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책

삶으로 다시 떠오르다

by 나로살다


그 책은 운명처럼 나에게 왔다.


동생과 고등학교 친구인 그녀는 내가 프랑스에 있을 때 동생과 함께 놀러왔었고 나는 숙식을 제공했을 뿐인데 너무 큰 위로가 되었다며 그 후에도 감사의 뜻을 종종 전하곤 했다. 원래도 정이 많고 열려있는 아이였다.

그녀는 은우의 일을 전해 듣고, 동생을 통해 작은 쇼핑백에 선물을 보내왔다.



"선물? 나한테?"

"응 언니~ ㄷㅈ이가 언니 힘내래~"

"어머 왠일이야~ 걔는 참.... 완전 고맙네...... 내가 카톡 보낼게~"


쇼핑백에는 두 아이를 위한 색연필과 토이 스토리 장난감,

그리고 그 책이 들어있었다.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책은 꽤 두껍고 요즘 책 답지 않게 일러스트도 없이 글자만 빼곡했다.

잠깐 한 두 줄 읽어본 느낌으로는 쉽게는 읽혀지지 않을 책이었지만,

역자가 류시화 라는 점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자신이 작가인 사람이 5년에 걸쳐서 작가와 수없이 대화를 나누며 번역한 책이라니. 그만한 가치가 있는 책일까. 라는 호기심도 발동했다.


시점 또한 공교롭게도 가장 긴장되고 두려웠던 1차 이식 대기 기간이었다. 물론 시간 나는대로 틈틈이 심리 상담을 하며 마음에 쌓이는 걱정과 불안, 우울감들을 해소하고는 있었지만 큰 치료를 앞두고 심난한 마음까지는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덤덤한 척 편안한 척 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동굴 아래로 흐르는 지하수처럼 어두운 감정들이 끊임없이 흘러갔다. 쳐지고, 다운되고, 기운얻을 곳이 없는 나날이었다.



"여보, 나 반신욕 좀 할께."

"응 그래~ 오래 해~"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30분만 몸을 담그기로 했다.

찬 물 한컵과 함께 그 책을 집어들었다.


'몇 장만 읽어볼까...책 읽은지도 진짜 오래됐네..;'



사실 책을 읽는데는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

소설이라면 작가가 꾸며놓은 가상의 세계에 기꺼이 입장할 여유.

자기계발 서적이라면 뭔가 건설적인 조언을 받아들이고 나자신을 돌아볼 여유.

시라면 풍부한 감성을 내 마음속에 가득 채울 여유.

명상 에세이라면 왠지 뻔한 얘기들일 것 같지만 그래도 건질게 있을까 생각하는 여유.

몇 달, 아니 몇 년간 그런 마음의 여유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책 가운데 아무 페이지나 펼쳤는데,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어떤 한 구절이 내 마음 속으로 푹 꽂히더니, 다음 순간 내 마음이 둥실 떠오르며 물 속에서 높이 솟아나와 잠겨있는 나를 내려다 보는 것 같았다.



자신 안에 불행이 있다면,
먼저 그 불행이 거기에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하지만 "나는 불행하다" 라고 말하지 말라.
불행은 당신 그 자체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내 안에 불행이 있다" 라고 말하라.
그런 다음 그것을 살펴보라.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내 아기가 아파서, 남편과 내 첫째 아기와 모두가 위태롭고 괴로운 나날인데, 그래서 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는데 이 불행이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니. 도대체 무슨 말이지?

의심스러웠지만 한 줄기 숨쉴 구멍을 찾은 동굴 속 조난자처럼 나는 다음 구절을 읽어나갔다.



불행의 주요 원인은 결코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을 알아차려야 한다.
생각을 상황으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
상황은 언제나 중립적이며, 언제나 있는 그대로이다.
반대편에는 상황이나 사실이 있고, 이쪽에는 그것에 대한 나의 생각들이 있다.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대신, 사실과 함께 머물도록 해야 한다.
이를테면 "나는 망했어"는 하나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당신을 한정 짓고 효과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 에크하르트 톨레



!!!!!!!!!

생각과 상황을 분리해야 한다.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대신 사실과 함께 머물어라.

이야기는 당신을 한정 짓는다.


그 순간, 내 마음 속으로 신선한 공기가 가득 들어찼다.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나는 크고 작은 상황을 기쁘고 슬픈 이야기로 만들어왔는지.

