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지었다, 그녀가
내 마음속 깊은 곳
비바람에도 천둥 번개에도 쓰러지지 않는
튼튼한 집 하나
문도 없고, 창은 단 하나
바다로 난
그 속에서 일어나고 잠을 잤다
동굴 같은 어둠 속
때로는 바다가 노을처럼 스며들던 창가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아침 같은 창 가에 앉아
샴푸 냄새 배인 편지를 쓰는 것
편지를 썼다.
때로는 "사랑하는 그대에게"로 시작했고
때로는 "보고 싶은 그대에게"로 시작했다
그렇게 쓴 편지 보내지 않아도 괜찮았다
어쩌면...
보내지 않은 게 아니라
보낼 수 없었다는 것이 맞겠다
애초에 수신인은 없었으니까
내 마음속에 집 지어준
그녀
바람 따라 계절이 갔고 또 왔다
밤이 될 때까지 끝내지 못한
그래서 밤들이 먹물처럼 스민 편지들은
서랍에서 쌓여갔다
날개가 없으니 날아가지 못하고
가끔은 꽃으로 피어났다
꼭꼭 눌러쓴 글자들은 구슬이 되어
기억의 홈을 따라 구르다가
덜컹, 멈추면
삼백육십 다섯 개 풀잎에 밴 상처들이
소리 없이 일렁였다,
유년의 깊은 바다 해초처럼
연산동은 가끔 진흙밭이었고
일청담은 언제나 얼어있었다
다망구 끝 가쁜 숨 몰아쉬며
잠시 등 기대어 쉬던 남부탕 옆,
좁은 골목을 따라 흐르던 기억들은
모래내, 발산동을 거쳐
알깔라 데 에나레스(Alcala de Henares)까지 닿았다
그곳에서 혼자 마시던 마오우(Mahou) 맥주
중국집 싸구려 수프
지금도 기억난다
열 개의 꽃잎 같은 팬티가 걸려있던
중세 기도원 같은 거실이 있던
집으로 돌아오면
아마랄(Amaral)의 음악이 흘러나오던 방이 있었는데
아이들 다 클럽 가 버린
금요일이나 토요일 밤엔
저주파만 남은 클럽의 웅웅 거림이
혼자 남은 방
모든 상념을 덮어버렸다
일요일 아침은
기름 뚝뚝 흘리며 매달린 채 돌아가는
구릿빛 통닭들과 함께 왔다
간밤의 기억은 여전히 술병에 갇혀있었고
아침보다 늦게 내려앉는 봄볕의 끝에
잠깐씩 그녀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언제나 그랬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건
그렇게 잠깐이었다
플로리다 블랑까(Florida Blanca) 극장 F열 4번
어떤 추억들이 갑자기 날아와
스크린에 투영되기도 하고
사월에도 그랬고
시월에도 그랬다
미소 뒤의 무표정
무표정 뒤의 미소
그 뒤 편에
이제는 냄새로만 남은
어떤 이상한.
이상한 사랑의 기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