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히든 피겨스>를 보고
한 여성이 800미터 거리를 뛴다. 달려가서 볼 일을 본 뒤 그 거리를 다시 달려와야 한다. 자신이 근무하는 건물에는 화장실이 없기 때문에 건물과 건물 사이를 내 달리는 것이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스커트에 긴팔 정장을 입고 하이힐을 신고 진주목걸이까지 착용한 여성의 하루 일과 중 벌어지는 일이다. 매일!!!
아무리 내달리고 급하게 볼 일을 봐도 최소 40분이 걸린다. 그런데 화장실을 하루에 한 번만 가는 사람이 있을까.
이 에피소드는, 캐서린이라는 이름의 흑인 여성이 1961년 '나사 NASA'에서 전산원으로 근무하며 겪은 실화다. 흑인은 화장실에 갈 때도, 커피포트의 물을 마실 때도 'Colored'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는 것들만 사용할 수 있었다.
차를 타고 가다가 고장이 나서 길에 서 있다가도 백인 경찰관에게 혼구녕이 나야 했고, 중고등학교나 대학교에도 'Colored'만 다녀야 했다. 유색 인종. 백인은 유색인종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에 흑인은 속할 수가 없던 시절 이야기다.
낭중지추
그러나 캐서린은 차별과 박해에도 억눌리지가 않는다.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가 천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한 의지와 투철한 정신력, 그리고 사명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IBM 컴퓨터가 도입되자 또 다른 나사 직원, 도로시는 흑인여성으로서는 갈 수 없는 도서관에 가서 컴퓨터 언어를 공부하기 위해 책을 훔쳐 온다. 국가에 똑같이 세금을 내는데 흑인만 들어가지 못하는 도서관은 말이 안 된다는 것으로 정당화했다.
씁쓸하지만 도로시의 선택은 어차피 죽느냐 사느냐다. 책을 훔치다 죽나 직장을 그만두고 죽나.
결국, 컴퓨터를 다루는 파트의 책임자로 승진한다.
흑인 여성으로는 최초로 나사의 엔지니어가 되는 메리 잭슨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엔지니어가 되려면 도저히 흑인여성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을 넘어서야 했기 때문이다.
백인 남성에게만 허용되던 엔지니어 직책의 조건은 대학에서 정해진 기간 과정을 이수해야 했는데 메리는 전형 자체가 불가능했다. 법원에 소원을 내고 판사를 설득해 야간과정을 이수하도록 허락을 받게 된다.
연못의 물이 얼어붙는 한이 있더라도 오리는 끝가지 헤엄을 치면서 물의 결빙을 막으려 노력한다. 새끼들의 먹이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노벨 평화상의 주인공,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의라고 믿는 일이 있다면 벽에라도 외치라고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깨어있는 조직된 힘이 세상을 바꾼다고 말했다. 야당대표 이재명은 <꼬리를 잡아 몸통을 흔든다>는 공약집을 책으로 낸 적이 있다. 모든 행위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유명한 말도 했다.
모두 자그마한 노력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모여 결국, 세상을 바꾸는 일의 물꼬를 트게 된다는 말을 비유적으로 한 말이리라.
영화의 제목은 <히든 피겨스>다. 피겨 figure는 숫자라는 의미와 인물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세 명의 수학 천재를 은유하는 표현이리라.
감추어진 숫자를 알아내야 하는 일을 하는 '나사'의 전산원과 그 전산원들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감추어진 존재들이었다는 점.
영화에서 인상적인 두 장면, 첫 번째는 캐서린이 자신이 40분씩 자리를 비워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본의 아니게 연설을 하게 되는 장면.
두 번째는 '나사'의 책임자, 해리슨이 'colored'라고 쓰인 화장실의 푯말을 연장으로 부수고 나서 흑인이든 백인이든 같은 색깔의 소변을 본다고 말하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