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하던 삼o호빵보다 꼭 먹야야 할 것이 있다. 추운 겨울에만 나오는 흑맥주가 그것이다. 모르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맥주는 신선식품일 뿐 아니라 제철 식품이기도 하다. 여름에는 (사실 그렇지 않은 맥주가 있는지 의문이지만) 더위를 식히는데 딱인 여름 맥주가, 겨울에는 속내를 도통 내비치지 않는 컴컴한 흑맥주들이 나온다. 그래서 쌀쌀해진 날씨에 외투를 꺼내 입을 즈음이 되면, "아 이제 마트에 흑맥주들이 진열돼있겠군"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흑맥주 사랑에는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내 맥주의 기록이 한 잔 두 잔 쌓이던 어느 날, 나는 어떤 기로에 서게 됐다. 거기에는 길이 두 갈래로 나 있었는데, 왼쪽은 홉 향이 가득한 맥주로 (이를 테면 IPA), 오른쪽은 몰트의 맛이 부각되는 맥주로 (예를 들면 포터나 브라운 에일) 향하는 길이었다. 마치 그간 마셔온 맥주들이 네게 "너는 어떤 사람이냐"하고 되묻기라도 하듯. 곰곰이 지나온 내 주도를 되짚어 보니 나는 어두운 맥주를 마시는 사람이었다. 나는 오른쪽 길로 향했고, 그날 이래로 내가 마시는 맥주는 간장만큼이나 진하고 걸쭉해져 갔다.
이런 내 맥주 선호 때문에 나는 연중 대부분을 맥주의 계절 색으로부터 고통받는다. 연중 꾸준하게 흑맥주를 수급할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으니, 맥주를 정말 먹어야겠다고 작정한 날에는 어쩔 수 없이 옆 도시, 혹은 옆 옆 도시의 단골 주류점을 찾아가야만 한다. 이런 주류점에서도 계절이 맞지 않는 맥주를 찾으려면 비좁아진 선택의 폭 때문에 나 자신과 타협하는 일이 다반사다. 물론 마트에 연중 판매하는 대량 생산되는 흑맥주가 한, 두 종류 (대표적인 예로 기네스) 있긴 하지만, 도통 손이 가질 않는다. 대량 생산하는 맥주는 모두의 입맛에 맞게 갖은 타협을 하는데, 덕분에 그 누구의 입맛에도 안 맞는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내 선호에 반하여 마실만한 IPA를 사 오는데, 여간 서운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연유로 나는 겨울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것이다.
추운 계절 중에도 유독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가 있는 연말을 더욱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는, 그때에만 나오는 맥주들이 있기 때문이다. 추위로 얼어붙은 손을 꼭 쥐어 녹여가며 목으로 넘기는 12도 이상의 이 맥주들은, 흑맥주를 가져다가 위스키 통이나 와인 통에 더 담가 숙성을 하는 방법으로 만들어진다. 이런 맥주의 부류를 간혹 줄여서 BA(Barrel-Aged), 버본 위스키 통에 담근 것은 특히나 BBA(Bourbon Barrel-Aged)라고 부른다. 추위를 피해 따뜻한 방 한구석에서 벌컥벌컥 보다는 홀짝홀짝 마셔가며 즐기는 그런 맥주다. 물론 나 같은 맥주광에게나 가슴 뛰는 이름일 따름이다.
재밌게도 이런 맥주는 빈티지가 있기도 하는데, 알코올 함량이 높아 오래도록 두고 마실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시간이 갈수록 이런 맥주는 안에 있는 효모 때문에 도수가 점점 높아지는데, 내가 마셔본 중 가장 도수가 높았던 맥주는 20도에 달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탄산 기운은 온데간데없고, 한 모금 들이킬 때마다 강한 알코올 향이 코를 가득 덮친다. (위스키 통에서 발효된 것들이 많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마셨을 때의 느낌이 위스키를 상기시키기도 하는데, 증류주에는 없는 탁한 기운이 독특하기 그지없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정기구독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맥주장들이 있다. 일정한 금액을 내면 분기당 일정 수의 맥주를 보내주는 프로그램인데, 가입자들만 살 수 있는 희귀한 맥주들이 있어 메리트가 쏠쏠하다. 물론 나도 이런 흐름에 동참했는데 2016년부터 2018년까지 The Bruery의 맥주를 정기 구독해서 마셨었다. 아래의 사진 속 상자에 매 번 세 병의 맥주를 담아서 보내주곤 했는데, 각각이 서로 다른 종류의 맥주에 매번 새로운 것들을 보내주기에 정말이지 가슴 벅찬 감동이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눈부신 나날들이었다. (언제 이 맥주 정기구독 때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다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매번 바뀌는 맥주들 가운데도 유독 매년 한 번은 꼭 보내주는 맥주가 있으니 그게 바로 Black Tuesday이다. 알기로 대공황에서 따온 이름인데, 정확히 무엇을 의도한 작명인지는 잘 모르겠다. (자매품 Grey Monday와 Mocha Wednesday도 있다.) 대공황 그날 장을 맞았을 브로커들의 앞날만큼이나 캄캄한 색과 질감의 이 맥주는 BBA 중에서도 꽤나 강렬한 맥주다. 처음 이런 유의 맥주를 마시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권하지 않지만, 나처럼 더 이상 혀가 말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경험을 선사해줄 것이다. 실제로 이런 종류의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인지도가 있어서,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The Bruery를 "지도에 올려준" 맥주라고 한다. 정기구독 덕분에 여러 번 마실 기회가 있었는데 그간 마셔본 다른 BBA와는 꽤나 도드라지게 차이가 나면서도, 강렬한 알코올 향 때문에 호불호가 강할 것 같은 맛이었다.
