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내용 중에서
병자호란을 초래해 폭망 했던 군주가 있었으니 인조다. 서인들이 일으킨 쿠데타(반정)의 혜택을 입은 인물이다. 이른바 '택군'이라는 건데, 신하가 군주를 선택해 옹립하는 행위를 말한다. 왕이되 왕이 아닌 그야말로 꼭두각시 임금이 인조다.
서인이라는 당파세력의 제1 모토는 명에 충성하는 것이다. 재조지은 -임진왜란에서 명군이 조선을 구했다는-이라는 명분 하에 명청교체기의 국제정세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명을 지지하자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명과 청을 두고 등거리 외교(중립외교)를 하면서 조선의 이익이 무엇인지 고민하다 반정으로 축출된 것이다.
그러니 청에게 한번 두들겨 맞고 -정묘호란- 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국운이 다 된 망해가는 명에 충성하다가 병자호란을 당하게 된 것이다. 김훈이 <남한산성>에서 자세히 묘사했듯이 한겨울에 산성에 틀어박혀 농성을 하다가 끌려 나온 인조는 청태조에게 세 번 절하고 9번 바닥에 이마를 찧는 굴욕을 당한 것이다.
인조는 정말 인두껍을 쓴 짐승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10년 가까운 볼모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큰 아들 -소현세자-을 정적으로 여기고 독살시켰으니 말이다. 것도 모자라서 세손 3형제를 모두 죽이고 소현세자의 아내 강빈도 역적으로 몰아 죽인다.
세자를 죽이는 과정에 대해 언급한 영화는 <올빼미>다. 소현세자는 볼모생활을 하는 동안 청나라가 중원을 제해하는 과정을 목격했다. 명이 망해가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본 것이다. 아담 샬과 만나 서양 문물을 접하면서 상당한 과학지식도 익힌다. 소현세자가 볼모생활을 마치고 들여온 서양문물과 서적들은 정조 때 정약용에게 전해지고 수원성 축조에 활용된다.
소현세자는 유학만으로는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주교와 서양의 과학지식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하지만 조선의 인조와 서인세력은 인정할 수 없었던 거다.
효종은 소현의 동생, 봉림대군이었다. 형과 볼모생활을 함께 했지만 봉림대군은 무력을 강화하는데 무게를 둔다. 본인이 모든 무기를 다룰 줄 알았고 힘을 길러 반드시 호란 때 당했던 굴욕을 씻어야 한다고 결심한 인물이다.
인조와 서인세력이 형의 가족을 몰살하고 자신에게 왕좌의 기회가 왔을 때 효종은 인조와 서인세력도 청을 공격하는 북벌론에 동참할 줄 알았던 것이다.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이유다.
하지만 문약했던 조선의 서인세력은 무력강화에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반대했다. 서인의 태두는 우암 송시열이었다. 문제적 인물 송시열은 주자학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효종이 대군 시절 사부이기도 했다.
효종이 무력강화를 위해 양질의 군사 숫자를 늘리려고 할 때마다 서인세력은 백성의 고통을 이유로 방해한다. 그러면서도 서인정권은 일종의 세금인 공납제도의 폐해를 막기 위해 실시하자고 논의되는 대동법은 반대했다. 각지의 양민들이 국가에 바쳐야 하는 특산물을 대신 구해주는 방납업자들의 횡포가 심해 백성들이 고통을 호소했다. 족징, 인징 또한 자심했던 것이다.
김육이 주장한 대동법은 많은 재산(토지)을 보유한 자가 세금을 더 많이 내는 제도다. 지금이야 당연하다고 여기지만 양반들의 반대로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던 것이다. 하긴 종부세나 재벌기업의 세금을 깎고 서민들의 유리지갑에서 세금을 더 뜯어가는 어떤 정부와 닮기는 했다. 서인이 노론으로 노론 300년의 역사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점을 고려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효종의 북벌에 대한 의지는 확고했다. 효종의 나이 마흔에 오십 중반에 접어든 송시열이 독대(기해독대)를 해서 북벌에 대한 논의를 했다는 것은 유명하다. 하지만 북벌을 위한 빌드업을 사사건건 반대하고 방해한 인물이 송시열과 그 당파세력이었다.
효종이 허황된 꿈을 꾼 것은 아니었다. 청은 소수의 만주족이 지배층을 이루고 있지만 대부분의 지방 호족이나 피지배층 대부분은 한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효종은 기회를 잘 본다면 반드시 조선에게도 때가 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청의 지배층이 주색에 빠져있을 때 공격하면 주변의 한족들이 호응을 할 것으로 본 것이다.
서인정권에게 인사권을 비롯한 권력의 상당 부분을 양보할 테니 대신 북벌을 위한 계책을 마련하라는 것이 효종이 송시열에게 내린 명령, 아니 부탁이었던 것이다.
원기왕성하던 효종이 급서 한다. 머리에 종기가 났는데 어의 신가귀가 침을 놓은 것이다. 피는 멈추지 않았고 그렇게 사망. 허망하게 세상을 등졌다.
신가귀는 수전증이 있었고, 머리에 침을 놓으면서 혈자리를 범해 피가 멈추지 않았던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당시에도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신가귀는 병으로 집에 있었는데 갑자기 입궐해 침을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효종의 종기를 본 이기선이란 의관은 맥 짚는 법을 모른다며 꽁무니를 뺐다고 한다.
북벌을 위해 여자와 술을 멀리했던 나이 마흔의 왕은 송시열과 독대 후 두 달 만에 허무하게 세상을 떴다. 북벌의 꿈을 꿨던 왕 효종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