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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이 Feb 15. 2022

뚤루즈행 기차에서 만난 어떤 할아버지

DEA 논문을 통과 한 후 며칠을 심하게 앓고 일어나니 마치 새로 태어나기라도 한 듯 산뜻한 기분이 들었다. 일 년간 고생해 온 보람을 한꺼번에 느끼는 마음 뿌듯함과 학업의 첫 단계 옷을 벗었다는 해방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래서였는지 그간 낯선 이국 땅, 파리에서 겪은 이런저런 울지도 웃지도 못할 숱한 체험과 에피소드들을 누군가 마음 편한 사람과 밤을 지새우며 구수한 내 나라 말로 실컷 수다를 떨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계절은 어느 듯 늦가을을 지나 초겨울에 접어들고 있었다.

마침 뚤루즈(Toulouse)에서 공부하고 있는 친구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녀는 다름 아닌 바로 나와 함께 프랑스 땅을 밟은 내 유학 동기생 G였다. 그녀와 헤어진 지도 벌써 1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내 전화를 받은 그녀는 나의 방문 제의를 무척 반기며 쾌히 승낙했다. 서둘러 여행 준비를 해서 다음날 아침 일찍 기차에 올랐다. 파리에서 뚤루즈까지는 고속 열차가 없었던 당시에는 7시간이나 가야 하는 꽤 긴 여행이었다. 

내 좌석 번호는 칸막이화 되어 있는 한 작은 밀실 안의 좌석들 중의 하나로 차 창가에 위치해 있었다. 이 작은 밀실에는 각각 네 개의 좌석들이 서로 마주 보고 있었는데, 내가 좌석 번호를 찾아 밀실의 문을 열었을 때는 이미 세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들은 나의 동양 얼굴이 뜻밖이었는지 일제히 의문의 시각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만 해도 아직 불어에 능숙하지 못했던 나는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 내 좌석 번호를 불러주며 맞느냐고 물었다. 매우 상냥하고 친절하게 그들은 맞다고 일제히 합창했다. 

나는 가방을 위에 올리고 창가인 나의 좌석에 자리해 앉았다. 내 맞은편에는 오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곱게 늙은 고상한 차림을 한 부인이 책을 보고 있었다. 내 옆 좌석에는 아프리카의 어느 한 나라에서 온 듯한 덩치가 꽤 큰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흑인 남자가 앉았고, 그 옆에는 사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미남형으로 생긴 프랑스 남자가 자리해 있었다. 이 프랑스인은 내가 밀실의 문을 열었을 때부터 나의 동양 얼굴에 호기심을 가진 듯한 눈빛을 보였고, 내가 자리를 잡아 앉은 후에도 나에게 뭔가 말을 걸고 싶은 듯 힐끔힐끔 내쪽을 엿보는 듯했다. 나 역시 불어 실력을 향상하기 위해서도 또한 프랑스를 좀 더 알기 위해서도 프랑스인들을 만나면 그들과 대화하고픈 욕구와 의욕은 늘 가득했다. 그러나 나의 지나친 소심증과 조심성으로 인해 그들이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입을 굳게 다물어 버리고 마는 나였다.  

그 상황에서도 역시 예외 아니게 그 프랑스인의 대화하고 싶어 하는 의도를 알아차렸으면서도 나는 끝내 그것을 돕지 못했다. 돕기는커녕 오히려 모른 체 하면서 책을 꺼내어 거기에 몰두하는 듯한 어처구니없는 태도를 보이는 나였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프랑스 사회를 사는 그로서는 절대 타인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조심성 때문에 좀 전의 대화하고자 했던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 버렸을 것이었다. 

밀실은 갑자기 고요와 적막함에 휩싸였다. 너무나 적막해서 옆에서 숨 쉬는 소리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내 의식은 상황의 노예가 되어 옆에서 들리는 숨소리를 듣자니 나의 숨소리 또한 들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숨쉬기조차 거북스러웠고 어색했다. 나는 점차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책에 눈을 고정시키긴 했지만 읽은 글은 머리에 들어올 리 없고 내 생각은 오직 어떻게 하면 숨쉬기조차 거북한 이 적막의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하는 궁리뿐이었다.

