 국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체르노빌의 피폭이 지나간 것이 아니라 몇십 년에 걸쳐 계속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5장 밤의 눈동자 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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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소설은 설렁설렁 넘기지만, 이 책의 글들은 그렇게 넘기기에는 너무 무겁고 조용하고 차갑고 서늘했습니다. 책장을 넘길라치면 왠지 너무 서두르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생각이 많아지기도 해서 그래서 절로 속도가 떨어졌습니다.
한강은 독자들에게 유독 ‘질문’을 많이 했습니다.
딱히 답도 없고 답하기 어려운 그런 질문들. 대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몰라서 묻는 것도 아닌 듯합니다. 그냥 말을 걸어보려고. 외로워서 두려워서 그래서 읽는 속도가 더뎌졌습니다. 생각하느라 답도 없는 답 찾기 위해 허둥대느라 그리고 그의 친구가 되어 주느라.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당신을 보았던 내 눈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내 귀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숨을 들이마신 허파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봄에 피는 꽃들, 버드나무들, 빗방울과 눈송이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찾아오는 아침,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3장)
이 대목에서 저는 눈에서 배어 나오는 이슬의 무게를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여러분도 해설 없이 원문을 그대로 한 번 느껴보시지요.
……동호야.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_3장
망설임
* 그 뒤로 어떤 말들이 더 오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표정, 가장 끔찍한 이야기를 덮어두고 말을 이어가는 일의 어려움, 어색하게 이어지던 침묵을 기억한다. 아무리 말을 돌려도 어느새 처음의 오싹한 빈자리로 되돌아오는 대화에 나는 이상한 긴장을 느끼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버지가 가르치던 학생 네가 중흥동 그 집을 샀다는 건 나도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지는가? 왜 그 학생의 이름을 말하기 직전에는 알 수 없는 망설임이 끼어드는가?_에필로그
그 책
*아버지는 그 책을 아이들이 보지 못하도록 안방의 책장 안쪽에, 책등이 안 보이게 뒤집어 꽂아놓았다.
내가 몰래 그 책을 펼친 것은, 어른들이 언제나처럼 부엌에 모여 앉아 아홉 시 뉴스를 보고 있던 밤이었다. 마지막 장까지 책장을 넘겨, 총검으로 깊게 내리그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을 기억한다.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_에필로그
그 소년, 이 책의 주인공
*소년은 졸업을 못했으니 졸업 앨범에 사진이 실렸을 리 없었다. 그 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한,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미술 선생님이 전화를 넣어주어 학적부를 열람할 수 있었다. 학생기록부용으로 찍은 그의 사진을 거기서 처음 보았다. 쌍꺼풀 없는 반달 모양의 눈이 유순했다. 턱과 뺨의 선에는 아직 유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너무 평범해 누구와도 혼동될 듯한 얼굴, 눈을 떼는 순간 특징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작가의 질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독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혼한테는 없는데, 어떻게 눈을 뜨고 우릴 지켜볼까.
*산소마스크를 쓴 채 눈을 감고 있던 외할머니의 얼굴에서 새 같은 무언가가 문득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주검이 된 주름진 얼굴을 보며, 그 어린 새 같은 것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몰라 너는 멍하게 서 있었다. 지금 상무관에 있는 사람들의 혼도 갑자기 새처럼 몸을 빠져나갔을까. 놀란 그 새들은 어디 있을까.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 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5장)
죽음의 기억
*내가 밤낮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립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나는 모릅니다.
왜 김진수는 죽었고, 그와 한조가 되어 함께 밥을 먹었던 나는 아직 살아 있는지.
김진수가 더 많은 고통을 받았을까요.
아니요, 나도 충분히 고통받았습니다.
김진수가 더 잠을 못 잤을까요.
아니요, 나도 잠을 못 잡니다. 하루도 깊이 못 잡니다. 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 그럴 겁니다.(4장 쇠와 파이프)
어떻게 벌써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그 순간 왜 분수대가 떠올랐는지 모른다. 짧게 감은 눈꺼풀 속에서 유월의 분수대가 눈부신 물줄기를 뿜었다. 버스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가던 열아홉 살의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었다. 하나하나의 물방울들이 내쏘는 햇빛의 예리한 파편들이, 달궈진 눈꺼풀 안쪽까지 파고들어 눈동자를 찔렀다. 집 앞 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그녀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책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주먹으로 훔치며 전화기에 동전을 넣었다. 114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도청 민원실 부탁합니다. 안내받은 전화번호를 누르고 다시 기다렸다. 분수대에서 물이 나오고 있는 걸 봤는데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떨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어떻게 벌써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벌써 그럴 수 있습니까.
죽고 싶지 않았다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에 둔감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래서 더 두려웠다. 입을 벌리고 몸에 구멍이 뚫린 채, 반투명한 창자를 쏟아내며 숨이 끊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유려한 문장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트라우마
*그녀는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 불판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는 순간을 견디지 못했다. 살점 위에 피와 육즙이 고이면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있는 생선을 구울 때는 눈을 감았다. 프라이팬이 달궈지며 얼었던 눈동자에 물기가 맺히고, 벌어진 입에서 희끗한 진물이 흘러나오는 순간, 그 죽은 물고기가 뭔가를 말하려 하는 것 같은 순간을 외면했다. 묵묵히 쌀알을 씹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양심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인간의 본성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 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 주겠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내가 겪은 일들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묽은 진물과 진득한 고름, 냄새나는 침, 피, 눈물과 콧물, 속옷에 지린 오줌과 똥. 그것들이 내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아니, 그것들 자체가 바로 나였습니다. 그것들 속에서 썩어가는 살덩어리가 나였습니다.
