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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Jun 09. 2022

이름

이름


외로이 혼자 떠있는 구름을 '고운'이라고 한다.


이름이 예뻐서 기억하기로 했다.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입으로 세 번, 마음으로 세 번 되뇌었다.



지켜내고 싶은 사람들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름이 점점 일치하여 갈 때, 아마도 나는 '친구'라 다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본다.


딸아이가 잠들기 전 말하였다.

"나는 이름이 왜 먼저 지어졌냐고." 다섯이 된 아이의 물음인지 투정인지 알 수 없는 말에 나는 다시 "그래서 맘에 들지가 않아?"라고 물어보았다.

"음.. 아니?"

"그럼 뭐라고 짓고 싶어 너 이름?"

"왜."

"왜??"


같이 깔깔깔 하고 웃었던 밤에.



그렇지. 이름이라는 것은 주어지는 것이니깐.

사유할 수 없는 어린아이가 짓기에는 (이름을 왜라고 짓는 것처럼) 어려운 것이니깐.

주어지는 것이 맞다.


내 이름의 뜻은 '마음이 맑고 밝으라'라는 것인데,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마음아 맑고 밝아져라, 마음아 맑고 밝아져라."라고 하는 것 같다.


나는 이름대로 살아진다는 그 말을 믿는다.


그래서인지 맑고 밝게도 컸다. 내 벗이 웃는 모습이 싱그럽다 하여 그 한 문장을 계속 보았던 기억. 내가 지난 나날 속에 베어지고 타들어간 흉을 보여주어도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음은 누군가에게 이런 빛을 발할 수 있다면 이건 필시 그녀가 나를 많이도 사랑하기 때문일진대 사랑은 허다한 것을 덮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베전 4:8) 나에게도 그녀는 그런 사람이다.


편무적인 사랑은 그 지속함의 한계가 있는 것이고 그것이 친구 사이의 정이라 하였을 때에 끝과 끝의 거리는 재어 보이지 아니하여도 된다.


사랑은 반응하여야 하는 것이고 그것의 시작은 이름을 부르는 것에 있다.


저기요.

여기요.

여보세요.


이름이 아니고서야, 가만가만히 무언가를 어찌 전달하여 줄 것이며 듣는 이는 마음을 모으지 아니할 것인데 속사임이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고통이기도 하다. 기억하는 이름이 많다는 것은 잊어야 하는 이름이 많다는 것일 테니깐.


때론, 외우지 못해 나는 고통스럽다.

어제 우진이를 부르기 위해  번의 고통을 거쳤다.


'진우야.'

돌아보지 않는다.


'건우야.'

돌아보지 않는다.

조급해졌다.


'지우야'


보다 못한 다른 친구가

우진이예요. 하고 알려주어 나는 좌절했다.


'진달래야'는 차라리 아름다웠을까.


이름을 외운다는 건 고통이다. 사랑이고. 기억한다는 것이고. 특별하다는 것이다. 존재의 뚜렷함이고. 다만, 나는 그것이 어렵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대의 이름을 기억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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