때마침 열차가 어느 도시에 정차를 했고 다시 행진을 할 무렵 누군가가 이 밀실의 문을 열었다. 6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꽤나 고생을 한 듯, 주름투성이의 얼굴을 한 할아버지가 몇 가지 올망졸망한 짐들을 일부는 어깨에 일부는 두 손에 들고 자기 좌석번호를 찾으려는 듯 밀실 안에 머리를 내밀며 두리번거렸다. 그는 이내 자신의 좌석을 확인하고 밀실 안으로 들어와 프랑스 중년 신사 자리 맞은편에 짐을 풀며 앉았다. 이미 착석해 있는 우리들은 고개를 들어 겨우 눈인사만 했을 뿐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이 없었다. 

할아버지의 짐 내리는 소리와 그들을 정리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잠시간 적막을 깨뜨렸을 뿐 우리 밀실은 또다시 고요와 침묵에 휩싸였다. 나와 더불어 다른 사람들은 신문 잡지나 책을 보는 듯했는데 내가 한번 힐끔 쳐다본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짐들을 정리한 후 밀실을 한번 휙 둘러보고는 이내 그의 눈길을 허공에 고정시켰다. 이렇게 침묵은 계속되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오가 되자 할아버지는 준비해온 점심 도시락을 풀면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밀실의 침묵을 깨기에 충분했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없이 자신이 챙겨 온 계란을 까서 먹더니 그다음은 빵에다 치즈를 바르고 햄을 넣어서 먹기 시작했다. 갑자기 밀실은 그의 음식 삼키는 소리와 짭짭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아무도 그에게 “맛있게 드세요”라는 겉 인사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런 겉 인사라도 한 마디씩 했던들 우리 밀실의 분위기는 훨씬 가벼워졌을 텐데......

조금 전엔 숨소리까지 들릴 지경의 적막함에 견디기 힘들더니만, 이젠 또 그 적막함을 깨는 유일한 소리, 할아버지의 짭짭거리는 소리, 음식 삼키는 소리들이 이전보다 훨씬 더 나를 거북스럽게 만들었다. 또다시 진땀이 나기 시작했고 왠지 모를 인간의 원초적 부끄러움 같은 것으로 내 몸이 오싹해졌다. 그것은 마치 대중 앞에 발가벗겨진 알몸으로 나서는 것과 같은 부끄러움이었다. 먹고 있지 않는 나 자신도 이토록 이유 모를 부끄러움으로 몸이 오싹한데, 이 여러 사람들의 침묵 앞에 혼자서 소리를 내며 식사하시는 저 할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하실까? 내가 느끼는 이 거북함을 그 역시 느끼는 걸까? 소화는 과연 잘 되실까? 등등의 생각을 하면서 이 거북스러운 분위기를 깨기 위해서 그리고 저 할아버지의 식사 소리를 무마시키기 위해서 뭔가 화젯거리를 끌어내어 사람들과 대화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은데 불행히도 그것은 마음뿐 그럴 용기와 배짱이 나에겐 없었다.

어느덧 할아버지의 점심 식사가 거의 끝난 듯이 보였다. 그러자 나의 맞은편에 앉은 부인이 그녀의 점심 도시락을 풀었고 뒤이어 나의 옆 좌석에 앉은 두 남자도 각자 가지고 온 점심을 꺼내기 위해 뒤적거리고 있었다. 나 역시 조금 전의 할아버지와 같은 고행을 치르지 않기 위해서도 그들과 얼른 동조해서 가지고 온 과일과 요구르트를 점심으로 때웠다. 식사 도중인 우리도 식사를 끝낸 그 할아버지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먹기만 했을 뿐이었다.  

