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이 씨 왕조시대 때 일어난 일이다.
김진은 전라도를 한 바퀴 두루 돌고 난 후 구송이라는 한 마을에 닿았다. 양반이지만 가난한 집안 자식이라 조촐한 행색이었다. 그렇지만 건장한 몸매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김진은 여러 번 과거시험을 치렀지만,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불구하고, 매번 낙방했다. 네 번째로 실패했을 때, 정신과 육체가 피곤해진 그는 머리도 식히고 자신에게 새로운 의지와 용기도 불어넣을 겸해서 얼마간 발길이 닿는 대로 정처 없는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구송이라는 마을은 호수처럼 고요한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작은 바위섬들이 푸른 물 위로 여기저기 수놓은 듯했다. 아, 정말 장관이구나! 김진은 감탄했다. 이 지방에 대해서 익히 말을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던 것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그는 끝없이 펼쳐지는 해변을 따라 걸었다. “이토록 공기가 맑다니! 아, 정말 상쾌한 기분이군! 여기서 며칠만 지내면 내 모든 걱정거리들을 씻은 듯 잊고 뭔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구나.” 김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발아래 밟히는 하얀 모래, 평화롭게 찰랑거리는 푸른 물결, 신기한 모양들의 바위…… 끊임없이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하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보니 마을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갔고,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는 구송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길을 돌리는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장대 같은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지 않은가.
— 오, 이런 낭패가 있나! 옷이 금방 다 젖어 버리겠는데!
그는 비를 피할 곳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서 빨리 은신처를 찾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옷이 흠뻑 젖을 것이고 그런 차림으로는 누구에게도 감히 나서서 하룻밤 신세 좀 지자고 청할 엄두가 나지 않을 터였다. 양반 가문 자식으로서 그것은 체면을 잃는 일이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는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외딴 초가집을 발견했고 그리로 뛰어갔다. 그리고 나뭇가지로 된 대문을 열고 들어가 처마 아래에서 비를 그었다. 집은 마루와 단칸방 하나로 된 구조였다. 김진은 주인을 불렀다.
— 실례합니다. 누가 계십니까?
방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한 여인이 나타났다. 젊고 기막히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낯선 사내를 보자 여인은 놀라서 움츠러든 듯했으나 잠시 후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
— 갑자기 비를 맞았군요. 개의치 마시고 소나기가 그칠 때까지만이라도 마루에 올라와 잠시 쉬시지요.
여인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우수가 깃들어 보였다. 적어도 청년이 보기에는 그랬다.
— 다른 식구들은 안 계시오?
김진이 마루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가족이 없습니다. 저 혼자 이 집에서 살고 있어요.
여인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외딴집에서 혼자…… 김진은 도저히 믿기 어려워 잠시 멍해 있었다. 그러다가 호기심이 발동해서 물었다.
—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해서 마을과 멀리 떨어진 이 외딴집에 혼자 살고 있는지요?
여인은 여전히 방 문지방 안쪽에 앉은 채 한참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북받치는 설움을 삼키는 것 같기도 했고, 대답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것 같기도 했다.
—실례가 되셨다면 용서하시오. 굳이 대답을 안 하셔도 됩니다.
김진이 미안해하며 사과를 하자 여인은 결국 결심을 한 듯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 결혼 일 년째 제 남편을 여읜 후 더 이상 삶에 낙을 붙일 수가 없었고 세상을 등지고 싶었지요. 하여 제가 살던 마을을 떠나 이곳 초가집에서 은신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아주 명랑한 아이였고 결혼해서는 제 남편과 너무도 행복한 삶을 누렸지요. 그런데 불행히도 그 행복은 너무 짧았습니다……
김진은 이렇게 매혹적인 여인이 세상과 단절하고 혼자 사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워 보였고 여인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하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겨우 이렇게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군요.
김진은 눈을 하늘에 박은 채 비가 그치기를 학수고대했다. 하지만 소나기는 계속 퍼부었고 해는 이미 저버렸다. 어둠이 점차 집을 덮쳤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넋두리를 했다.
— 그 참 끈질긴 소나기군! 아까 전 보다 훨씬 더 세차게 내리네.
여인은 방에서 바느질을 하다가 가끔씩 밖으로 눈길을 던졌다.
—아이고 이를 어쩐다? 벌써 어둠이 내려앉아 버렸네. 하룻밤 쉬어갈 방을 구해야 하는데…… 이 폭우에 어떻게 마을로 돌아가지?
청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인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한동안 두 사람사이에 흘렀다. 어색한 표정이 젊은 과부의 얼굴에 어리더니 이윽고 다음과 같은 제의를 했다.
—제 집이 비록 누추하지만, 손님이 원하신다면 여기서 밤을 지내고 가십시오. 이렇게 쏟아지는 비에 손님을 내보낼 수는 없지요. 게다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어서……
김진은 놀라고 당황스러워 얼굴을 붉혔다.
