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단테 신곡 사이 어디쯤
선과 자유의지. 인간에게는 빛이 주어져 있다.
커피 마시며 단테 — Coffee with Dante
# 15
지옥에는 기도가 없었다.
연옥에서 처음으로 노래가 들린다
비명이 있고, 신음이 있고, 저주가 있다. 그러나 기도는 없다.
지옥의 문 앞에 새겨진 말처럼 — 모든 희망을 버려라. 희망이 없는 곳에 기도가 있을 수 없다. 기도는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닫힌 곳에서는 손을 뻗을 방향이 없다.
그런데 연옥에는 기도가 있다. 노래가 있다. 지옥을 빠져나온 단테가 처음 들은 것이 영혼들의 노래였다. 시편을 부르며 바다를 건너오는 영혼들. 산을 오르며 기도문을 외는 영혼들. 고통받으면서도 노래하는 영혼들. 단테는 그것을 들으며 깨달았을 것이다. 이곳은 다르다고.
· · ·
연옥편에는 유독 기도문이 많이 등장한다. 단테는 각 테라스마다 영혼들이 외는 기도를 기록했다. 각 기도문은 그 테라스의 죄와 정화 방식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교만의 테라스에서 영혼들이 외는 기도와, 질투의 테라스에서 들리는 기도는 다르다. 단테는 기도를 통해 정화의 내용을 보여준다.
Ⅰ주기도문 — 교만의 테라스 Pater Noster
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공간에 갇히지 않으시고, 다만 더 큰 사랑으로
저 위 첫 번째 피조물들을 향해 계시는 분,
— 단테, 『신곡』 연옥편 제11곡
교만이라는 가장 무거운 죄가 어떻게 겸손으로 치유되는지를 보여주는 경이로운 장면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자부심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살았던 영혼들은, 이제 거대한 돌덩이에 눌려 땅바닥의 개미를 보듯 몸을 낮추고 걷는다. 그들이 읊조리는 주기도문은 원문보다 훨씬 길고 구체적이다. 이는 기도가 단순히 외우는 주문이 아니라,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신에게 철저히 매달리는 의존의 과정임을 드러낸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구절에서 그들은 덧붙인다. 이 거친 세상에서 당신이 내려주시는 '만나' 없이는, 아무리 애써 나아가려 해도 결국 뒤처질 뿐이라고. 이는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교만의 뿌리를 뽑아내는 고백이다.
그들에게 기도는 멈춰 서서 드리는 안식의 시간이 아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한 걸음씩 내디뎌야만 하는 삶의 고통 그 자체가 기도가 된다. 육체의 고통과 영혼의 간구가 하나로 합쳐질 때, 비로소 그들을 짓누르던 돌은 벌이 아닌 '자비로운 훈련'으로 변모한다.
낮아짐으로써 비로소 영혼의 눈을 뜨게 되는 이 역설적인 치유의 과정이 깊은 울림을 준다.
Ⅱ미세레레 — 연옥 전정 Miserere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
그들은 모두 함께 한 목소리로 노래했다.
— 단테, 『신곡』 연옥편 제2곡 · 시편 114편
지옥의 어두운 구덩이를 막 벗어난 영혼들이 연옥의 해변에 첫발을 내딛는다.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노래는 시편 114편인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In exitu Israel de Aegypto)"이다.
이 노래는 죽음과 죄의 속박이라는 '이집트'를 탈출한 자들의 해방 선언이다. 지옥에서 저마다의 고통에 갇혀 비명을 지르던 개별적인 존재들이, 이곳에서는 비로소 하나의 목소리로 합창을 시작한다.
천사가 이끄는 배를 타고 도착한 백여 명의 영혼들은 일제히 같은 구절을 노래하며, 자신들이 이제 혼자가 아닌 구원의 공동체임을 증명한다. 과거의 노예적 삶을 뒤로하고 약속의 땅을 향해 걷기 시작하는 이들의 첫 노래는, 절망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가장 눈부신 희망의 소리이다.
연옥에서 처음 가능해진 이 '함께 부르는 노래'는, 고립된 자아를 깨고 타인과 신을 향해 열리는 치유의 첫걸음이 된다.