한참 후 기차는 또 어느 도시엔가 서는 듯했고 내리는 사람과 타는 사람을 교차한 후 또다시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우리의 밀실은 또 하나의 승객 방문을 받았다. 매우 퉁퉁하게 생긴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프랑스 남자였다. 그는 할아버지의 옆 좌석에 그의 좌석 번호를 확인하며 앉았다. 그런데 여태껏 미련한 곰처럼 침묵만을 고집해온 우리 밀실의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앉자마자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느 도시에서 오느냐? 어느 도시로 가느냐?” 에서부터 시작했다. 그의 간단한 이 몇 가지 질문들에 할아버지는 너무나 반가웠는지 갑자기 흥을 내기 시작했다. 간단히 묻는 질문들에 비해 그의 대답은 확장되기 시작하더니만 나중에는 그의 살아온 과정들까지도 낱낱이 고백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는 끊일 줄 모르고 계속되었고, 그 밀실에서는 나와 나의 맞은편에 앉은 부인만 책에 몰두한답시고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은 듯한 태도를 취했고 다른 세 남자들 모두가 할아버지의 말에 관심을 보이며 듣고 있었다. 두 관중을 더 얻어서였는지 할아버지는 점점 더 신이 나서 목청을 더욱더 올리기 시작했고 나중엔 일어나서 흉내까지 내는 코미디까지 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담은 끝이 없었다. 무궁무진하게 할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몸짓으로 흉내까지 내고 웃고 말하기는 그의 목적지에 다다라서 내리기 일보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나는 책을 읽는 듯하면서도 그의 지나치게 높은 음성 때문에 가끔씩 고개를 들고 그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까처럼 거북스러운 분위기가 아니어서 좋았고, 사실상, 나는 책을 읽는 척만 했지 비록 백 퍼센트 다 알아듣지 못한 불어였지만 어느 듯 그의 인생담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고개를 들 때마다 열변을 토하는 그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치면 엷은 미소를 보내곤 했다.

나는 읽고 있던 책에 더 이상 신경 쓰기를 그만두고 이상한 의문에 잠겼다. 이상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조용하셨던 할아버지가, 말 한마디 없이 그 침묵의 곤혹스러운 분위기에서 식사하셨던 할아버지가 어떻게 저렇게 갑자기 봇물이 터진 것처럼 많은 말들을 쏟아 낼까? 저렇게 할 말이 많으셨으면서, 아니 저토록 말이 하고 싶으셨으면서 왜 조금 전엔 그토록 거북스럽기까지 했던  침묵을 고집했을까?

몇 시간이나 계속해서 쏟아내는 그의 말들은 나중에는 별다른 내용도 아니었다. 이제 밑천도 다 떨어져 할 말도 없을 것 같은데도 그의 입담은 계속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내용 전달이 아니라 말을 하기 위한 말인 것 같았다. 나는 또 의문에 잠겼다. 저토록 말이 하고 싶을까? 별 내용도 아닌 걸 가지고 저렇게 열심히 이야기하고파 하는 저 할아버지의 심사는 무엇일까?

그러나 이 의문은 곧 풀리고 말았다. 그의 목적지인 한 도시에서 기차가 정지했을 때 그는 서둘러 짐들을 챙겨 들고는, “ 부인 그리고 아가씨, 제가 지금까지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 죄송합니다. 사실상 나는 한 달 동안 사람 구경을 못했다오. 얼마 전에 아내를 잃고 고립된 집에서 혼자 살다가 이렇게 직장을 찾아서 다른 도시로 가는 중이었소. 나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오.” 하면서 그는 모두에게 작별을 고하고 기차에서 내렸다. 그가 내린 뒤, 아, 그랬었구나 하면서 나는 긴 한숨을 내 쉬었다. 그것은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프랑스 사회에 대한 깊은 혐오의 한숨이었다.

처음 프랑스 땅에 발을 딛기 시작하면서부터 1년간 몸으로 체험해 온 파리 생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처음엔 문화와 전통, 풍경과 풍습이 다른 낯선 사회, 그랬기에 모든 것이 신기했고 새로웠다. 그러나 시간이 점차 흘러감에 따라 프랑스 사회, 아니 적어도 내가 일 년간 누비고 다녔던 파리 사회의 삶의 정체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나를 가장 철저한 이방인으로 느끼게 했던 것은 바로 개인주의. 

내가 파리에 와서 본 이 개인주의는 때로 너무 지나쳐 종종 이기주의와 무관심으로 보였다. 내가 다니던 대학가에서든,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든, 또한 길거리 어디에서든 타인들에 대한 호감이나 친절함 등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제각기 바빴고 그래서였던지 자기가 해야 할 일, 자기가 가야 할 길에만 관심을 집중시켰다. 자신과 직접적 이해관계에 놓여있지 않는 이상 거기에는 관심을 기울일 필요도 없거니와 또 그렇게 하는 것은 타인들을 귀찮게 하거나 방해한다고까지 생각하는 그들이었다.