—제가 보기에…… 이 집엔 방이 한 칸뿐인 것 같소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들어오세요. 저는 부엌에서 자면 되니까요.
여인이 말했다.
—아닙니다. 부인이 허락하신다면 제가 이 마루에서 밤을 지내겠습니다.
—비가 와서 날씨가 매우 습하고 춥습니다. 손님을 밖에 두고서는 제 마음이 편치 않아요. 제가 말한 대로 하십시오.
김진은 다시 단호하게 거절했다.
— 아니,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지나가는 나그네가 안주인을 내쫓고 방에서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당치도 않는 말씀입니다.
두 사람 모두 일보도 양보하길 원치 않아, 그들은 오랫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청년이 타협점을 제의했다.
— 남녀가 한 방에 머무는 것은 관습상 금지된 일이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이러하니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부인은 방 아랫목에 저는 윗목에서 자도록 합시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 가장 나은 해결책인 것 같습니다.
— 손님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셔야지요. 그래야만 제 마음이 편할 테니까요.
— 아닙니다. 부인을 차가운 방바닥에서 자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저를 방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한 것 만도 이미 크게 신세 진 일인데요.
— 손님이 그렇게 고집부리신다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군요. 제가 부엌에서 밤을 보내겠습니다.
여인이 단호하게 선언했다. 이 완강함 앞에 김진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멍하게 있다가 대답했다.
— 좋습니다. 부인이 이겼습니다. 부인도 나만큼이나 고집이 세군요.
일단 문제가 해결되자, 여인은 저녁을 지으러 부엌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밥 한 공기와 몇 가지 반찬을 차린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 별로 차린 것은 없지만 맛있게 드십시오.
여인이 밥상을 김진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
여인이 곧 다시 나가려고 하는데 김진이 불러 세웠다.
— 저에게는 이미 과분한 식사입니다…… 그런데 왜 밥공기가 하나뿐이지요? 부인은 식사를 드시지 않으세요?
— 저는 부엌에서 먹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음식이 식기 전에 어서 드시지요.
— 부인의 밥공기도 이리로 가지고 와서 함께 식사를 하십시다. 부인을 부엌에 둔 채 저 혼자 방에서 식사를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 저는 괜찮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김진이 잡았던 수저를 놓고 이번에야말로 양보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밥상을 밀었다. 아무래도 그의 생각을 바꿀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여인은 하는 수 없이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마침내 한 상에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김진은 여인을 관찰했다. 그녀의 앉음새나 그녀의 모든 몸짓들이 그녀가 양반가의 출신이라는 걸 말해주었다. “정말 우아한 여인이군!” 김진은 속으로 감탄하면서 자신이 그녀에게 강하게 끌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을 나무랐다. “아니, 이러면 안 되지. 나를 자신의 집으로 친절하게 맞아준 여인한테 이런 불순한 감정을 품다니? 배은망덕한 인간 같으니라고!”
다소 어색한 침묵 속에서 식사를 끝내고 밥상을 치운 후, 젊은이는 따뜻한 아랫목에, 여인은 반대편인 윗목에 각각 자리 잡고 누웠다. 진은 애써 잠을 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여인에게 눈길을 돌렸는데, 그녀 역시 잠이 오지 않아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자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욕구에 사로잡혀 팔을 내밀어 여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것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 이게 무슨 짓이에요?
여인이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치며 그를 거칠게 뿌리쳤다.
그러자 김진이 일어나 앉아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용기를 내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 부인께 고백을 해야겠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부인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부인에게 반해버렸습니다. 부인은 너무도 아름답고 매혹적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은 하늘이 정해준 인연입니다. 오늘밤, 남은 여생을 함께 행복하게 사는 백년가약을 맺읍시다.
— 뭐라고요? 지금 저한테 청혼을 하시는 건가요?
여인이 놀라 일어나 앉으며 물었다.
— 그렇습니다! 제발 제 제의를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여인은 아연실식해 보였고 감동에 찬 떨리는 목소리로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 손님은 아직 젊은 총각이지만, 저는 이미 한 남자의 아내였다가 지금은 과부가 된 몸입니다. 제 조건으로 볼 때, 저는 손님의 아내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따라서 손님의 청혼은 불가능한 것이니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그에 대해서는 염려 마십시오. 저는 그런 것들에 전혀 연연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 심장이 부인을 향해 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 저는 혼자 살도록 운명 지워진 사람입니다. 관습상, 여인은 두 남자를 섬길 수 없습니다. 저는 제 남편을 헌신적으로 사랑했고, 남은 여생동안 이제는 고인이 되어버린 제 남편에게 수절하면서 조용히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니 손님의 청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김진은 포기하지 않고 진심을 다해 간청했다.
