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작품인« 토끼와 용왕/ Le lièvre et le roi dragon »이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2010년에 빛을 보았고, 이를 출발점으로 같은 해에 진주 시리즈의 첫 두 권이 나왔다. 그런데 아쉽게도 나는 엘렌 씨와 오래 작업을 함께하지 못했다. 2010년, 그러니까 합류한 지 거의 2년 만에 아마도 소속 그룹과의 갈등 때문인지 엘렌 씨는 나와 함께 계획한 모든 프로젝트들이 실현되는 꿈을 보지 못한 채 찬옥 출판사를 떠나야만 했다.
엘렌 씨는 떠났지만 다행스럽게도 플라마리옹 출판사는 찬옥 라벨을 닫지 않고 한국 문학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엘렌 씨가 시작한 모든 계획들을 꾸준히 실현시켜 나갔다. 그룹 내의 아동문학 책임자인 베네딕트 씨가 찬옥 출판사의 컬렉션들을 맡아 계속 이끌어 나가게 되면서, 2011부터 2012년까지 나는 « 기적의 샘물/ La fontaine aux miracles » 과 진주 시리즈의 나머지 네 권을 연달아 찬옥-플라마리옹 출판사에서 내게 되었다. 그런데 2013년, « 콩쥐, 또 다른 신데렐라/ Kongjwi, l’autre Cendrillon »는 베네딕트 씨의 권유로 찬옥 출판사가 아닌 플라마리옹 그룹 내의 아동문학 컬렉션인 뻬르 카스토르(Père Castor)에서 출간되었다. 아무래도 이름이 높은 뻬르 카스토르 컬렉션에서 내는 것이 판매 부수를 높인다는 것의 그녀의 견해였다.
같은 해에 이중 언어를 전문으로 내는 한 출판사에서 연락이 와서 내가 써놓은 옛 구전 동화 세편을 모아« 용녀/ La femme-dragon »라는 타이틀로 불한판으로 내기도 했다.
이렇게 나의 창작품을 꾸준히 내는 동시에 나는 찬옥 라벨에서 출간하는 한국 아동 소설 및 그림 앨범 번역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베네딕트 씨의 부탁으로 그녀가 작품 선정을 할 수 있도록 한국 작품들의 독서 브리핑도 열심히 해주면서.
플라마리옹에서는 또 찬옥 라벨의 범위를 아시아 문학으로 확장시켜 계속 키워보려는 의지로 베네딕트 씨가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도서전에도 다녀왔고 미국의 한국계 작가의 작품에도 관심을 가지고 출간해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러한 여러 가지 시도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업적 성과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게 되니 자연적으로 찬옥 라벨에 대한 흥미를 잃어갔고, 2014년부터는 이 컬렉션에서의 작품 출간이 거의 중단된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찬옥 출판사가 좀 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문을 닫은 건 나에게도, 한국 문학을 위해서도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2010년에서 2013년까지 약 4년간 그 출판사와 함께한 나의 아름다운 모험은 영원히 내 가슴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이 4년간 나는 번역 작품이 아닌 내가 쓴 작품으로 여러 도서전 및 초등학교에 초청받아 가서 꼬마 학생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내 작품들이 한국, 스페인, 터키어권에 번역 소개된다는 기쁜 소식을 접하게 된 것 또한 이 시기였다. 한마디로 이 4년은 작가로서의 내 삶의 최전성기를 누린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찬옥 출판사의 활동 중지와 더불어 나의 작품 활동도 주춤하게 되었다. 처음 얼마간은 작품을 써서 베네딕트 씨에게 보내봤지만 몇 번 거절을 당하면서 내 작품을 출간해줄 출판사가 없다고 생각하자 동기 부여가 저하되고 창작 의욕이 떨어졌다. 다른 출판사들에 원고를 보내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 출판사를 찾는 일이란 하늘에 별따기만큼이나 힘든 과정임을 나는 이미 경험으로 깨달은 바가 있었다. 어쩌면 작가로서의 내 재능에 한계를 느꼈을지도 모르겠고 마침 번역 일거리도 점차 늘어나게 되어 나는 몇 년간 글쓰기 작업에 손을 놓고 있었다.
그런데 2016년 2월, 한국 거제도의 조선소 사업에 관여한 여러 프랑스 회사 지사들의 직원 자녀들을 위해 옥포에 세운 프랑스 학교에서 진주 시리즈를 쓴 나와 이 작품의 그림을 그린 삽화가인 아멜리 씨를 각각 일주일간 초청했다. 나는 흔쾌히 승낙하고 일주일간 거제도의 고급 호텔에 머물면서 학교까지 걸어서 출퇴근했다. 이 학교는 유치원에서 고등학교 1학년 반까지 있었는데, 나는 진주 시리즈 여섯 권과 콩쥐 이야기를 가지고 4-5세 아동은 물론 고등학생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가장 인상 깊게 남은 것은 초등학교 4-5학년을 담당한 한 부부교사의 교육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었다. 우리의 초청 건도 아마 그 부부 교사의 아이디어라고 생각된다. 그들은 나의 작품들에 대해서 학생들과 열심히 공부했고, 그래서인지 내가 교실에 들어섰을 때 학생들은 나에게 질문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프랑스 학교의 순례를 통해서 얻은 경험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이런 분위기에서 학생들과의 대화는 내게 즐거움을 배가했는데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거제도 옥포의 프랑스 학교의 초청건은 내게 새로운 영감과 쓰고 싶은 충동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글을 쓰고자 하는 내 욕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 내면의 어딘가에서 수면상태에 있었을 뿐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또 여러 작품을 썼고, 그중 한편은 한 출판사의 출간 승낙을 받았는데 아쉽게도 관련 출판사의 정책 변화에 따라 지금으로선 프로젝트가 흐지부지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반면 진주 시리즈의 맥락을 이어서 여전히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적인 차이를 테마로 창작한 4권짜리 단비 시리즈는 리옹에 있는 한 작은 출판사에 힘입어 그 첫 권이 불어와 영어의 이중 언어로 2021년 5월에 빛을 보았다.
내 창작 의욕이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그 불씨가 내 가슴속에 살아 있는 한 아마도 나는 계속해서 글을 쓸 것이다. 불어로든 모국어로든. 이제 나이가 나이인 만큼 반드시 출판해야 한다는 집착에서도 어느 정도 해방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생에서 작가가 되는 꿈은 틀렸다고 생각했었는데 찬옥 출판사와의 좋은 인연으로 인해 4년간 작가로서의 행복한 삶을 누렸으니 그것으로도 이미 충만하고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니 앞으로 나의 글쓰기는 출판되면 좋지만 안되어도 상관없다는 좀 더 느긋한 마음으로 순전히 즐겁고 행복해지기 위한 작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