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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여자 Apr 29. 2023

머리를 했는데 만날 사람이 없다

# 그냥 가벼운 이야기


버스 정류장에 두 명의 여자가 있다. 한 명은 벽면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머리카락 깊숙이 집어넣고 둥글게 말아가며 머리카락을 연신 쓸어내린다. 원하는 결의 컬이 안 나오는 모양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여자는 반대편을 바라보며 머리카락을 한 가닥으로 세워 묶는 참이다. 한 올의 머리카락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필사적으로 쓸어 담는다. 집을 나서기 전 거울을 보며 단장을 하듯 그녀들의 모습은 아주 자연스럽다. 그곳이 외부에서는 투명하게 볼 수 있는 곳이란 사실을 잊은 듯하다.


정지선에 멈춰 신호를 기다리다 그녀들을 바라본다. 마치 잘 짜인 팬터마임을 보는 듯하다. 각자의 위치에서 열연 중이다. 그중 머리카락을 연신 쓸어내리던 여자가 투명한 문을 밀어내고 밖으로 나온다. 그 순간 바람을 타고 머리카락이 제 고집대로 다시 밖으로 뒤집힌다. 그녀는 오늘 그 뒤집힌 머리카락이 종일 신경 쓰일지도 모른다. 여자들에게 머리는 때로 그날 하루를 좌우하기도 한다. 길들여지지 않는 머릿결에 하루의 운을 점치고 조금 더 여민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운전석 앞 거울을 내려 머리를 비춰본다. 뿌리 부분에 검은색 머리카락이 제법 길었고 어중간한 길이라 어깨 끝에서 이리저리 뒤집어졌다. 그리고 가닥가닥 눈에 띄게 자라난 흰머리에 자꾸 시선이 간다. 그래도 다행히 오늘은 머리를 하는 날이다. 일주일 전에 미리 예약을 했고 어떤 스타일로 할 지도 미리 정해두었다. 부끄럽지만 연예인 사진을 내밀 생각이다. (레드벨벳 웬디의 레이어드 C컬펌을 보여줄 생각이다.)


오후 1시. 미용실에 도착했다. 이곳은 내가 오랜 유목생활을 끝내고 겨우 정착한 미용실이다. 굽슬굽슬한 펌을 희망했는데 너무 자글자글한 펌으로 심지어 머리카락을 태우기까지 한 미용실이 있었고, 짙은 갈색 염색을 주문했는데 마치 먹물을 끼얹은 듯 흑발로 만들어놓고 햇살에 한 올 한 올 비춰봐야 갈색빛이 난다던 곳도 있었다. 빛 한 줌 들지 않는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나는 어쩌란 말인가. 물론 저런 곳은 한 번 방문 후 절대 가지 않았었지만 그 머리가 다 자랄 때까지, 또는 펌이 다 풀릴 때까지 거울을 볼 때마다 괴로워해야 했다. 반면 번에 만족스러웠던 곳도 가끔 있었다. 하지만 단골이 만한 곳을 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그런 곳의 미용사는 어김없이 어느 이별의 말도 없이 다른 곳으로 떠나 시련을 안겨주곤 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나의 요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실물로 내놓는 곳을 찾았다. 까다로운 내게 그런 곳이 나타났다는 것은 많은 수고로움을 더는 일이기에 더없이 소중하다. 체인점에 근무하던 때 처음 만나 자신의 가게를 오픈하고 더 큰 곳으로 확장할 때까지 따라다녔다. 보통 연예인 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 해달라고 요구하면 그건 다 드라이한 거라며, 절대 그런 머리 안 나온다는 말로 내밀던 두 손을 무안하게 만들기 일쑤였는데 이 미용사는 최대한 근접한 실물을 내놓곤 했다. 젊은 남자 미용사인데 언제나 이 일에 진심인 것이 느껴진다. 그런 사람이 성장해 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도 기분이 좋다. 뭔가 순리대로 이루어지는 곳이 어딘가는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나는 대체로 미용실에서 잡지책을 보거나 휴대폰을 내리 보는 편이다. 애써 티 내지 않아도 타인의 성향을 살피는데 능한 이들은 금세 파악하고 내 곁에선 유독 고요한 때가 많았다. 나는 그냥 각자의 일을 하는 것이 편했다. 래도 이 과정 중 고개를 들고 정성 들여 보는 시간이 있다. 마른 머리에 아이롱으로 둥글둥글 웨이브를 만들었을 때. 정직하게 말린 머리가 층을 이루며 쌓여 있으면 그 모습은 마치 모차르트 같기도 한데 대신 누구든 좀 귀여워 보이게 만드는 재미가 있다. 셀카를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늘 참는다.


