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리뷰 2
권선징악
소설, <향수>의 주인공 그루누이는 체취 없이 태어났다. 생선 비린내가 진동하는 좌판에서 일하는 20대 여성의 몸에서 태어나 쓰레기통에 버려지지만 강한 생명력으로 울음을 터뜨려 구조된다.
전과가 있었던 친모는 영아 살해죄로 교수형에 처해진다.
냄새가 없는 아이,라는 설정은 언뜻 보면 설득력이 없는데 문학적 창작의 기술로는 혁명적이다. 작가는 왜 이런 설정을 한 것일까.
냄새가 없는 사람이 다른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는다는 이야기가 이 소설의 골자다.
지금이야 모든 흙으로 된 바닥이 아스팔트나 콘크리트, 그리고 보도블럭으로 촘촘히 덮여있지만 18세기 프랑스 파리는 대부분이 흙바닥이었다. 또 위생관념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 테니 그 시절 세상은 악취와 향기가 공존하는 냄새의 지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무두장이를 거쳐 향수 도제가 된 그루누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의 냄새를 추출해 낼 줄 아는 냄새 크리에이터가 된다.
이 과정에서 그루누이를 괴롭히거나 이용만 한 인간들은 모두 불귀의 객이 된다. 무두장이 그리말이 그랬고, 향수 제조인 지세프 발디니가 그랬으며, 향을 추출하는 장인이면서 자신의 주인이었던 미망인의 내연남이기도 했던 드뤼오가 처형됐으니....
이건 권선징악의 원리가 작동했다고 봐야 한다.
냄새와 살인
그루누이는 총 26명의 처녀(무두쟁이 시절 1명, 그라스에서 25명)를 살해한다. 몽둥이로 뒤통수를 쳐서 뇌진탕으로 죽인다.
옷을 벗기고 동물의 유지를 도포한 천으로 감싼 다음 여성의 모든 향기를 추출해 낸다. 죽은 여성의 잘라낸 머리카락, 옷과 함께 여성의 체취를 머금은 천을 가지고 유유히 사라졌던 것이다.
성적으로 유린하지도 않고 금품을 탈취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여성의 몸에서 풍기는 체취만이 그가 훔쳐야 할 대상이었다. 안타깝게도 체취 절도는 대상자를 죽여야만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비린내 나는 생선 찌꺼기와 함께 쓰레기통에 버려졌던 세상에서 가장 비천하다고 할 수 있는 외톨이 남성이 아름다운 여성만 골라 살해한다는 극적인 대비가 이야기의 흥미를 더한다.
사실 이 소설이 흥미진진한 이유는 냄새에 대한 신선한 접근이다. 향수를 제조하는 방법에 대한 상세한 묘사와 향기에 반응하는 사람들에 대한 섬세한 설명 말이다.
냄새로 던지는 질문도 있다. 과연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권력과 재력, 그리고 외모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 사회적 지위는 과연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가.
냄새 없이 태어난 그루누이는 결국 투명인간인 셈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
그러나 그런 인물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세상은 그렇다. 존재에 이유는 없다. 당위만 있을 뿐. 게다가 모든 사피엔스에겐 저마다 관심분야가 있게 마련이다.
작용과 반작용의 조화로 세상은 이루어지니까. 비천한 존재로 세상을 살 수밖에 없는 그루누이에게는 절대 후각 능력이 있었다.
냄새가 살인으로 연결되는 것, 왠지 설득력 있다. 썩는 냄새와 사랑스러운 향기, 그리고 무취.
우리는 냄새로 계층과 빈부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 피아 식별이 가능하다.
기생충과 향수
영화 <기생충>에서 우리는 실감하지 않았던가. 봉준호 감독은 십중팔구는 <향수>의 애독자였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냄새로 가정부와 운전기사가 한집안 사람이라는 것을 파악한 것. 또 주인공이 집주인을 살해하게 된 동기가 결국, 자신에게서 풍기는 역겨운 냄새였다는 점을 기억하라.
그루누이는 파리의 외곽 이노생 공동묘지에서 자신이 창조한 최고의 향수를 몸에 바르고 그 향기에 취한 부랑자들에게 산산이 조각난 체 먹혀 버린다.
순식간에 식인을 한 부랑자들은 그것을 일종의 파티였다고 기억하게 되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그루누이는 그렇게 세상에서 완벽하게 사라진다.
기생충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린아이의 생일파티날, 인디언 차림을 한 기택은 자신의 몸에서 풍기는 역한 냄새에 반응한 동익을 살해한다. 그 또한 체포되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진다.
어쩌면 기생충은 향수의 스핀오프였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