Ⅲ사랑의 찬가 — 질투의 테라스 Agnus Dei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여,
— 단테, 『신곡』 연옥편 제13곡
남의 행복을 시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질투하는 자들의 언덕이다.
한때 타인의 빛을 시샘하던 그들의 눈은 이제 철사로 촘촘히 꿰매어져 있다. 앞을 볼 수 없는 그들은 마치 벽에 기대어 서로를 지탱하는 장님들처럼,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앉아 있다.
시각이 차단된 그 어둠 속에서 그들이 올리는 기도는 오직 소리로만 존재한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들은 더 이상 남과 자신을 비교하며 훑어보지 않는다. 볼 수 없기에 비로소 곁에 있는 이의 온기를 느끼고, 보이지 않기에 신의 목소리에 더 예민하게 귀를 기울인다.
질투는 '보는 것(in-videre)'에서 시작된 병이다.
단테는 그들의 눈을 감김으로써 타인의 풍요를 훔쳐보던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결핍을 신의 풍요로 채우게 한다. 보지 못하는 어둠은 오히려 영혼의 귀를 열어주는 자비의 장치가 된다.
침묵의 언덕에서 울려 퍼지는 그들의 합창은, 시기가 사라진 자리에 연민과 연대가 어떻게 피어나는지를 보여준다. 보지 않아도 들리는 것들, 보지 않아야만 비로소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을 그들은 어둠 속에서 배워간다.
Ⅳ 평화의 기도 — 분노의 테라스 Beati pacifici
평화를 이루는 자는 복되도다, 악한 분노 없는 자들이여!
— 단테, 『신곡』 연옥편 제15곡 · 천사의 말
뜨거운 불길보다 더 지독한 검은 연기가 자욱한 분노의 언덕이다.
한때 화를 참지 못해 이성을 잃었던 자들은, 이제 앞이 보이지 않는 짙은 연기 속에서 서로의 목소리에 의지해 걷는다. 분노는 영혼의 눈을 가리는 눈먼 안개와 같기 때문이다.
그 연기를 뚫고 마침내 천사의 눈부신 광채가 비칠 때, 단테의 귀에 부드러운 선언이 들려온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분노의 치유는 무조건 화를 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던 이기적인 감정의 연기를 걷어내고, 무엇이 진정으로 의로운 것인지를 분별하는 과정이다. 나를 해친 이를 향한 독한 마음은 내려놓고, 그 자리에 타인을 긍휼히 여기는 평화의 마음을 채워 넣는 것이다.
연기가 걷힌 자리에는 더 이상 타인을 찌르는 날카로운 가시가 남지 않는다. 대신 그곳에는 명료한 이성과 천사의 목소리가 머문다. 분노로 마비되었던 영혼은 비로소 맑은 공기를 마시며, 진정한 용서가 주는 자유를 경험한다.
Ⅴ영광송 — 탐욕의 테라스ㅜGloria in excelsis Deo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 단테, 『신곡』 연옥편 제20곡
땅에 얼굴을 박고 엎드린 채 "내 영혼이 먼지 속에 붙었나이다"라고 부르짖는 탐욕스러운 자들의 언덕이다. 한때 세상의 금은보화와 권력을 탐하며 하늘을 등졌던 그들은, 이제 차가운 바닥에 몸을 밀착시킨 채 자신들의 집착을 씻어낸다.
그러던 어느 순간, 거대한 지진이 일어난 듯 온 연옥산이 격렬하게 진동한다. 그것은 재앙의 징조가 아니다. 탐욕의 사슬을 끊어내고 정화를 마친 한 영혼(스타티우스)이 마침내 천국으로 향할 자유를 얻었음을 알리는 환희의 진동이다.
탐욕은 영혼을 무겁게 만들어 땅에 묶어두는 족쇄다. 하지만 그 집착을 내려놓는 순간, 영혼은 비로소 가벼워져 하늘로 솟구칠 준비를 마친다. 무언가를 움켜쥐려 했던 손을 놓을 때, 그 빈손에 비로소 신의 영광이 깃든다.