나약함
* 우리는 총을 들었지,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그에게 대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게 우릴 지켜줄 줄 알았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일에 익숙한 듯, 그는 술잔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하지만 우린 그걸 쏘지도 못했어.
달
* 달은 밤의 눈동자라고 했다. 성희언니가 보름달을 보고 말했다. 그럴듯하지 않니. 달은 밤의 눈동자래. 모임의 막내였던 당신은 어쩐지 그 말이 무서웠다. 저 검은 하늘 가운데, 얼음같이 하얗고 차가운 눈동자 하나가 침묵하며 그녀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말 들으니까 달이 무섭잖아요 언니.
나는 달을 무서워해 본 적이 없다. 밤늦은 시골길을 걸어갈 때 불 밝혀주던 좋은 기억 때문이다. 이글에서 ‘밤의 눈동자’라 하니 갑자기 무서워진다. 우리를 보고 있는 눈, 그럴 수도 있겠다.
원망
* 22:30 성희 언니는 나와 달라. 언니는 신도 믿고 인간도 믿으니까. 난 한 번도 언니에게 설득되지 않았어.
오직 사랑으로 우릴 지켜본다는 존재를 믿을 수 없었어. 주기도문조차 끝까지 소리 내 읽을 수 없었어.
내가 그들의 죄를 사한 것같이 아버지가 내 죄를 사할 거라니. 난 아무것도 사하지 않고 사함 받지 않아.
무엇이 문제인가
* 0:20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당신은 자신에게 물은 적 있다. 모든 게 지나갔지 않은가. 당신에게 고통을 줄 가능성이 백분의 일, 천분의 일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당신 스스로 깨끗이 밀어냈지 않나. 그녀는 또박또박 말했다. 나 자신을 지키는 일로 남은 인생을 흘려보내진 않았을 거란 말이야. 팔 개월 동안 남편이었던 남자의 유순한 목소리를 당신은 기억한다. 눈이 작은데 예뻐요,라고 그는 처음에 말했다. 그쪽 얼굴을 그리려면 단순한 선 몇 개만 그으면 되겠네요. 긴 눈하고 코하고 입하고, 흰 종이에 쓱쓱 정갈하게. 송아지처럼 크고 물기가 많던 그의 눈을 당신은 기억한다. 입술이 일그러지던 모습을, 흰자위가 충혈된 채 물끄러미 당신을 마주 보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러지 마,라고 그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다.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날 보지 마.
증언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 번 후벼 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짧은 입맞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여름에 팔과 종아리를 내놓아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서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절망
*4:20 오래전 동호와 은숙이 조그만 소리로 나누던 대화를 당신은 기억한다. 왜 태극기로 시신을 감싸느냐고, 애국가는 왜 부르는 거냐고 동호는 물었다. 은숙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까.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 그 여름으로부터 이십여 년이 흘렀다. 씨를 말려야 할 빨갱이 연놈들. 그들이 욕설을 뱉으며 당신의 몸에 물을 끼얹던 순간을 등지고 여기까지 왔다.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끊어졌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운명
* 하지만 동시에 당신은 안다. 그해 봄과 같은 순간이 다시 닥쳐온다면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초등학교 때 피구 시합에서, 날쌔게 피하기만 하다 결국 혼자 남으면 맞서서 공을 받아 안아야 하는 순간이 왔던 것처럼
국가
* 나라에서 죽인 동생 원수를 무슨 수로 갚는다냐.(6장)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 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 오래전 동호와 은숙이 조그만 소리로 나누던 대화를 당신은 기억한다. 왜 태극기로 시신을 감싸느냐고, 애국가는 왜 부르는 거냐고 동호는 물었다. 은숙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까.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
*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 복도 여기저기서 동시에 입관이 치러졌다. 흐느낌 사이로 돌림노래처럼 애국가가 불려지는 동안, 악절과 악절들이 부딪치며 생기는 미묘한 불협화음에 너는 숨죽여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하면 나라란 게 무엇인지 이해해 낼 수 있을 것처럼.
죽음
* 허지만 죽은 다음의 세상을 나는 모른 게. 거그서도 만나고 헤어지는지, 얼굴이 있고 목소리가 있는지, 반갑고 서러운 마음이 있는지 모른게. 느이 아부지 잃은 것을 가엾어해야 하는지, 부러워해야 하는지 어떻게 내가 알었겄냐. (6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집단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람을 맞히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도청 앞의 시신들 앞에서 대열을 정비해 군가를 합창할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외신 카메라에 포착된 병사가 있었다. 어딘가 흡사한 태도가 도청에 남은 시민군들에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받기만 했을 뿐 쏘지 못했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빛이 비치는 쪽으로
*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목이 길고 옷이 얇은 소년이 무덤 사이 눈 덮인 길을 걷고 있다. 소년이 앞서 나아가는 대로 나는 따라 걷는다.
맺음말
읽는 도중에는 많은 감정, 이야기를 쏟아내려 했는데, 막상 읽고 나니 제 독후감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라는 회의가, 또 아직 감정 쿠션이 준비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다소 불편한 책이 될 수도 있겠다는 걱정, 그래서 그냥 가슴 저미었던 몇 구절을 그대로 옮기는 것으로 했습니다. 아무리 잘 표현해도 노벨위원회가 글을 선정하면서 한 말들을 뛰어넘을 자신이 없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