— 부인, 사랑합니다! 부인을 향한 제 사랑은 절대로 변치 않을 겁니다.
이 사랑의 선언에 여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청년의 고백에 너무 감동해서일까? 아니면 혼자서 보낸 긴긴 고독의 밤들이 서러워서일까?
우는 여인을 보니 진은 마음이 아팠다.
— 부인, 제발 제 사랑을 받아주오! 제가 어떻게 해야 부인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겠소? 필요하다면 별이라도 따러 가겠소.
진은 여인에게로 다가가 그녀를 부드럽게 안았다. 여인은 이제 더 이상 반항하지 않았고 그를 뿌리치지도 않은 채 그냥 이렇게 물었다.
—저에 대한 당신의 감정이 확실한가요? 진정 저를 영원히 사랑할 건가요?
— 물론이오. 군자는 자신이 한 말을 반드시 지킨다오.
김진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제야 여인이 눈물을 훔치고 나서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빌겠지만, 만에 하나 제가 서방님으로부터 버림받는 불행에 처한다면 저는 뱀으로 변해 서방님을 찾아가 서방님에게 천천히 고통을 느끼게 하면서 죽일 것입니다.
청년은 여인의 이 말에 전율을 느꼈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를 안심시켰다.
—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니 저를 믿으오! 내일 당장 내 고향 마을로 돌아가서 우리의 결혼식을 준비하겠소. 그러니 마음을 편하게 가지시지요……
그날 밤, 그들의 몸은 결국 하나가 되었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탐하는 달콤한 순간이 길게 이어지고 그리고 함께할 미래의 계획에 대해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다음 날 아침, 김진은 여인과 슬프게 헤어진 후 고향길에 오르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과부의 슬픔은 청년의 그것보다 훨씬 더 컸다. 진은 여러 번 뒤돌아보면서 여인을 위로했다.
—내 곧 다시 돌아오겠소. 몸조심하고 준비하고 기다리오.
김진이 떠난 지 이미 한 달이 되었다. 과부는 매일 고개까지 나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성거리며 님을 기다렸다. 하루가 일 년 같았다. 밤이 되어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올 때면 그녀는 “내일은 오실 거야. 분명히.”라고 늘 자신을 위로했다.
이렇게 여러 달이 흘렀고 일 년이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하는 님은 나타나지 않았다. 여인은 님이 떠난 방향으로 멍한 시선을 고정한 채 모든 시간을 밖에서 지내다시피 했다. 원망의 감정이 마음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은 작은 희망을 간직한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일이라도 돌아온다면 모든 걸 잊고 그를 용서하리라.”
사랑을 믿으려는 그녀의 마지막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지쳤고 결국 병에 걸리고 말았다. 병상에 누운 채 그녀는 님의 얼굴을 보았고 두 손을 벌린 채 그를 절망적으로 불렀다. 그러다가 김진을 만난 지 일 년이 조금 넘어 이 세상을 하직했다.
김진은 야무진 결심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막상 부모님 얼굴을 대면하자 차마 과부와 결혼을 하겠다는 말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곧 다시 과거시험 준비에 몰두하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자 그는 열정의 하룻밤을 나눈 여인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오직 공부에만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이번에야 말로 과거에 급제하리라 그 어느 때보다도 단단히 마음먹었던 것이다.
새해가 다가오자 그는 다시 시험장에 나갔고 드디어 장원급제를 땄다. 이어 그는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금의환향했고 곧 어느 남쪽 고을의 원님으로 발령받아 갔다. 그리고 양반 가의 한 규수와 결혼해서 행복한 삶을 꾸려 나갔다. 권력과 명예와 부를 모두 갖춘, 어느 것 하나 부족할 게 없는 삶이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자신의 방으로 자러 들어왔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스스스스! 겁에 질려 주위를 돌아보던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거대한 뱀이 구불거리며 원님을 향해 천천히 기어 오는 게 아닌가.
—저…… 저 괴물이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지? 밖에 누구 없느냐? 지금 내 방에 흉측한 짐승이 들어와 있다. 얼른 와서 저놈을 잡아라!
원님은 혼비백산해서 소리쳤다.
몇몇 하인들이 달려왔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마치 문이 천근이라도 되는 것처럼.
— 뭘 하고 있는 게냐? 어서 서둘러라!
— 나리, 문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 어떻게 된 일이냐? 문이 잠겨있지도 않은데!
— 정말입니다요, 나리. 문이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는 동안 뱀은 원님을 향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 뭣들 하느냐? 문을 부숴라! 저 뱀이, 저 괴물이……
하인들은 곤봉을 들고 여러 번 문을 내리쳤다. 하지만 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도저히 파괴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뱀은 이제 사또의 몸을 감기 시작했다. 그러자 숨쉬기가 힘들어진 사또는 점차 의식이 가물가물해져 갔다. 뱀이 두 갈래의 혀로 자신에게 갇힌 포로의 얼굴을 핥더니 여인의 목소리로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저를 몰라보시겠어요?
