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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살다 May 19. 2024

숨쉬는 뇌

나는 그 때 일을 정말 열심히 했다.

밤 10시, 11시까지 야근하고 선후배들과 술도 한잔,

그리고 새벽에 귀가했다가 다시 8시까지 출근.

간간히 해외 출장.

출장지에서도 잠은 거의 못잤던 것 같다.

그 생활을 2년, 3년째 하면서 어지간히도 너덜너덜해졌던 것 같다.


옆에서 잘한다, 잘한다 하는 칭찬이 진짜인 줄 알고

(물론 일부는 사실이었겠지만)

경주마처럼 달렸고, 그래서 고과도 잘 받고, 인정도 받고, 그런 20대 후반이었다.


내가 지쳤다는 걸 알게 된 건

자꾸 내던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였다.

사방에서 강저항이나 질책을 받을때, 첩첩산중으로 문제가 쌓여갈 때, 마음 속 견뎌내는 힘이 점점 약해지는게 느껴졌다.


이제 그만하고 싶다, 다 포기하고 내려놓고 싶다. 라는 생각이 예전보다 자주 들었고

심지어 저녁 늦게까지 법인과 콜을 마치고

명확한 이유도 없이

텅 빈 회의실에서 엉엉 운 적도 있었다.



이렇게 사는게 맞나?


내 인생에 회사가 90% 이상을 차지하는게

선배들 말처럼 의미있는 일인건가.



그렇다고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일 밖에 없는 나의 하루 하루가 숨이 막혀왔다.


아침에 출근해 메일을 열어볼 때면

심장이 두근두근, 머리카락이 쭈뼛 서곤 했다.


또 밤새 어떤 문제들이 터졌을까.

법인에서 어제 해본다던 테스트는 통과했을까.

거래선에서 컴플레인이 온 건 아닐까?


아니, 무엇보다 새로운 업무가 추가된 건 아닐까?

오늘까지 당장 해내야 하는 긴급한 보고들은 없을까?



실제로 빨라지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출근 후 30분동안 메일을 본 후에는

하루 종일 이리뛰고 저리뛰는 기진맥진한 생활이었다.




- 안되겠다. 이건 아닌거 같아.

   어떻게 살고 싶은지 아이디어는 없지만

   일단 이건 아니야. 뭐라도 해봐야겠어.



필라테스와 요가를 끊고 운동을 해보았다.

체력 강화와 몸매 관리를 위한 건설적인 목적이어서 그런지,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돈은 돈대로 들었다.



그러다 기억해 냈다.




- 맞다, 그림!




난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다.

꽤 잘 그리기도 했다.

전문적으로 집중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보이는 대로 그린 것이 꽤 근사한 적이 많았다.


그렇다해도 그냥 낙서 수준이고

예체능쪽은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내가 자신감을 갖게 해준 건

중 1 미술 선생님이었다.


아직도 그 날 교실이 생각난다.


짝꿍의 초상화 그리기를 했는데,

열심히 보고 그렸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물은

비율도 비례도 삐뚤빼뚤,

색깔도 채색도 엉망진창이라고 생각했다.

짝꿍은 눈을 흘기며,


- 야, 내가 이렇게 생겼어?


라고까지 했다.



우리 반에는 (어디에나 있듯)

얼굴도 쁘고 집도 부자에

공부도 잘해 무용도 잘해 미술도 잘하는 공주같은 애가 있었는데, 그 애가 초상화를 다 완성하기도 전에 주변에는 아이들이 모여들어


- 우와!! 진짜 잘 그린다~

- 완전 똑같애. 대단하다!

- 너무 이쁘다~


감탄하며 웅성거렸다.


그 애의 그림은 정말이지 어른이 그린 것처럼 완벽하고

눈코입의 비례, 색칠하는 기법까지 세련되고 치밀했다.


- 역시... 그림에 재능이 있는 사람은 다르구나.ㅠ



40분 정도가 지나고 선생님이 마무리 하는 시간이 되자, 선생님은 갑자기 내 스케치북을 가져가셨다.

그리고 그 애의 스케치북도 가져가셨다.


- 윽.... 공개적으로 비교되는 건가.


나는 얼굴이 벌써 빨개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 오늘 친구 얼굴 보고 그리기를 했어요.

자, 이 두 그림을 보세요.


내 짝꿍의 삐뚤빼뚤한 얼굴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 어떤 그림이 잘 그렸죠?


아이들은 공주아이의 그림이라고 소근소근 거렸다. 차마 큰 소리로 말하기에는 나에게 미안했던 것 같다.



그런데.



- 자, 이 얼굴은 배우 얼굴 같아요.

영화 포스터 속에 있는 가공된 얼굴.

사람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어요. 이 그림은, 코는 이렇게 그려야 하고 눈은 또 이렇게 그려야 한다는 방법대로 그린 그림이에요. 차 타고  지나가면서 영화관에 붙어있는 간판 본 적 있어요? 거기 배우 얼굴들 그린, 그 그림 같습니다.


