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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에도 손자병법이 필요하다

손자병법

by 최송목

https://m.skyedaily.com/news_view.html?ID=290517

위 칼럼은 축약 글이라 좀 짧고(1602자) 아래 글은 원문으로 설명이 있어 좀 깁니다(4189자). 선택적으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의 전장은 칼과 창이 아니라 손바닥 위의 작은 화면일지도 모릅니다. 손자병법이 옛날 전장의 지략을 다뤘다면, 지금 우리의 전장은 ‘카톡창’ 속에서 펼쳐집니다. 손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적의 말과 행동, 병사와 전차의 움직임만으로도 그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 말은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합니다. 이제 우리는 ‘말 대신 문자로’, ‘전차 대신 이모티콘으로’ 마음을 주고받습니다. 상대의 말 한 줄, 답장의 속도, 이모티콘 하나에도 복잡한 감정과 계산이 숨어 있지요. 카톡은 단순한 메신저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관계의 온도, 감정의 미세한 파장, 그리고 사람 사이의 거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문득 생각했습니다. 손자병법의 지혜로, 이 복잡한 카톡의 세계를 읽어보면 어떨까.


손자병법 ‘행군편’에는 적의 말과 행동, 병사와 전차의 움직임으로 전투 의도를 판단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적의 사신이 겸손하게 말하면서도 전투태세를 굳히는 것은 공격하려는 것이다.

사신이 강경하게 말하면서 공격할 태세를 보이면 곧 퇴각하려는 것이다.

경전차가 먼저 도착해 그 측면에 서 있는 것은 진을 치려는 신호다.

갑자기 강화를 요청하는 것은 다른 모략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병사들이 바쁘게 달리면서 전차를 정렬하는 것은 공격 시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절반쯤 진출했다가 절반쯤 퇴각하는 것은 아군을 유인하려는 것이다.”


辭卑而益備者(사비이익비자) 進也(진야)

辭强而進驅者(사강이진구자) 退也(퇴야)

輕車先出居其側者(경거선출거기측자) 陳也(진야)

無約而請和者(무약이청화자) 謀也(모야)

奔走而陳兵車者(분주이진병거자) 期也(기야)

半進半退者(반진반퇴자) 誘也(유야)


상대의 표면적인 행동과 말에서 속마음을 읽어내는 ‘지피지기(知彼知己)’의 통찰입니다. 현대의 카톡에서도 이 원리는 그대로 통합니다. 메시지의 길이, 답장 속도, 이모티콘 사용, 그리고 무응답 자체에도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카톡은 저에게 계륵 같은 존재입니다. 없애자니 불편하고, 두자니 성가십니다. 기분 좋게도 하지만, 괜한 고민에 빠지게도 하고, 때로는 우울하게도 만듭니다. 특히 제가 보낸 글에 답장이 없을 때면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바빠서 바로 답을 못하겠지’ 하면서도 자꾸 기다리게 되고, 며칠이 지나도 아무 반응이 없으면 서운함이 야속함으로 바뀝니다.


더구나 절친이라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라면 그 감정은 더 깊어집니다. 나름 기대하며, 자랑삼아 보냈던 메시지에 아무 반응이 없을 때면 ‘이 정도도 못 받아주나?’, ‘나는 절친이라 생각했는데 그는 아닌가 보네.’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스스로 묻고 답하며 괜히 마음이 복잡해지지요. 어쩌면 저만의 소심한 감정 놀이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카톡을 받았을 때의 감정을 생각해 봅니다. 지인들이 출처도 모를 글이나 영상을 보내올 때가 많습니다. 처음엔 성의껏 답했지만, 이제는 읽지도 않고 ‘좋아요’ 이모티콘으로 대신합니다. 그냥 두면 보낸 사람이 서운해할까 봐, 의무감에 답을 보내는 거지요. 무심코 영상을 열었다가 불쾌한 소리나 장면 때문에 곤란했던 경험 이후로는 여는 것이 조심스러워졌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카톡이 오면 ‘이걸 열어도 될까?’ 잠시 망설이게 됩니다.