음모와 미움과 계산과 편견으로 얽히고 설킨 실타래 같은 생각으로 얼마나 많은 에너지와 감정을 소모해왔는지. 비단 은우의 일 뿐 아니라 평생을, 나는 이야기와 드라마 속에서 헤맸던 것 같다.

그런데 '분리하라'는 이 한 마디로 내 마음이 너무나 가뿐해졌다.


"나는 망했어" "내 인생은 불행해" 가 아니라, "내 안에 불행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내 안에 얼마나 큰 공간을 만들어주었는지!


반신욕 중 일어난 이 변화로, 나는 이 책을 이식방에 가져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무균실에서 은우와 있던 2주 반의 시간동안, 마음의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내 자신을 우울과 부정의 늪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이 책을 틈틈이 줄을 쳐가며 읽었다. 단 몇 단락밖에 못읽는 때도 있었지만 그곳에는 나를 살리는 글들이 있었다. 나에게는 인생의 항로를 바꾸게도 할만큼 커다란 깨우침이었다.



행복을 찾아다녀서는 안 된다.
찾아다닌다면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행복은 교묘히 달아나지만,
불행으로부터의 자유는 지금이라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대신
있는 그대로와 마주함으로써 가능하다.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 에크하르트 톨레



불행이라는 것은 나의 생각일 뿐이다.

생각을 사실과 분리하고 드라마를 만들어내지 말라.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받아들여라.


크고 작은 태풍과 폭풍이 몰아치던 내 마음은 그야말로 일순간에 고요해졌다.

물론 진단 초기에 이 책을 읽었다면 지금처럼 받아들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큰 충격에 제 정신을 차리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리고 기합을 넣고 치료를 시작한 지 6개월 넘는 시간동안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던 온갖 비극적인 드라마는 조금의 틈만 보이면 더욱더 극적인 효과를 대동해 내 마음을 공격해왔고, 그 때마다 나는 와르르 무너지거나,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써 외면하거나, 버티거나, 견뎌왔다.

그렇게 후들거리는 다리로 서있던 쇠약한 나였다.

그런데 그 책은 그 모든 태풍 폭풍 드라마를 한 방에 날려버리는 대형 토네이도였다.

토네이도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고요하고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내 마음속에는 어떠한 드라마도 막을 올리지 않았다.

어떠한 이야기도 시작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벌어지는 일을 마주하고, 받아들이고, 현재의 순간을 살며 웃고 울면 되는 것이었다.

평화란 그렇게 간단 명료한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지금 평화로울 수 있는가?
현재의 순간과 화해하는 것이다.
현재의 순간은 삶의 놀이가 일어나고 있는 장이다.
삶의 놀이는 다른 곳에서 펼쳐질 수 없다.
현재의 순간과 화해하면 무엇이 일어나는지 보라.
자신에게 무엇이 가능한지, 어떤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지를.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삶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하는지를.
삶의 예술에 대한 비밀, 모든 성공과 행복의 비밀을 전하는 단어가 있다.
'삶과 하나가 되기' 이다.
삶과 하나가 되는 것은 현재의 순간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자신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당신을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삶은 춤추는 자이고,
당신은 그 춤이다.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치료가 끝나고 몇 달 후, 면역이 많이 회복된 은우를 데리고 동생네 가족과 시간을 가졌다.

동생이 둘만 있을 때 조용히 말을 건넸다.


"언니, 예전의 노심초사하던 모습이 사라졌네."

"노심초사? 내가 그랬어?"

"응, 다같이 좋은 시간 보내고 있는데도 항상 뭔가에 쫒기는 것 같고, 뭔가가 불편해보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그 순간을 즐기는 것 같애."


그 날은 동생 말 대로 온전하게 아이들과 있는 순간에 몰입했던 것 같다.

그 전엔, 이 시간이 지나면 아이들 밥은 뭘 먹이지, 낮잠 시간이 지났는데 이대로 놀려도 되나? 남편은 어디 간거지? 어른들 저녁은 시켜먹어야 하나? 따위의 생각에 가득차 지금 그 순간에 있지 못했었다. 그래서 재밌게 놀고난 후에도 재밌다는 느낌보다는 너무너무 피곤하기만 했었다.


동생의 말대로 이제 나는 조금 변한 것 같다.

지금이 아닌 과거와 미래는 아무 의미가 없다.

지금 이 순간과 화해하고,

지금 이 순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번 더 안아주자.

그렇게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완전히 그 기쁨을 누리자.


나의 삶은 결국, 그 짧은 순간들이 모이고 모인 것이다.


삶이 기쁜 나를 살도록,

멋지고 평화로운 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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