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단테 신곡 사이 그 어디쯤과 단테 신곡 사이 그 어디쯤
커피 마시며 단테 — Coffee with Dante
# 24
예언은 알 수 없는 미래를 말하는 것일까.
예언은 지금 눈앞에 있지만 아무도 보려 하지 않는 것을 포함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미 일어나고 있지만 아무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 예언자는 미래를 보는 자가 아니라, 현재를 가장 깊이 보는 자다. 그 깊은 시선이 때로 미래처럼 들린다. 진실은 언제나 시대보다 앞서 있기 때문이다.
단테는 예언자였다. 그러나 그는 신탁을 받은 자가 아니었다. 추방당한 자였다. 피렌체에서 쫓겨나 이탈리아를 떠돌며 《신곡》을 썼다. 그 분노와 슬픔과 통찰들이 예언이 되었다.
지옥에서 그는 동시대의 타락한 자들을 심판했다.
연옥에서 그는 정화의 가능성을 보았다.
천국에서 그는 세상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말했다.
예언은 권력이 아니라 진실에서 온다. 단테는 그것을 알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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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증조부 카치아귀다가 말한다. 천국에서 단테는 자신의 조상을 만났다. 카치아귀다는 단테에게 예언했다.
너는 가장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떠나야 할 것이다.
이것이 추방의 활이 먼저 쏘는 화살이다.
너는 타인의 빵이 얼마나 짠지,
그리고 타인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 알게 될 것이다.
— 단테, 『신곡』 천국편 제17곡
이 예언은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단테는 1302년에 피렌체에서 추방되었다. 《신곡》을 쓸 때 그는 이미 그 쓴맛을 알고 있었다. 타인의 빵의 짠맛을. 타인의 계단의 무게를. 그러나 단테는 그것을 예언의 형식으로 썼다. 과거를 미래처럼. 이미 겪은 것을 아직 오지 않은 것처럼. 예언자는 자신이 먼저 그 고통을 겪는다. 그래서 말할 수 있다. 경험하지 않은 진실은 예언이 아니라 추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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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치아귀다가 계속 말한다. 가려운 곳을 긁어라. 불편한 진실을 말하라. 처음에는 듣기 싫을 것이다. 그러나 소화되고 나면 생명을 주는 양식이 된다. 카치아귀다는 단테에게 말하라고 했다. 두려워하지 말고. 추방당했어도. 권력이 없어도. 진실을 말하라고.
그냥 가려운 곳을 긁게 내버려 두어라.
왜냐하면 네 목소리가 처음 맛에는 불편하더라도,
소화되고 나면
생명을 주는 양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단테, 『신곡』 천국편 제17곡
단테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신곡》을 썼다. 교황을 지옥에 넣고 동시대의 권력자들을 심판했다. 피렌체의 타락을 고발했다. 그것이 위험한 일이었음을 알면서도. 예언은 침묵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침묵한 예언은 예언이 아니다. 말해야 한다. 처음에는 불편하더라도. 소화되고 나면 양식이 되기 때문이다.
진실의 유통기한은 길다. 때로 70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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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는 지옥에서 수많은 이름들을 불렀다. 그것은 단순한 나열이 아니었다. 고발이고 기록이었다. 그리고 경고였다. 이 사람들이 왜 지옥에 있는지를 말함으로써, 살아 있는 자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살면 이렇게 된다고. 이 길을 가면 이곳에 닿는다고.
복음사가는 너희 목자들을 알아보았다,
물 위에 앉아
왕들과 음행하는 그녀를 그가 보았을 때.
— 단테, 『신곡』 지옥편 제19곡
교황들을 향한 단테의 고발이다. 요한계시록의 언어로 교황청을 음녀에 비유했다. 권력과 돈을 위해 신앙을 팔았다고. 이것은 단테 시대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시대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권력이 진실을 팔 때. 신성한 것이 세속적인 것에 무릎 꿇을 때. 단테의 고발은 시대를 넘어 울린다.
예언은 특정 시대를 향하지 않는다. 그 패턴을 향한다. 반복되는 인간의 오류를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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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만으로는 예언이 되지 않는다. 사랑이 없는 분노는 저주일 뿐이다. 단테의 이탈리아를 향한 절규를 한다. 이탈리아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아파하지 않았을 것이다. 피렌체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 타락에 이렇게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 노예가 된 이탈리아여, 슬픔의 숙소여,
큰 폭풍 속에 키잡이 없는 배여,
지방들의 여주인이 아니라 창녀여!
— 단테, 『신곡』 연옥편 제6곡
예언자의 분노는 사랑의 다른 얼굴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프고 아프기 때문에 분노한다. 분노하기 때문에 말하고 그것들이 예언을 만든다. 사랑 없는 예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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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을 시작하기 전 단테의 고백이 있다. 나는 자격이 없다. 위대한 영웅도 아니고 선택받은 사도도 아니다. 그냥 길을 잃은 한 사람이다. 추방당하고, 사랑을 잃고, 방향을 잃은 한 사람. 그러나 그 자격 없음이 오히려 예언을 가능하게 했다.
나는 아이네아스가 아니고, 바울도 아닙니다.
나도, 다른 누구도 내가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 단테, 『신곡』 지옥편 제2곡
아이네아스는 신의 아들이었다. 바울은 신의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단테는 그냥 인간이었다. 고통받는 인간. 그 고통이 그를 지옥으로 이끌었다. 지옥을 통과하게 했다. 연옥을 오르게 했다. 천국에 닿게 했다. 예언은 고통을 통과한 자의 언어다. 지옥을 직접 걸어본 자만이 지옥에 대해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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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는 지옥에서 이름을 불렀다. 챠코. 실존했던 피렌체 사람. 단테는 지옥에서 만난 영혼들에게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물었다. 익명의 악은 고발할 수 없다. 이름이 있어야 책임이 있다. 이름이 있어야 역사가 된다.
'챠코, 네 고통이
나를 너무 무겁게 하여 눈물을 부른다.
그러나 네가 안다면 말해 다오,
분열된 도시의 시민들이 어떻게 될지를.'
— 단테, 『신곡』 지옥편 제6곡
단테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를 지옥에 넣은 것처럼. 그가 아직 살아 있을 때. 그것이 예언의 용기였다. 추상적인 선악이 아니라 구체적인 이름과 사건과 장소를 말하는 것. 이름을 부르는 것. 그것이 예언의 시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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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파괴를 원하지 않는다. 회복을 원한다. 고발하는 것은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잡기 위해서다. 지옥을 보여주는 것은 거기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다. 단테의 《신곡》이 지옥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언은 언제나 그 방향으로 걷는다. 어둠에서 빛으로. 분노에서 사랑으로. 고발에서 회복으로.
글
달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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