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8월부터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예술가로 인생 노선을 변경한 건 아니고, 단순한 취미활동이다. 나는 사실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미술 대회에 나가 자잘한 상도 종종 수상을 하곤 했다. 나의 장래희망은 화가에서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비슷한 결에서 왔다 갔다 했다. 시대가 변하며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에서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 직업으로 바뀐 것이다. 열여섯 끝무렵에는 예술 고등학교 입학을 위해 친구와 미술 학원을 다녔다. 시내에 있던 입시 미술을 전문으로 하는 학원이었다. 우리는 그 학원에 가기 위해 학교를 마치고 약 30 - 40분 정도 버스를 타고 나가야 했는데, 귀가하는 길이 문제였다. 감사하게도 원장 선생님께서 학원 마감 시간에 맞춰 우리를 집까지 데려다주셨다. 그때 원장님 차에서 흘러나오던 강렬하고 거친 헤비메탈이 여즉 잊히지 않는다. 카시트까지 웅웅 울리던 진동 소리. 가로등도 켜지지 않아 어둑했던 시골길을 굽이굽이 흘러가던 이름 모를 밴드의 샤우팅. 재미있는 기억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본격적으로 미술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드는 돈이 많았다. 결국 나와 친구는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미술과는 동떨어진 인생을 살고 있다.
내가 다니는 미술학원은 등록 기간 동안 언제든 학원에 방문해 미술 재료들을 사용할 수 있는 성인 위주 취미 미술 학원이다. 피아노 연주도 겸하고 있어 문을 열면 언제나 어디선가 누군가의 연주 소리가 들린다. 연령대는 20대부터 50대까지. 낮에는 밝은 채광이 여유로운 아늑함을 자아낸다. 첫 수강 날, 생각보다 인원이 없어 안심했다. 처음에는 4B연필로 선을 긋는 연습을 했다. 단순히 선을 반듯하게 긋기만 하는 과정이 아니라 손 힘을 조절해 연하고, 짙고 빼곡하게 칸을 채워 나갔다. 그다음에는 색연필을 사용해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별거 아닌, 그저 선만 죽죽 그어나가기만 해도 기분이 들떴다. 선생님은 친절했다. 취미 생활을 하러 온 사람들이니 작품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행위의 즐거움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최종 목표는 유화였다. 중세시대 귀부인들의 초상화처럼 점잖고도 따스하게 우리 집 고양이들의 얼굴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런데 바로 유화에 들어가지 않고, 색연필로 몇 작품 그려볼 것을 권하셨다. 색을 쓰는 법을 어느 정도 알고 들어가야 유화도 쉽게 그릴 수 있다나. 그리하여 색연필로 그릴 그림을 고르는 데 이 또한 만만치 않았다. 최대한 쉽고 간단한 그림들 중에서 약간의 고난을 한 스푼 첨가할 수 있는 것이 좋을 성싶어 선택한 것이 복숭아였다. 빨갛게 익은 복숭아 두 알. 스케치부터 만만치 않았다. 내가 연습한 것은 직선을 긋는 것인데 복숭아는 동그란 모양이라 그리고자 하는 그림을 인쇄해 놓고 빈 도화지 앞에서 한참을 그렸다 지웠다 하며 시간을 허비했다. 수업은 2시간 30분 동안 진행이 되기 때문에 1분도 허투루 사용해서는 안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진행이 무척 더딘 편이었다. 남들이 그림 하나 뚝딱 완성하고 갈 때 나는 근 3주에 걸쳐 하나를 겨우 그려냈다. 틈틈이 학원에 가 그림을 그리면 될 텐데 야근을 보태 보통 8시에 회사를 나오곤 하니, 그러고 나면 10시에 마감을 하는 학원에 가기가 참 어정쩡했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한 번, 정식 수강하는 날에만 가서 그림을 그렸다는 불행한 이야기다. 그래도 복숭아에 이어 장미를 색연필로 그려내고 처음 목표로 했던 고양이 그림까지 무사히 마쳤다. 한 달에 하나씩 그림을 완성한 셈이다.
