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가 꿈꾼나라> 이덕일 저
'사도'라는 시호는 영조가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인 후 내린 이름이다. 뒤주에 들어가기 전, 아들은 '아버지'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것이다.
‘사도세자’라는 이름. 일반 가정집에서 부르듯이 아버지를 부르짖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내린 칭호였다.
왕의 아들이자 세자였던, 그리고 영조를 대신해 국정을 운영 -대리청정- 한 기간이 14년, 거의 왕의 자리에 가 있었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국가 지존이 왜 뒤주에 갇혀 죽어야 했을까.
사도세자 이선은, 아버지의 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영조의 이복형, 경종은 숙종을 이어 즉위한 지 4년 만에 병사하는데, 여기에 영조와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가 개입되어 있다는 설이 있다. 이른바 경종 독살설.
경종은 숙종과 장희빈이 낳은 아들이다. 그런데 장희빈은 당파가 소론 계열이었다. 숙종이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세자로 정했음에도 노론의 수장이었던 송시열이 반대했다가 사약을 받을 정도로 당파 정치는 조선을 멍들고 썩어 문드러지게 하는 병폐였다.
장희빈이 인현왕후(노론)를 저주해 죽게 했다는 노론 대신들의 주청으로 사사되고 난 후 숙종은 세자의 지위를 흔든다. 죽기 전 숙종은 노론 대신과 사관과 내관 없이 독대를 한다. 이른바 정유독대.
독대를 통해 세자의 동생, 연잉군을 부탁한 것. 결국, 정유독대는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죽게 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이벤트였던 것이 분명하다. 경종이 즉위하자마자 후사가 없다며 노론대신들은 동생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경종의 비가 양자들 들여 후사를 세우려던 계획을 무산시키고 말이다. 이건 사실상 역모였던 것.
경종은 이 일로 노론 4 대신을 역모 혐의로 사형시킨다. 그리고 이 역모혐의에는 연잉군 이름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종은 소론 대신들의 탄원에 불구하고 동생을 살려준다. 그리고 시름시름 앓다가 영조가 권한 게장과 생감을 먹고 죽는다.
숙종은 노론과 소론을 번갈아 등용하며 여당 야당을 수시로 바꾸는 환국정치를 통해 왕권을 강화한 인물이었다.
자신의 아들들이 결국 그러한 환국정치의 희생양이 된다.
상극이라는 게장과 생감을 먹고, 죽어간 경종, 그 뒤를 잇는 영조.
노론 대신들과 공동전선을 형성해 정권을 쟁취한 영조는 무수리라는 모친의 출신성분, 그리고 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 이 두 가지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왕이 된다.
작용이 있으면 반드시 반작용이 있는 법. 사도세자는 부친 영조와 달리 권모술수와 교언영색으로는 설득이 되지 않는 무인의 기질과 대인의 풍모를 지닌 인물이었다. 이런 사도세자가 큰 아버지가 되는 경종의 삶을 몰랐을 리가 없다.
경종을 모셨던 궁녀나 환관들을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더해 영조는 세자가 5살도 되기 전부터 전위소동을 벌인다. 왕을 그만두고 아들에게 왕위를 주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런 쇼를 수시로 한 것이다.
그럴 때마다 세자는 돌바닥에 엎드려 울면서 분부를 거두어들이라고 죄인처럼 석고대죄해야 했다. 마음의 병이 들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다.
세자는 15세 무렵부터 대리청정을 하게 되는데 대리청정 기간, 아직 살아남아 있던 소론 즉, 경종의 죽음에 영조가 관련되어 있다고 믿는 세력의 움직임이 등장한다.
이른바 목호령의 고변과 토역경과 사건이 그것이다.
이 두 사건은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고 소론 출신 양반들은 영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도저히 타협이 안 되는 세력이 아직 남아있었던 셈인데 탕평을 주장했던 영조는 노론 세력과 함께 이 사건들을 기회로 이들을 뿌리 뽑을 작정을 한다.
영조는 소론 잔여세력들을 아울렀어야 했다. 어떻게든 노론과 소론, 두 당파의 공존을 모색해야 했다. 그렇지만 영조는 그렇게 하는 시늉만 했을 뿐이었던 것.
경종의 죽음에 의혹을 가졌던 당파, 소론은 죽기를 각오하고 덤벼들었다. 마치 불을 보고 달려드는 나방처럼.
대리청정 중이던 세자는, 영조와 노론과는 노선이 달랐다. 두 사건 즉, 목호룡의 고변과 토역경과 사건의 피의자들 중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여겨지는 인사들에 대해 탄원하는 노론들을 무마하기 시작했던 것. 당연히 노론은 세자를 정적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비극은 영조마저도 대리청정하고 있는 아들에 대해 노론과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 있었다.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는 혜경궁 홍 씨가 지은 <한중록>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기록한 역사평설이다. 이덕일 박사는 숭실대학에서 학부와 석박사를 전공한 명실공히 역사학자다.
그의 고증을 따르자면, 사도세자의 비극이 극대화되는 지점에 그의 아내, 혜경궁 홍 씨와 장인 홍봉한이 서 있다고 한다. 홍봉한이 노론 명문가의 일원이었고 그 딸은 지아비보다는 집안의 당색을 따랐다는 것이다.
나경언의 고변이라는 사건으로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 갇힌다. 나경언이라는 사람은 노론가의 종이 거나 중인 계급의 동생으로 알려진 인물인데, 이 사람이 단독으로 사도세자가 세력을 형성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투서를 한 것이다.
대리청정 중인 세자가 일개 중인의 모함을 받아 부왕의 지휘아래 국청을 당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세자 이선이 소론 당색을 표명하면서 발생한 일인 것이다.
<한중록>에 소개된 정신병이니 궁인들을 칼로 베어 죽였다느니 하는 말은 <영조실록>이나 기타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재조명을 해보면 맥락상 정신병만으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 이덕일 소장의 설명이다.
부친(영조), 친모(영빈이씨), 아내(혜경궁 홍씨), 장인(홍봉한), 처삼촌(홍인한) 등 가족 모두가 적으로 몰어 죽여야만 했던 사도세자.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기 1년 여 전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을 다녀온다. 그 행차에는 분조, 그러니까 조정의 절반이 대리청정을 하는 세자를 따라가는 대규모 행차가 있었다.
세자는 행차 중 또는 온양에 머무는 중에 벌어질 불상사들을 예방하는 모든 조치들을 일사불란하게 챙기고 처리한다.
실록에 따르면 수많은 인파가 세자의 풍모와 어진 정치에 감탄했다고 한다.
물론, 아내이자 정적이었던 혜경궁 홍 씨가 수십 년 후에 정리한 수필, <한중록>에서는 전혀 표현하고 있지 않은 대목이다.
대규모 행차를 다녀온 사도세자를 영조는 무려 1년 가까운 기간 대면하지 않았다. 세자의 대리청정도 중지된다. 대중의 인지도마저 급상승 중이던 소론 당파의 세자를 더이상 두고볼 수 없었던노론의 수장, 영조.
영조와 노론은 사도세자를 역모의 주모자로 만들어야 했다. 공작정치의 원조가 되는 세력이 노론이다.
사도세자와 소론의 발호를 미연에 방지하고 노론과의 약속과 명분에 예속되어 있던 영조는 그렇게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인 다음, 손자를 세손으로 정립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일제강점기 40년(을사늑약부터), 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민중의 삶에는 추호만큼도 관심이 없는 정치모리배들의 조상은 노론이다.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노론의 분탕질은 현재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