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로살다 Aug 29. 2023

응급의 정도

오랜만에 자정이 넘은 시각에 응급실을 다녀왔다.

귀가하던 남편의 귀에 문제가 생겨서였다.


한 밤의 대학 병원 응급실은 세상 제일 붐빈다.

각자 집에서는 도저히 치료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 발생하여 누구보다 응급한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이 수두룩 빽빽이다.


그들은 대기표를 뽑고 자기의 순서가 되기를 기다리면서,

응급실에서의 태반은 그저 기다리는 시간이니

이게 응급실이 맞나 답답함과 억울함과 분노,

이래서 집안에 의사가 있어야 돼, 라는데까지 생각이 번진다.


화를 내고 안절부절하는 것은 에너지 소모가 커서

기다리는 시간을 더 힘들게 만든다.


나는 왜 이렇게 오래 기다리나,

어? 나보다 늦게 접수한 저 사람이 먼저 들어가네?

따져야겠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응급실은 식당이 아니다.

내가 먼저 주문했는데요,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보다 중증의, 보다 응급한 환자를 먼저 보는 것이

그들의 프로토콜이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경증의 환자의 순서는 뒤로 밀리고,

진료의 깊이도 가볍다.


만국공통으로 쓰이는 항생제 소염제 진통제 위장보호제를 셋트로 처방하고 정상 진료를 예약해준다.


응급실의 우리 모두는

내가, 나의 아기가 가장 급한데

애석하게도 응급의 정도라는 차가운 기준이 있다.


나는 충분히 아픈데, 더 아픈 사람이 있으면

참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응급실에서,

은우는 항상 Fast Track 이었다.


- 항암치료 하는 아기인데요, 열이 나서 왔어요.

- 네 금방 들어가실께요. 잠시만 계세요.


한밤 중에 37도 이상의 열이 나면 무조건 응급실로 뛰어와야 한다는 교수님의 말대로 우리 부부는 적어도 스무번 이상 응급실에 왔다.

불빛이 휙휙 돌아가는 몇대의 구급차와

대기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지나

나는 은우를 안고 소아응급실로 들어가 처치를 받고

몇시간 후 병동으로 다이렉트 입원을 했었다.


면역이 바닥난 상태에서의 발열은

봄날 산불과도 같다.

번지기 전에 잡아야 한다고 했다.


치료가 끝난 후, 최근에도 지독한 장염 때문에

은우를 데리고 응급실을 다녀왔었는데,

경험해보니 2년 전 은우의 응급의 정도가 얼마나 높은 수준이었는지, 하루하루가 얼마나 초긴장의 연속이었는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치료를 마친 남편과 귀가하는 길에

남편은 응급실에서 아무것도 안해주고 의사도 엄청 불친절했다며 투덜댔지만

병원에서 불친절한 건 좋은 신호일 때가 많다는 생각에

나는 오히려 안심한 마음이 되었다.


앞으로도 병원에서 홀대받는 우리 가족이 되었으면 좋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