그중 한 번은 빈티지 Black Tuesday를 마셔볼 기회가 있었는데, 사정은 이러했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맥주가 21세 미만에게 배송되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위의 사진 속 상자를 받는 사람은 반드시 21세 이상이어야 했다. 게다가 심야 배송으로 오는 저 상자는 배송 당일 배송 시간대가 "아침 9시부터 일과시간 끝나기 전"따위로 넉넉하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일터로 배송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여기 택배 직원들은 배송에 별로 진심이지 않기 때문에, 배송을 시도하다가 못 찾겠으면 그냥 차고지로 돌려보내기 일쑤다. 물론 일반 택배였다면 차고지로 돌아간 물건은 수령인이 직접 찾으러 올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킨다. 하지만 취급이 까다로운 우리 맥주님은 차고지 = 배송지이기 때문에, 배송에 실패할 경우 곧바로 맥주집으로 돌아간다.
맥주 배송 따위에 이렇게 열을 올리는 이유는 이 맥주집에 내가 사는 곳으로부터 차로 대략 6시간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맥주 상자가 오지를 않고, 소리 소문도 없이 맥주집으로 돌아가버렸다는 사실은 나를 분노로 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불현듯 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데, "겸사겸사 상자 가지러 간 김에 맥주도 한 잔 하고 오면 좋지"하는 나쁜 생각이었다. 물론 내 아내 또한 굉장히 비범한 사람이어서, 태연하게 6시간 내려가 맥주만 한 잔 하고 오자는 남편을 나무라기는커녕 좋은 생각이라 추켜세웠다. 이렇듯 죽이 맞은 우리 부부는 6시간을 달려 The Bruery에 방문하기에 이른다.
고속도로 바로 앞에 정말 인적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후미진 동네에 자리했던 맥주집은 오직 문 너머에 존재하는 별세계였다. 그곳에는 눈빛만으로 서로 맥주에 진심임을 알 수 있는 사람들로만 가득했는데, 음식도 없이 오로지 맥주만으로도 흥이 넘치는 광경이었다. 샘플러도 인심이 어찌나 넉넉하던지, 아래의 사진처럼 한 잔 가득이었다. 참고로 이 맥주의 절반은 도수가 10도를 넘고, 검은색 맥주는 20도에 달하니, 차로 운전해서만 올 수 있는 이 맥주집이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시련을 내리는 것인가 싶었다. (당연히 돌아가는 길은 아내가 운전했다.)
이날 맥주 중 단연 인상 깊었던 것은 2014년, 2015년 빈티지의 Black Tuesday였다. (아래의 사진은 2014년 빈티지) 출하되는 시점에 이미 발효가 많이 됨에도, 많은 수의 BBA 맥주들은 사서 바로 마셔보면 꽤나 뾰족뾰족한 맛이다. 위스키 통에서 오는 오크향, 몰트에서 오는 쌉쌀한 맛, 고 알코올 함량에서 오는 입안 가득 채우는 느낌까지, 밖으로 퍼져나갈 듯한 맛의 요소를 꽉 잡아 가둬 혀 위에 올려두는 느낌이랄까. 내가 전에 마셨던 Black Tuesday는 특히나 그러했다. 혀가 정말로 마비되어버릴 듯한 그런 맛.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난 Black Tuesday는 더 높아진 알코올 함량에 무색하게 오히려 더 마시기가 좋았다. 2014년은 특히 좋았는데, 덕분에 다음에 받을 Black Tuesday는 좀 오래 묵혀둬야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실제로 그 뒤에 받은 Black Tuesday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꽤나 오래 묵혀뒀어야 했는데, 집 냉장고가 시원찮아서인지 이날만큼의 감동은 없었다.)
The Bruery를 방문하던 이날의 설렘과 벅참, 감동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맥주 하나로 사람이 이렇게 기쁠 수가 있구나 하고 생각하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