처음 고양이를 그리기로 했을 때 선생님과 구도나 배경, 표현과 질감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그리고 싶은 스타일의 그림들을 몇 가지 저장해 가 보여드렸다. 선생님은 군말 없이 조언과 도움을 주었다. 붓터치가 굵직해 쉬울 줄 알았건만, 미술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나의 착각이었다. 오히려 물감과 붓을 다룰 줄 아는 사람만이 절제된 터치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멋모르고 예시로 든 그림들은 한 번에 물감을 두껍게 쌓아 거친 질감의 작품들이었다. 이 또한 쉽지 않았다. 유화 물감은 굳기까지 오래 걸리고 수채화와 달리 입체적인 질감을 표현하기 유용했지만 처음부터 도톰하고 와일드한 질감을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치덕치덕 물감을 덧대고 있으면 어쩐지 모델이 된 우리 풀이에게 미안해지기도 하는 거였다. 중간에 배경 색도 한번 바꿨다. 유화의 장점이었다. 마른 그림 위에 덧칠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유화 하나를 마치니 처음보다 대범한 구석이 생겼다. 어차피 내가 못한 부분은 선생님이 손을 봐주시기도 하고, 유화는 설령 기존 계획했던 방향과 달리 붓질을 했더라도 마른 다음 덮을 수 있어 심리적 부담이 덜하다. 그리고 자기합리화의 결과처럼 보이겠지만, 망치면 망치는 대로 작품이 될 수도 있다고 믿는다. 현재 그 그림은 우리 집 거실 한 구석에 세워져 있다. 선생님이 고양이 눈알에 반짝거리는 효과까지 더해준 덕분에, 간혹 티브이를 보던 삼월이 누가 쳐다보는 것 같다며 힐끔거린다. 처음에는 생각했던 것보다 투박하게 완성되어 긴가민가했던 그림인데, 자꾸 보니 정이 든다. 나의 첫 유화.
다음 목표는 바다를 그리는 것. 고를 때만 해도 구름과 하늘, 바다와 수면의 물결만 표현하면 될 줄 알았더니 막상 시작을 하고 팔레트에 물감을 짜는데 선생님이 그러는 것이다. 하늘의 구름은 회색빛이 감돌면서 한쪽은 붉은빛, 또 이 부분은 노랗게 물들어 있네요. 색을 다양하게 써야 해요. 오히려 바다보다 하늘이 그리기가 복잡하겠어요. 이상하다. 나는 바다가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눈에 띄는 것만이 전부는 아닌가 보다. 전문가의 눈에는 그림 하나만 보아도 어떤 색이 쓰였으며 어떤 방식으로 어떤 방향을 향해 붓이 움직였는지 보이는 걸까. 이렇게 나는 또 나만의 고뇌 안으로 풍덩 빠져버렸다. 사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 자괴감과 박탈감, 스트레스 같은 불편한 감정들에 시달린다. 나는 예술가도 아니고, 전시를 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단지 잘하고 싶어서. 실수하고 싶지 않아서. 완벽하고자 하는 쓸데없는 욕심이 만들어 내는 뾰족하고 어리석은 감정들이다. 하지만 이는 사회에서 느끼는 스트레스와는 결이 다르고 물감을 섞으면서 나는 행복을 찾는다. 어떤 색이 나올까 무작정 이것저것 섞어 내가 찾는 색을 창조해냈을 때의 뿌듯함을 반복하고, 또 고민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완성과 동시에 누적된 감정들은 모두 가루가 되어 날아간다. 성취감과 위안.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따위의 소모적인 고뇌에 대한 힌트 중 일부. 두고두고 볼 수 있는 나의 고통으로 이루어진 결과물. 눈에 담고 집에 둘 수 있는 결과물이 생김으로써 나는 이 같은 스트레스를 또 겪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그림 그리는 행위를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라고 부르곤 한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스불재로 인해 행복해지고 싶은.... 가여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