그럼 이제 이 그림 보세요. 얼굴이 좌우가 다르죠?

눈도 짝짝이고. 사람 얼굴은 원래 비대칭이에요.

그리고 이 그림 보면 누군지 딱 알겠죠?

이 그림은, 보이는 대로 그린, 특징을 잘 표현한

아주 잘 그린 그림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내 그림이 공주의 그림보다 더 잘 그렸다니.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흥분으로 가슴이 뛰었다.

얼굴이 뜨거운 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다른 이유였다.

짝꿍은 나를 보며 활짝 웃어주었다.


슬쩍 공주의 얼굴을 보니 책상에 시선을 고정하고

원래도 흰 얼굴이 더 하얗게 질린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작 중1 아이들의 그림을 그렇게 공개석상에서 지적하고 평가하는 것이 맞았나, 싶기도 하지만

아직도 선명하게 보이는

그 날 내가 그린 친구의 얼굴과

선생님의 중저음 톤 칭찬은

지금까지 30여년 동안 내가 그림을 놓지 않게 한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서 검색을 시작했다.

이제 와서 입시 미술을 갈 것은 아니었고,

그림을 본격적으로 선긋기부터 배울 것도 아니었다.

선생님이 말하지 않았나.

좋은 그림은 기술을 쓰는게 아니라고.



오!

그런데  '취미 미술 화실' 이라는 곳이 있었다.


입시 미술도 아니고 학원도 아니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싶은 직장인

바쁜 일상 속에서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은 분'




바로 이거구나.



나는 바로 상담신청을 하고 미술 교육의 메카 홍대앞으로 갔다.

한 눈에 보기에도 한 평생 예술만 해온 것 같은

아름답고 여리여리한 원장샘이 물었다.



- 그림 배워본 적이 있으세요?

- 아니요. 그냥 어렸을 때 학원 다니고, 만화책 따라 그리고 한 게 전부에요.

- 아, 네~ 그럼 저희 선생님들하고 기초부터 해보시면 될 것 같고, 혹시 어떤 그림을 해보고 싶다 하는 거 있으세요?

- 음... 유화는 어려울 거 같구요, 스케치나 크로키 같은거 일단 해보고 생각해볼게요.

- 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부터 한 번 그려보세요.



이젤과 물감과 붓, 종이와 연필로 가득한 공간.

나는 얼룩덜룩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강사 선생님이 가져다준 화집을 뒤적거렸다.



- 뭘 그리면 좋을까...너무 어려운 건 안될 거 같고.



나는 원숭이와, 코끼리와, 독수리의 흑백사진을 보고

목탄을 가지고 스케치를 하기로 했다.

흑백이 주는 강렬한 대비가

목탄이라는 소재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목탄이 종이를 스치며 내는

석! 석! 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릴 때마다 살짝씩 떨어지는 목탄 가루도 좋았다.

정말 내가 뭔가 예술을 하는 것 같은 우쭐함도 들었달까.



처음 접하는 도구와 장소에 적응하는 시간이 지나고

온전히 원숭이 세 마리와

내 손에 쥐어진 목탄 조각만

이 지구에 존재하는 것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늘 티비를 10개는 틀어놓은 것 같았던 시끄럽고 혼란스럽던 머릿속에,

거짓말처럼 완전한 고요가 찾아왔다.



그 순간 내가 듣는 건

석, 석, 하는 목탄 소리.

사라락, 사라락, 가루가 떨어지는 소리.

탕, 탕, 종이를 터는 소리.


그리고 멀리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

옆 이젤에서 들리는 붓이 지나가는 소리.



나는 처음으로 '무아지경' 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머릿속을 뿌옇게 만들며 부유하던

알 수 없는 생각, 걱정, 고민들이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 투명함. 잔잔함.

평화로움.


그리고

내 머릿속에 산소가 들어오는 것이었다.


뇌가 어딘가  바늘구멍만큼이라도 열린 것인지

아니면 모공이라도 넓어진 건지

머릿속 정가운데부터 상쾌한 공기가 차오르며

몸 전체에 생기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순환, 환기, 호흡, 생명력,

에너지를 주는 모든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화실에서 나의 뇌가 호흡하는 것을 느끼고

나는 서른이 넘어서야,

나에게 진짜 필요한 것을 찾았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나의 진정한 휴식은 이것에 있다.

숙면, 여행, 쇼핑, 맛집보다

근본적으로 나를 쉬게하고, 엔돌핀이 돌게 하는

나를 새롭게 해주는 소위 '나의 취미' 는

그림이었구나.



그 날 나는 결심했다.


그림을 놓지 않겠다.


어떤 형태로든,

내가 어떤 상황이든,

꾸준히 그리고 그리고 또 그려야지.


그렇게 나의

꾸준하고

끈질긴

그림 사랑, 그림 놀이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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