퍼 나르기에 열심인 사람들도 가끔은 진짜 자기 이야기를 전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랑 섞인 메시지를 보내기도 합니다. 사실 자랑할 게 없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괜히 폐 끼칠까 봐 참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복잡한 속내가 어쩌면 카톡의 본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끊자니 허전하고, 두자니 성가십니다. 메시지가 몰리는 날엔 짜증이 나고 집중력도 떨어집니다. 오면 귀찮고, 안 오면 기다려지는, 묘한 소통의 계륵이지요

오늘도 휴대폰은 ‘카톡, 카톡…’ 소리를 내며 쓸모 있는 듯 쓸모없는 사진과 영상, 넘쳐나는 이야기들을 쌓아갑니다. 그동안 눈치 보느라 단톡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는데, 다행히 ‘조용히 나가기’ 기능이 생겨 몇몇 방은 무사히 탈출했습니다. 여러분의 카톡방 사정은 어떤가요?


카톡은 두 얼굴의 동반자입니다. 생활의 필수 도구이자, ‘좋아요’를 탐닉하는 욕망의 출구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제발, 카톡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라고 말합니다. 알림음이 울리지 않으면 불안하고, 배터리가 잠깐이라도 떨어질까 봐 안절부절못합니다. 버스 안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카페 한편에서도 충전기를 꽂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스마트폰과 한 몸이 되어버렸습니다. 편리함이라는 이름의 족쇄를 찬 채, 카톡에 중독된 삶을 살고 있는 셈이지요.


그래서 문득, 손자병법의 ‘지피지기’로 카톡 속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어 졌습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추론이니, 여러분들과 생각이 다소 다르더라도 너른 마음으로 봐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제가 보낸 카톡에 ‘답장’이 온 경우입니다. 제법 긴 문장이나 특별한 소식 (본인 글, 신문기사, 칼럼 등)에 ‘좋아요’ 이모티콘 하나만 달랑 왔다면, 필시 내가 상대를 귀찮게 하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긴 문장을 보냈는데도 금세 짧은 답이 왔다면,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 경우입니다. ① 바빠서 대충 답했거나, ② 너무 자주 보내 귀찮거나, ③ ‘또 잘난 척이군’ 하며 마지못해 반응한 경우입니다.


그래도 단문이지만, 그나마 답이 온 건 다행입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의 서운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가까운 사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역지사지로 생각해 봅니다. ‘만약 내가 그런 긴 문장의 카톡을 받았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이런 자문으로 나를 되돌아봅니다.


이번에는 ‘무응답’의 경우입니다. 상대가 분명 내 글을 읽었는데도 답이 없다면, ① 내용이 지루하거나, ② 자랑처럼 들리거나, ③ 굳이 반응하기 싫은 경우겠지요. 한마디로 관계는 유지되지만, 이미 감정의 공백지대가 생겼다고 봐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글을 올린 직후 상대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으면서 슬쩍 자기 글을 올려 내 글을 밀어버리는 경우입니다. 무응답보다 더 기분 나쁜 케이스지요. 마치 ‘흥, 나도 이런 글 있어’라는 식의 은근한 경쟁심이 느껴집니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그 속엔 미묘한 감정의 줄다리기가 숨어 있습니다.


이렇게 카톡 하나로도 수많은 심리가 드러납니다. 답장 하나, 무응답 하나에도 사람의 내면이 숨어 있고, 그 해석 속에서 우리는 웃기도 하고 상처받기도 합니다. 이 글의 초점은 ‘누가 옳다, 그르다’가 아닙니다. 손자병법이 말하듯, 겉으로 드러난 말과 행동 뒤의 의도와 맥락을 읽는 통찰력, 그 전략적 감각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대의 취향과 타이밍, 그리고 여유를 완벽히 읽어내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결국 카톡의 피로는 메시지 그 자체보다, 그 안에서 관계를 해석하려는 우리의 ‘과도한 분석’에서 비롯됩니다.


이제 결론을 내릴 때가 되었습니다. 카톡은 짜증스럽지만, 그렇다고 끊을 수도 없는 관계의 끈입니다. 그 연결에는 분명 이유가 있고, 어쩌면 그 자체가 ‘지속의 신호’ 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굳이 불쾌한 감정으로 스스로를 소모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히 피로감이 든다면, 메시지를 잠시 멀리하며 거리를 두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렇게 하면 ‘무시당했다’는 오해를 줄이면서도, 관계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결국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라는 말처럼, 서로의 마음을 지나치게 재단하지 않으면서 적당한 거리 속에서 관계를 지켜가는 것, 그것이 어쩌면 오늘날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SNS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성숙한 인간관계의 지혜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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