« 불어 »라는 언어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 나는 대학가에서 프랑스인 친구들을 사귀고 싶어 했다. 처음엔 그것이 쉽게 이루어지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수업 시간이면 늘 프랑스인들로 보이는 학생들 옆에 자리해 앉곤 했고 그들에게 서투른 불어로 말을 걸기도 했다. 한 번은 한 프랑스 여학생과 말을 주고받고 각자 자기소개까지 하고 헤어졌는데, 그다음 날이었다. 나는 내가 어제 강의실에서 말을 걸었던 바로 그 학생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인사를 했다. 어제처럼 또 대화를 나누고 좀 더 친해지기를 기대하면서. 애석하게도 그에 대한 나의 이런 특별한 마음은 한순간에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녀는 나의 존재에 완전한 무관심을 보였다. 분명히 어제 함께 대화를 나눈 그 여학생이었는데 그녀는 전혀 그런 적이 없었던 듯 나의 인사도 받아 주지 않은 채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마치 어떤 큰 망치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이 띵했다. 그리고 허탈했다. 나는 이런 일들을 몇 번 겪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그렇게 정신 차린 나는 오히려 갈등과, 회의, 두려움, 혐오감으로 갈피를 못 잡았다. 앞으로 어떻게 이 무관심의 사회에 적응해 나가야 하나. 한동안 나는 사람들의 이 철저한 무관심에 깊이깊이 몸살을 앓았다.

여전히 이 몸살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채 나는 이 열차에 올랐고, 그랬기에 그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은 나의 가슴에 깊숙이 와닿았다. 갑자기 코끝이 찡해 왔다. 가엾은 할아버지, 철저한 개인주의와 무관심의 사회 속에서 몸살을 앓으셨던 분, 그래서 그 몸살을 떨쳐 내고자 그토록 쉴 새 없이 열변을 토해 내셨던 분. 아, 얼마나 사람의 정이 그리웠길래, 얼마나 사람과의 대화가 그리웠길래......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그토록 오랫동안 뿌리박고 살아온 자신의 나라인 이 프랑스 땅에서 한 달간이나 기나긴 지옥 같은 적막함을 깨뜨려 줄 가족이나 친구, 아니면 하다못해 아는 이 하나 없었단 말인가. 조금 전에 책을 덮고 할아버지 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말에 완전히 귀 기울이고 동조해 주지 못한 나 자신의 소심함이 자못 한탄스럽기만 했다. 

그토록 사람과의 대화가 그리웠으면서도 그는 왜 처음부터 지옥 같은 침묵을 지켰을까? 그의 점심 식사를 그토록 거북하게 만든 그 침묵의 지옥을 그는 왜 탈출할 수 없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타인을 방해할까 봐 두려워하는 지나친 조심성과 말을 먼저 꺼냈을 때 아무도 귀 기울여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무관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게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를 비롯해서 그 밀실에 있었던 사람들 모두가 이와 똑같은 생각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우린 처음부터 그 지겹고 무거운 침묵의 분위기를 견디어 내어야만 했던 것이다. 서로가 대화하고픈 비수를 가슴 깊숙이 꽂아 놓고서는 말이다.

그 고독한 할아버지는 우리 밀실에 조그만 대화의 문을 열어주고 떠났다. 대화를 하는 우리는 아까처럼 서로의 존재가 거북스럽게 느껴지지 않았고, 반대로 서로의 존재가 아름답게 보였고 거기에는 웃음과 인간적 훈훈함이 있었다. 그렇다, 인간의 모임에는 대화가 있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줄 때만이 사는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과 기쁨은 사람과의 만남과 관계에서 온다는 내 나름대로의 진리를 다시 한번 절감했다. 혼자이어서는 결코 사는 행복과 기쁨이 없을 것이다. 오랜만에 사람과의 대화를 나누면서 그토록 기뻐하시던 그 고독한 할아버지의 얼굴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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