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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진호 Feb 18. 2022

어떤 이상한 사랑의 기록

집을 지었다, 그녀가


내 마음속 깊은 곳

비바람에도 천둥 번개에도 쓰러지지 않는

튼튼한 집 하나


문도 없고, 창은 단 하나

바다로 난


그 속에서 일어나고 잠을 잤다

동굴 같은 어둠 속

때로는 바다 을처럼 스며들던 창가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아침 같은 창 가에 앉아

샴푸 냄새 배인 편지를 쓰는 것


편지를 썼다.

때로는 "사랑하는 그대에게"로 시작했고

때로는 "보고 싶은 그대에게"로 시작했다

그렇게 쓴 편지 보내지 않아도 괜찮았다

어쩌면...

보내지 않은 게 아니라

보낼 수 없었다는 것이 맞겠다

애초에 수신인은 없었으니까


내 마음속에 집 지어준

그녀


바람 따라 계절이 갔고 또 왔다

밤이 될 때까지 끝내지 못한

그래서 밤들이 먹물처럼  편지들은

서랍에쌓여갔다

날개가 없으니 날아가지 못하고

가끔은 꽃으로 피어났다


꼭꼭 눌러쓴 글자들은 구슬이 되

억의 홈을 따라 구르다가

덜컹, 멈추면

삼백육십 다섯 개 풀잎에 밴 상처들

소리 없이 일렁였다, 

유년의 깊은 바다 해초처럼


연산동은 가끔 진흙밭이었고

일청담은 언제나 얼어있었다


다망구 끝 가쁜 숨 몰아쉬며

잠시 등 기대어 쉬던 남부탕 옆,

좁은 골목을 따라 흐르던 기억들은

모래내, 발산동을 거쳐

알깔라 데 에나레스(Alcala de Henares)까지 닿았다

그곳에서 혼자 마시던 마오우(Mahou) 맥주

중국집 싸구려 수프


지금도 기억난다

열 개의 꽃잎 같은 팬티가 걸려있던

중세 기도원 같은 거실 있던

집으로 돌아오면

아마랄(Amaral)의 음악이 흘러나오던 방이 있었


이들 다 클럽 가 버린

금요일이나 토요일 밤

저주파만 남은 클럽의 웅웅 거림이

혼자 남은 방

모든 상념을 덮어버렸다


일요일 아침은

기름 뚝뚝 흘리며 매달린 채 돌아가는

구릿빛 통닭들과 함께 왔다

간밤의 기억은 여전히 술병 갇혀있었고

아침보다 늦게 내려앉는 봄볕의 끝에

잠깐씩 그녀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언제나 그랬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건

그렇게 잠깐이었다

플로리다 블랑까(Florida Blanca) 극장 F열 4번

어떤 추억들이 갑자기 날아와

스크린에 투영되기도 하고


사월에도 그랬고

시월에도 그랬다

미소 뒤의 무표정

무표정 뒤의


뒤 편에

이제는 냄새로만 남은

어떤 이상한.

이상한 사랑의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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