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함에 침잠되는 날이 있다. 어제처럼. 아침은 여느 때와 같았다. 아이들과 웃으며 "잘 잤니? 좋은 꿈 꿨어?" 인사를 하고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겨줬다. 책가방에 물통을 집어넣고 흐린 날씨에 우산도 한 개씩 챙겨줬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렴! 잘 다녀와~" 힘차게 배웅을 했다.
그리고 오전 내내 침대에 누워 책을 읽었다. 나의 영혼은 침대로 푹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보고 있던 것은 책이라고 부르기엔 가벼운 라이트 노블이었다. 생각하기 위한 책 읽기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기를 위한 책 읽기이다. 부정적인 생각은 꼬리잡기 같다. 부정적인 생각 뒤에는 부정적인 생각이, 그 뒤에는 더 부정적인 생각이 온다. 부정적인 생각을 몰아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끊어내기'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봐."라고 나도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있었던 듯도 싶지만, 사실 부정적인 생각에 긍정적인 사고 회로는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내 경험으로 보아 그나마 효과적인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만."이라고 나 자신에게 말하고, 무언가 다른 것에 몰두해야 한다. 부정적 생각이 돌아갈 겨를도 없이.
부정적 사고를 끊기 위한 것들은 내게 때로는 리본아트였고, 때로는 자수였고, 때로는 운동이었고, 때로는 음악이었다. 요즘에는 라이트 노블이 아닐까. 아무 생각 없이 라이트 노블을 보고 있노라면, 그 뒷내용이나 궁금해하지 부정적인 생각이 돌아가지 않는다. 가벼운 이야기에 고민할 것도 생각할 것도 없다. 그 안의 내용들은 허무맹랑한 전개일 경우도 많지만, 주인공들은 용감하고 통쾌하다. 그러니 가치 없다 폄하할 것도 아니다. 오늘의 내게 대리만족과 즐거움을 주었으니 그것도 나름의 가치가 아닐까.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내고, 아이들이 올 시간이 되자 말끔히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머리를 다시 묶고 간식을 챙겼다. 오후에 챙겨야 할 것들은 체크하고 반찬 몇 가지를 조리했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오늘 잘 지냈어? 학교에서 재미있는 일 있었어? 오늘 달리기 한다고 하지 않았나?" 저녁에는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고, 장에 돈가스를 사러 갔다. 돈가스가 튀겨지지는 것을 기다리는데 기분이 좋아졌다. 집 밖으로 나와야 우울함도 좀 더 밀려나는 것인데 더 자주 밖으로 나와야지 생각했다.
한 번씩 찾아오는 우울함의 이유를 대라면 몇 가지쯤을 댈 수 있을 것이다. 주로 지나간 시간들이 남긴 생채기이다. 아니면 그것은 핑계일 뿐 이유 없는 우울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울할 때 우울해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고 보면 우울해할 수 있는 상황은 꽤 괜찮은 형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어제는 우울했지만 오늘의 나는 괜찮으니까 그것도 나름 괜찮다.
오늘의 나는 발레를 배우고, 샤워를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아이들을 치과에 데려갔다 오고, 좋아하는 책을 필사하고, 글을 썼다. 가끔 우울한 날이 있지만, 더 자주 괜찮은 날들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