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트라바스>를 읽고
파트리크 쥐스킨트라는 작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빠른 걸음으로 인적이 드문 거리를 달리듯 걷는 초로의 남성이다. <좀머 씨 이야기>의 소재이자 주제이기도 한 이미지다.
이 작가는 어떤 주제나 사물에 대해 깊이 탐구한 끝에 한 권의 책을 내놓는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작가들과 같지만 그 깊이와 넓이가 특별하다. 집요하게 걷는 중년의 사나이는 그렇게 걷다가 사라진다. 향수에 집착한 청년이 결국 극한의 향을 만들기 위해 살인마가 되고 급기야 자신도 완전히 해체해 버린다. 이 세상에서 사라짐으로써 결말을 짓는다.
그의 처녀작 <콘크라바스>는 좀 다른 모양새이긴 하지만 어쨌든 본인의 실종을 암시하며 끝맺는다. 콘트라바스라는 악기는 현악기가 낼 수 있는 가장 낮은음을 연주하며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신음 또는 울음의 소리를 내면서 오케스트라를 완성시키는 역할을 한다.
오케스트라를 사회라고 비유하면 콘트라바스는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기층민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 속에서 존재의 이유와 필요가 분명하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케스트라 속 콘트라바스는 울음과 신음소리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주인공은 바로 그 <콘트라바스>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단원이다. 그는 콘트라바스처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회구성원이다. 그런데 소프라노 가수, 사라를 사모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콘트라바스 연주자가 사랑해마지 않는 대상인 사라는 연주자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공무원이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예술을 택한 주인공이 고른 악기, 콘트라바스는 바로 엄마에 대한 반항의 소산이다. 아버지는 여동생을 엄마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다. 엄마를 사랑하는 주인공은 엄마 대신 콘트라바스를 선택해 부둥켜안고 다니는 것이다.
콘트라바스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흥미롭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그리고 바그너와 슈만, 또 슈베르트 등 거장들이 콘트라바스라는 존재를 제대로 알고 활용했는가 하는 코멘트를 하는 대목에서는 파트리크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된다.
소리와 냄새의 대가,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모든 소음과 악취를 피해 철저하게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인적이 없는 길을 빠르게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