오랜 기다림 끝에 가볍고 세련된 단발이 되었다. 머리 하나로 기분이 좋아진다. 마무리가 진행되는 동안 이렇게 머리를 하고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뭘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집으로 가긴 너무 아깝다. 내향인이지만 소심한 관종인 나는 이런 순간을 누군가에게 보이며 그 시선으로 만족을 얻어야 하는 사람인데 그럴 곳이 없다. 대학가인 이곳에서 돈은 없어도 시간과 사람이 넘치는 대학생들을 보며 돈도 있고, 차도 있고, 시간도 있는데 만날 사람이 없는 내 모습에 조금 씁쓸해진다. 완전히 채워질 순 없으니 하나씩만 결핍이 주어지는 게임에서 사십 대인 난 사람을 택한 모양이다.


결국 아이들 줄 간식을 사들고 집으로 왔다. 출출해서 파전을 하나 구웠다. 신랑이 반죽을 해놓은 것인데 왠지 먹어야 할 것만 같은 책임감이 느껴진다. 신랑과 나는 보이는 것과는 달리 신랑이 섬세하고 여린 쪽이고, 내가 오히려 대담하고 덤덤한 편이다. 신혼 초 영화 '킹콩'을 보다가 킹콩이 앉아있는 뒷모습과 질펀한 엉덩이가 신랑의 뒷모습과 너무 비슷하여 줄곧 '콩'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휴대폰에 저장된 신랑의 별칭도 '콩'이었다. 반면 내가 강제로 입력해 준 신랑의 휴대폰 속 내 별칭은 '주머니 요정'이다. (그런 착각도 용서되는 신혼 아니던가) 우연히 그 문구를 목격했던 지인들은 '아주머니 요정'이냐, '포켓몬스터'냐며 비웃었지만 굳이 변경할 일이 없었기에 신랑 휴대폰 속에서 나는 여전히 주머니 요정으로 살고 있다.


그렇게 요정 같던(?) 내가 대범하고도 덤덤한 사람이 된 데는 신랑의 영향이 크다. 우유부단한 이 옆에서 늘 결정하는 일을 하느라, 다소 들뜨는 이 옆에서 차분함을 유지하느라 자연스레 시크한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 되려 나는 신랑이 좀 더 화통한 남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요즘 그것과 점점 더 멀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저 뭔가를 해주고 받는 이가 기뻐하는 모습에 소소한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런 연유로 내게 맛있는 것을 사(해)주고 잘 먹는 것을 보며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다. 대신 한 번 맛있다 하면 요령 없이 계속 사준다는 것이 문제다. 제철 과일을 다양하게 먹고픈 나의 취향은 고려치 않고 한 번 잘 먹는 건 물리도록 사 온다.


쑥과 마늘을 먹는 곰이 그저 좋아서 먹는 줄 알고 매번 박스채 동굴 앞에 두고 가며 돌아서서 미소 짓는 형국이다. 그렇게 지금 네 통째 반죽해서 만들어 놓은 파전거리다. 이제 그만 먹고 싶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 좋아하는 모습 앞에 차마 말하지 못하고 이렇게 또 먹고 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우리 집엔 엄마가 두 명인 것 같다는 농담을 하곤 한다.


그렇게 과한 애정을 담아 만들어 놓은 파전을 먹으며 밖을 내다본다. 너무 화창하다. 머리를 하고 오래간만에 화사해진 모습으로 집에만 있기가 너무 아깝다. 산책이라도 할 요량으로 외투를 걸치고 다시 나가본다. 바람이 시원하게 분다. 바람을 맞으며 걸으니 머리가 차르르 흔들린다. 가볍게. 만날 사람이 없으면 어떠랴. 조금 들뜬 기분이 되면 그만이지.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싶다. 바람이 불어 다행이다.


머리를 뒤로 넘겼다가 속으로 말아 넣었다가 잠시 멈춰 서서 다시금 쓸어내리는 나를 저만치서 누군가 보고 있다. 머리를 할 때가 된 여자일 것이다. 그녀를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걷는다. 내 연기도 열연으로 느껴졌을지 궁금해진다. 머리를 좀 더 격정적으로 흔들어본다. 때마침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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