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낮에 전화를 받았다. "그 아이가 죽었어." 나는 분명히 들었지만 듣지 못했다. "뭐라고?" "그 아이가 죽었다고." "그게 말이 돼?" 평범한 일상에 돌이 던져진 듯 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전화를 끊고도 멍 했다.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지? 주변에 있던 지인이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 아니에요." 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표정을 고쳤다. 함부로 이야기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어느 날 한 아이가 스스로의 삶을 끝냈다. 그 아이가 그렇게 떠나갈 거라고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기에 한동안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 아이에게 세상이 여러모로 힘겨운 곳이라는 것은 이해했지만, 아마 앞으로는 더 힘겨울 것이라 예상했지만, 충분히 공감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 세상은 내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그 아이에겐 힘든 곳이었다. 견딜 수 없을 만큼의 두려움이 그 아이를 몰아갔으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조이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이내 일상으로 돌아갔다. 문득문득 그 아이가 생각났고, 그 아이가 떠난 날이 오면 심장이 시큰거렸지만 대부분의 날들에 그 아이를 잊고 지냈다. 이따금 그 아이를 생각할 때면 비교적 최근의 다 자란 그 아이의 모습보다도 어릴 적이 생각났다. 바닷가를 뛰어다니며 웃던 모습이나 집중해서 도미노를 늘여놓던 모습. 그 아이는 내가 보지 못하는 어느 곳에선가 살아가고 있을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알고 있다. 그 아이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 아이의 아픔보다도 그 아이 부모의 마음을 더 헤아리게 된다. 그들에게 무어라도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다. 괜찮지 않을 그들에게 괜찮냐고 물어볼 수가 없다. 내가 가진 그 아이의 추억을 함께 나누기에도 그 아이의 얘기를 다시 꺼내기가 어렵다. 두 아이를 키우며 잘 지내는 나의 모든 말들이 그들에게는 배부른 자의 섣부른 얘기처럼 들릴까 봐 선뜻 입을 열기가 어렵다. 다만 그들이 너무 자신을 미워하지 않기를, 남겨진 날들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을 미안해하지 않기를 그저 마음으로 기원한다. 그 아이가 살아가지 못할 내일을 어제로 만들며 살아가길. 아픔 속에서도 뭐라도 작은 기쁨을 찾아가며 살아가길. 자신의 삶을 사랑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부모라는 자리가 이렇게 어려운 것이라는 걸 부모가 되기 전에는 몰랐다. 나도 엄마는 처음인데 아이의 1살, 아이의 2살... 8살... 12살... 매번 새로운 과제가 주어진다. 이제 좀 알겠다 싶을 때면 다른 과제가 주어지니 매번 서툴고 어렵다. 아이 둘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르고, 겪는 문제도 다르다. 나의 어린 시절과도 또 다르다. 매번 답안 없는 문제를 풀려고 끙끙대는 기분이다. 잘되면 아이가 잘한 거 같아서 대견한데, 잘못되면 엄마가 잘못한 거 같아서 미안하다. 엄마라는 위치가 끝없이 나의 능력을 의심하게 되는 자리일 줄이야. 그렇지만 우리는 매일 새로운 과제들 앞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아이의 힘듦 앞에서 모든 세상의 엄마들이 너무 자책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