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어언 2년 반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늦은 결혼이라 계획이랄 것도 없이 바로 아이를 가졌다. 임신 기간은 매끄러운 비단결 같은 시간으로만 채워졌다. 희대의 낙관주의자답게 출산 이후의 일은 크게 상상해 보지도, 개의치도 않았다. 아니, 육아의 강을 먼저 건넌 선배들의 무시무시한 경고성 언어는 나에겐 당면하지 않을 것 같은 외계어처럼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큰 교만이자 오만이었던 게다.
출산부터가 위기였다. 예정일이 지나도록 기미가 없던 터라 유도분만을 결정했다. 사실 계획 수술을 하고 싶었는데 남편이 임신 초기부터 은근하게 자연분만 단어를 쿡쿡 들이밀었다. 매우 거슬렸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순전히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에 왜 왈가왈부람? 허나 거슬린다 한들 무시할 수는 없었다. 뿌리 깊은 남편우선사상주의 가정에서 자란 K-와이프가 바로 나다. 유도분만 인구 50% 이상의 말로는 결국 수술이라더니, 대세 편승 기질은 막을 수가 없지. 눈 떠 보니 수술실이었다.
지금에서야 웃으며 말하지만 의료사고 수준의 병원 측 미스가 있었다. 무통 주사바늘이 제대로 꽂히지 않아 분만시 마취가 들지 않았던 것. 어쩐지 무통 들어갑니다 했는데 배가 뒤틀리는 듯한 진통의 위풍당당한 기세는 한 풀도 꺾이질 않더라니. 수술실에서도 무통 바늘 꽂은 곳에 하반신 마취액을 주입한다며 여러번 “산모님 여기 감각이 들어요?” 묻는데 희한하게 꼬집는 기분이 드는 거다. 갸웃거리며 “네 드는데요?” 했다. “느낌이 나는 거라 감각이 있는 거랑 달라요. 확실히 꼬집는 아픔이 느껴져야 해요. 그런 거 맞아요?” 내가 예민하게 느끼는 건가 싶었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꼬집는 기분, 그게 맞았다.
그렇게 3번가량 같은 프로세스를 거친 후 “이상하네, 다시 돌아 누워보세요~” 하며 의사가 등 뒤에 꽂힌 무통 마취처를 살펴보더니 “어머 주사가 빠져있네” 란다. 어머? 지금 그게 할 말이세요? 하마터면 도마위 생선처럼 생생한 감각으로 배를 가를 뻔한 게 아닌가. 지금 생각해도 고소미를 들이 밀어야 하는 사건이지만 희대의 평화주의자로서 프로파이터 신랑을 감당할 기운이 그 때는 없었다. 분명 신랑에게 이 얘길 전하면 병원이 뒤집힐 게 뻔했다. 분만과 수술을 거쳐 온 몸과 멘탈이 흐느적거리던 그 때의 나는 조용히 이 사건을 묻기로 하고 입을 닫았다. 최근에서야 신랑에게 이 기막힌 이야기를 전했다. 지금은 미쳤네 어떻네 하면서 늘어놓는 무용담이 되었지만, 아직도 그때 수술실의 나를 떠올리면 끔찍하다.
회복은 무탈했을까. 병원은 모유수유 스파르타 공화국이 따로 없었다. 수술 후 홀로 견뎌야 하는 고통의 난관은 모유수유 앞에 존재감을 잃었다. 칼같이 3시간 텀으로 벨이 울렸다. 역시 엄마희생사상주의 가정에서 자란 K-엄마는 매우 초보임에도 불구하고 모성애 이름의 불타는 사명감으로 찢긴 배를 움켜쥐고 꾸역꾸역 수유실로 끌려갔다. 인간이란 본디 적응의 동물. 하다보면 어찌저찌 또 된다. 단, 몸의 회복은 가망이 없어 보였다.
조리원에도 거의 기어 들어갔다. 진통제 없인 견디기 힘든 고통이 온종일 나를 괴롭혔다. 놀랍게도 조리원 눈물바다 사태의 원인은 이 고통이 아닌 남편이었다. 코로나 역병이 최고조로 이른 때의 출산인 터라 남편은 조리원에서 입장 후 한 번 밖으로 나가면 다신 들어올 수 없었다. 재택이 자유로웠던 그는 2주간 조리원 동반 입대(?)를 하기로 하는데... 그 결말은 한 마디로 줄인다. ‘과거의 나를 뜯어 말리자.’
뭐든 미리 예습하는 파워J인 남편으로선 닥치면 하는 파워P인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마음에 안드는 눈치였다. 눈치빠른 P는 몸도 마음도 너덜 상태인데 자꾸 다그치는 상대가 옆에 있으니 쉬지도 그렇다고 움직이지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모양새로 2주를 보냈다. 하루가 멀다하고 눈물바람을 날렸고 나는 나대로, 그는 그대로 속이 상한 시간들이 여럿 생겼다. 물론 항상 그의 사과로 끝맺음 되었지만 아직도 그 때를 떠올리면 내 자신이 애처로워진다.
나에게 첫 번째 출산과 회복의 기간은 어두컴컴한 암흑의 기간으로 기억된다. 물론 매일 쑥쑥 크는 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예쁘고 사랑스러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나는 “엄마가 뭐 저래?” 라는 손가락질 받는 게 두려워, 어디선가 듣고 본 모성애를 흉내내기 급급했다. 모든 게 서툰 상황에서 지친 나를 돌볼 여유는 일절 없었다. 6개월가량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나도, 아기를 향한 모성애도 모든 게 온전해졌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면 출산을 앞둔 나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아들의 갓 태어난 시즌을 만끽하려면 스스로 몸과 마음을 먼저 살피고 보듬으라고. 주변의 시선 때문에, 모성애를 발휘해야 한다는 통념 때문에 엄마라는 프레임 안에 억지로 나를 끼워 넣느라 밀어붙이지 말고 나를 먼저 세우고 채우라고. 나 자신이야말로 이제 막 시작된 육아라는 엄청난 새로운 세계를 지탱할 그릇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