연옥산의 진동은 비워진 영혼들이 내지르는 거대한 공명이다. 소유를 포기하고 자신을 비워낸 자리에서만 터져 나올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환호다. 비워야만 비로소 울림이 시작된다는 역설을, 그들은 온몸을 뒤흔드는 산의 진동으로 증명한다.
연옥의 기도는 각 죄의 반대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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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과 연옥의 가장 큰 차이를 하나만 꼽는다면 나는 기도이다.
지옥에는 기도가 없다. 연옥에는 기도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 행위의 유무가 아니다. 기도는 방향이다.
기도는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이다.
자기 밖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지옥의 죄인들은 자기 안에 갇혀 있다. 연옥의 영혼들은 자기 밖을 향해 열려 있다.
기도할 수 있다는 것 — 그것이 희망의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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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의 기도들은 모두 함께 드려진다. 지옥에서 죄인들은 각자의 고통 속에 있다.
그러나 연옥에서 영혼들은 함께 노래한다. 이집트에서 나올 때 한 목소리로 부른 시편처럼. 탐욕의 테라스가 흔들릴 때 함께 외치는 영광송처럼. 함께 기도한다는 것은 —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을. 그것이 연대다.
우리는 기뻐했다, 그리고 곧 눈물로 돌아갔다.
새로 온 무리 중에서 외침이 솟구쳤다:
"왜 노래하지 않느냐?"
— 단테, 『신곡』 연옥편 제2곡
연옥 해변에 갓 도착한 영혼들이 노래를 멈추었을 때, 이미 거기 있던 영혼들이 묻는다. 왜 노래하지 않느냐고. 그것이 연옥의 규범이다. 이곳에서는 노래한다. 고통스럽더라도. 아직 정화가 끝나지 않았더라도.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단테는 이 짧은 장면에서 연옥의 정신을 압축했다. 기도와 노래는 의무가 아니라 — 희망을 가진 자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고통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다면,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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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자신도 연옥을 걸으며 기도를 배운다. 교만의 테라스에서 영혼들이 주기도문을 변주하는 것을 들으며, 그는 기도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했을 것이다. 기도는 신에게 원하는 것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자기 밖의 것을 향해 방향을 트는 것이다. 자기 안에 갇혀 있던 것들을 놓아주는 것이다. 교만을 내려놓는 것, 질투를 내려놓는 것, 분노를 내려놓는 것 — 그것이 기도의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 연옥이다.
그리고 단테는 그 기도들을 기록했다. 라틴어 시편을 이탈리아어 시 속에 녹여 넣고, 각 테라스의 노래를 『신곡』의 언어로 옮겼다. 기록하는 것도 기도의 일종이다. 잊지 않겠다는 것. 이승에 전하겠다는 것. 피아가 기억해달라 했을 때, 단테가 그것을 썼을 때 — 그것도 기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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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아침 커피를 마시며 기도라는 단어를 생각했다.
종교가 있든 없든, 우리는 가끔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는다. 잘 되기를 바라는 것, 잊지 않으려는 것, 감사를 표하는 것. 그 방향이 있다는 것 — 그것이 기도의 본질이 아닐까. 지옥에서는 방향이 없었다. 연옥에서는 방향이 생겼다. 그리고 그 방향이 생기는 순간, 노래가 시작됐다.
오늘 하루 어떤 방향으로 손을 뻗는가. 무엇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가. 혼자인가, 함께인가. 단테는 연옥을 걸으며 배웠다. 고통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을 때 — 그것이 살아 있다는 것이라고. 그리고 살아 있는 한, 아직 기도할 수 있다고.
선과 자유의지를 위한 빛이 당신에게 주어져 있다.
오직 그 빛만을 공경하라.
— 단테, 『신곡』 연옥편 제16곡 · 마르코 롬바르도
기도는 그 빛을 향해 고개를 드는 것이다. 연옥의 영혼들은 고통 속에서도 그 빛을 향해 노래했다. 커피가 아직 따뜻하다. 오늘 아침,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들어볼까.
글
달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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