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운 학생들 유형
어른이 되면서 사회 속에 눈을 뜨며, 주변과 비교하고 만족하지 못해 시샘하고 부러워하는 일이 많아진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라지만, 때로는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좇아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에게 자꾸만 시선이 가고 부러움 반 질투 반의 감정에 휘말리기도 한다.
선생님이 되며 드는 이중 감정 중 하나는 나보다 어린 학생들을 바라보며, 가끔은 인간 대 인간으로서 대단한 점을 발견한다거나 부러운 어떤 면을 발견하는 것이다. 나보다 어리고 내가 가르쳐야할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배울 필요가 없는 듯해 보이는 능력을 가진 학생들의 일부는 영재교육 대상자로 분류되어 교육청과 대학교의 수업을 듣는다. 때로는 유명한 수학 대회, 영어 스피치 대회에서 상을 받아오거나, 학교 이름을 걸고 나가 운동 분야에 메달을 따오는 아이들을 보면, 도대체 어떻게 아이를 키운 것인지 궁금하고 또 때로는 부럽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다
어른들은 살아가며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거나, '부러우면 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나는 종종 세상에 지다 못해 패배한 사람이 되어 살아가는 듯하다. 사실 부러움의 감정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당연히 나보다 잘난 누군가를 만나면 부러운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나보다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 종교인이 아니라면 속세를 살아가며 당연하게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
네모난 교실 공간에 하루종일 함께 생활하다보면, 나와 함께 1년을 보내는 아이들에게서도 '부러움'을 느끼는데 그럴 때의 감정을 숨기기 보다는 '예쁘다'거나 '멋있다'거나, '정말 좋겠다'고 칭찬처럼 말을 건넨다. 한 번은 6학년 아이가 모자를 새로 샀다면서 나에게 보여주는데 정말이지 그 아이랑 스타일이 잘 어울렸다. 그래서 엄지척을 해주는데 모자의 옆에 미우미우 브랜드 로고가 있었다. 역시 장원영처럼 어린 아이들은 미우미우가 어울리는 구나 부러우면서도 6학년에 벌써 라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잘 어울리는 것에 대한 의견을 주며 예쁘다고 해줬다. 그 아이는 정말 바르고 착한 아이였고, 그 브랜드가 엄청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이라 그냥 정말 새 모자를 자랑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교한 아이들이 내팽개치듯 던져놓은 실내화를 실내화장에 정리해주며, 종종 보려고 한 것은 아닌데 닥스에서도 실내화가 나온다는 사실도 알게 되고, 어떻게 읽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비싸 보이는 실내화를 무심한 듯 시크하게 넣어주기도 한다.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엄마가 보면 속터지겠구나 하면서 잃어버리지 않게 바닥에 떨어트려둔 한 짝의 주인을 잘 찾아준다. 그러면서도 발이 수시로 크는 아이들에게 브랜드 실내화를 사주는 부모를 생각하게 되고 가성비를 따지며 아이의 실내화를 오래도록 골랐던 내 모습을 생각하며 왠지 모를 부러움을 느꼈다.
굳이 알고 싶지 않지만
굳이 알고 싶지 않지만, 우리나라는 통학 구역이 정해져있기 때문에 아이들의 주소만으로도 대충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지 어림할 수 있다. 가정환경 조사서 따위 없어진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행동과 말 그리고 많은 것들에서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 2학년 아이들을 가르칠 때, 집 안의 다양한 구조와 방들의 역할을 배우던 때였다. 부엌과 베란다, 거실, 화장실 등이 기재된 표준화된 교과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저희 집은 부엌이 따로 없다'며 '그리고 베란다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알고 보니 아이는 다세대 주택 1층에 거주하고 있었고, 원룸구조의 집에 생활하고 있었다. 집 구조는 다 다르다면서도 괜히 아이가 상처받은 말을 내뱉은게 아닐까 나의 말을 곱씹어보면서 난처했던 기억은 아직도 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반대로 선생님인 나의 말과 행동에서 아이들은 내 삶의 일부분을 유추할테고 학부모들은 문화 환경을 어렴풋이 짐작할 것이다. 6학년들을 지도하며, 잠깐 쉬는 시간에 아이들끼리 대화를 하는데, 미국에서 열리는 한 대회의 본선에 우리나라 대표로 나가게 되었는데 다같이 타야해서 이코노미석을 탄다는 이야기에 상대방 아이가 답답해서 어떻게 가냐고, 돈 더내고 업그레이드해달라 말했다. 정말이지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대화라서 나는 몹시도 태연한 척 하려 노력했던 기억이 있다. 가격에 맞춰 일정을 조절하며 비행기 티켓을 끊는 나의 여행스타일로서는 비지니스석과 그 이상을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나의 앞에 앉은 아이들은 당연한 일상으로 누리는 무언가였다.
강남 아이들은 부모 잘 만났다
강남 학부모, 강남 아이들
꼭 강남에 살아야 부자이고, 꼭 강남에서 학교를 다녀야 우수한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강남'이라는 수식어에 많은 가중치를 더한다. 그리고 그들이 누리는 무언가에 대해 시샘하고 질투하는 시선도 분명 존재한다.
'부모 잘 만나서 좋겠다'라는 푸념섞인 말에 어느 정도 이해는 하지만, 꼭 '물질적'인 것이 풍족한 부모를 만나야만 부모 잘 만난 것은 아니다. 물론 쉽게 살 수 없는 브랜드들의 옷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입고 다닌다거나, 외국 여행을 수시로 간다거나, 어마어마한 교육비를 쓰고 있다는 자체 만으로 대단히 부럽다. 그 감정이 나쁘게 흘러가 때로는 내 아이에게는 그렇게 해줄 수 없어 자괴감이 들거나 미안함 감정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대치동에 온지 2년 여의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예전처럼 남들이 부럽지만은 않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기준선이 본인의 학창시절이나 대입 결과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 받는 아이들의 압박감은 정말이지 상상을 넘어선다. 교육비를 아낌없이 퍼붓는 것에 대한 기대치와 목표가 명확하고, 어린 시절부터 정해진 길과 가장 높은 수준을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경우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만감이 교차한다.
어디든 부모 잘 만난 아이들은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5년마다 서울특별시 내에서 순환 근무를 해야하는 교사의 눈에 바라보자면 모든 지역에 그리고 모든 동네에 '부모 잘 만난 아이들'이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때로는 '저 아이의 부모는 어떤 분일까?' 궁금할만큼 아이를 잘 키워내고, 자그마한 사건이나 일에 휘둘리지 않는 강단을 가지고, 아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믿어주는 멋진 부모는 어디든지 존재한다.
흙 속의 진주처럼 파묻혀 자신의 재능을 아직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그 진주를 매일매일 다정하게 닦아주는 부모를 만난 아이들을 나는 종종 마주하게 된다. 비단 특정 지역에서만이 아니라 늘 내가 근무하던 학교에는 그런 학부모들이 있었다.
그러니 강남에 사는 부모가 아니라고 자책하거나, 아이에게 더 못해줘서 미안해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바보같은 생각은 그만두는 것이 좋다.
분명 어떤 점에서 우리 아이도 부모를 잘 만난 아이일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