이미 죽을 것이라 체념하고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 있던 원님이 그제야 애써 정신을 차리고 뱀의 얼굴을 관찰했다. 뱀이 말을 하다니!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을 알아보겠냐고 묻지 않았는가?
— 나는 당신이 구송이라는 마을 근처에서 만난 여인입니다. 당신을 일 년 넘게 기다렸지만 당신은 자신이 한 말을 지키지 않았어요. 결국 나는 절망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렀지요. 당신은 정말 무정합니다! 지키지 못할 거라면 그렇게 중요한 약속을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때 내가 당신에게 한 말을 기억하나요? 만일 당신이 나를 버린다면 나는 뱀이 되어 당신을 서서히 괴롭히면서 죽일 것이라고 했지요. 그때의 경고대로 나는 이제 이렇게 흉한 짐승이 되었고, 당신과는 반대로 나는 내가 한 언약을 충실히 지킬 것입니다.
원님은 죄책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아연실색했다. 그리고 애원했다.
— 오, 용서해 주오! 당신이 그렇게 괴로워했다면 그것은 내 잘못이오. 어떻게 내가 당신을 그리도 까마득히 잊어버릴 수가 있었는지요? 정말 내가 몹쓸 사람이오. 어떻게 해야 내가 저지른 잘못을 고칠 수가 있겠소?
뱀은 아무런 대답 없이 원님의 몸을 칭칭 감고 천천히 조이면서 갈라진 그의 혀를 끊임없이 날름거렸다. 원님은 점점 더 숨쉬기가 힘들어졌고 찌르는듯한 고통을 느꼈다. 마침내 새벽이 다가오자 뱀은 그제야 감았던 몸을 풀고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김진의 고난은 이제 시작이었다. 흉측한 짐승은 매일 저녁 그를 찾아왔고 첫닭이 울 때까지 그와 함께 머물다가 갔다. 그는 애원하듯 빌었다.
— 부인, 내가 잘못했소. 부인의 영혼이 편안히 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오.
그러나 뱀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밤마다 그를 방문했다. 원님은 점점 여위어갔고 그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해 갔다. 걱정이 된 가족은 그 지방에서 유명한 모든 의사들을 불러 진찰하게 했고, 심지어는 나쁜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굿까지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게 된 원님은 깊은 숲 속에 은둔해 사는 지혜롭고 덕이 높기로 유명한 도사를 몸소 찾아 나섰다. 따라나서겠다는 신하들과 하인들을 뿌리치고 멀고 험난한 길을 홀로 속죄하면서 오래오래 걸었다. 밤마다 뱀녀에게 시달려 건강이 이미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태이니 마침내 도사의 오두막에 도달했을 때 그는 거의 의식을 잃기 일보 직전이었다. 마치 그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마침 밖에 나와있던 도사는 얼른 그를 방으로 거두어 극진한 간호를 해주었고, 덕분에 그는 하룻밤 사이에 의식을 회복할 수가 있었다. 정신을 차린 원님은 도사의 극진한 간호에 깊이 감사를 드리며 자신이 죽을힘을 다해 찾아온 연유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김진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도사는 눈을 지그시 감고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혀를 차면서 말했다.
— 쯧쯧 쯧! 지독한 사랑이자 지독한 고통이군요! 이 가련한 여인은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고 당신을 못 잊어하고 있소. 그래서 매일 밤 당신과 사랑을 나누러 오는 거요. 하나 이제 이 사랑놀음을 멈추어야 할 때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 목숨이 위험하오.
도사는 다시 깊은 숙고에 잠겼다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 딱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인한 상처는 사랑으로 치료를 해야 하지요. 이제부터 그 여인에게 당신의 헌신적인 사랑을 입증해 보여야 하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처방을 알려줄 테니 그대로 실천하도록 하오.
김진은 도사의 지혜로움에 깊이 감읍하여 큰 절을 올리고 자신의 고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도사가 일러준 조언대로 여인의 오두막이 있던 자리에 작은 절을 짓게 하고 거기서 오직 여인과 함께 나누었던 열정의 밤 만을 생각하며 혼자서 백일동안 지냈다.
처음에는 뱀이 매일 밤 찾아와 그의 몸을 휘감고 두 갈래의 혀로 그의 몸을 끊임없이 핥았다. 김진은 여인이 겪었을 외로움과 고통을 생각하면서 무서움을 억누르고 그의 몸을 온전히 뱀에게 내맡겼다. 그렇게 날이 바뀌고 달이 바뀌어 가자 뱀의 방문 수가 점점 더 뜸해지더니 3개월이 지나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김진은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쳤고 또한 삶의 교훈을 얻어 자신의 언약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 의롭고 지혜로운 원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