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 없이 무작정 떠난 여행기
갑자기 강원도가 가고 싶었다.
난 바다보다는 산을 좋아한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을 찾던 중 정선이 눈에 띄었고 정선을 갈거면 역시 민둥산을 가야지.
..그렇게 민둥산을 가게 되었다.
난 평소 해보지 않은 것을 행할 때에는 수 차례 고민을 반복한 끝에 실행한다.
(대개는 고민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엔 어쩐 일인지 그냥 떠나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떠나기 하루 전 정선을 포함한 강원도 산간지방에 대설경보가 내려졌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냥 산행을 강행했다.
출발 지점인 증산초교 앞, 시계는 오후 3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백팩 안에는 생수 한모금, 그리고 1칼로리 조차 없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깡이었을까?
내 머릿속은 단 하나의 생각 뿐이었다.
왕복 3~4시간이 걸린다고 했는데, 난 걸음이 좀 빠르니까 어둠이 깔리기 전에 하산할 수 있겠지..
등반 시작 후 약 30분이 지났을까? 생수 한병은 챙겨올껄 후회가 됐다.
생각했던 것 보다 초입이 가팔랐던 거로 기억한다.
민둥산은 급경사 구간과 완경사 두가지 코스로 나뉘어 지는데, 가는 길에 매점에 들러 생수 한병이라도 사야겠단 생각에 완경사 코스를 선택했다.
(이런 악천후에는 매점 운영을 안한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ㅎ)
등산을 시작한지 50분이 지났을까? 단 1초도 쉬지 않고 올라 왔으니 이제 정상이 눈에 보일법도 한데 고개를 들어보니 내 시야에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들만 보였다.
목이 너무나 말랐다.
갑자기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라면 하산하기 전에 땅거미가 나를 맞이할 것만 같았다. 이런 산속에서 맞이하는 어둠은 정말 칠흙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등반을 포기하면 맛있는 저녁을 먹고 빠르게 두발 뻗고 잘 수 있을테지"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고작 이 작은 유혹 조차 이겨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그 어떤 고행도 이겨낼 수 없을 거야"
그렇게 산행은 계속 되었다.
올라가는 길에 사람 한명만 만났으면,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 한마디 건넬 사람 있었으면,
물 한모금 얻어 마실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행운은 나에게 찾아 오지 않았다.
그저 언제 다녀간건지 모를 사람들의 발자국들 만이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발자국들이 나의 목을 축여주지는 못해도 (표지판이 거의 없다시피하여) 불친절한 이 산속에서 이정표가 되어줬다.
등반한지 약 1시간이 좀 지났을까? 저 멀리 화장실이 보였다.
이 길은 유독 발자국이 없었다.
갑자기 나의 동료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곧 이어 사람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아마도 네 발 짐승의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 들이 나 있었다.
갑자기 곰이 튀어나오면 어쩌지?
그럼 가방 안에 있는 셀카봉을 휘둘러 줘야 겠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몇 걸음 안가니 정상까지 40분이 남았다는 팻말이 보였다.
지금 시간이 4시 30분정도니까 좀 빠른 걸음으로 가면 정상에서 5시, 사진찍고 하산하는데 1시간 반정도 걸린다면 일몰 전까지 하산 완료하겠지.
그러나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시 끝을 모르는 오르막길이었다.
지금 내 귀에는 내 발이 두껍게 쌓인 눈을 밟으면서 만들어 내는 뽀드득하는 소리, 까마귀가 울어대는 소리, 그리고 비행기가 차가운 겨울 창공을 가르는 소리 오직 3가지였다.
갑자기 사람의 말소리나 개 짖는 소리, 비둘기의 날개짓이 만들어 내는 소음, 심지어 자동차 엔진소리가 그립단 생각이 들엇다.
2025년 서울 사람이 거의 100년을 살면서 도심에서 철저하게 벗어나 있는 순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어둠을 두려워하고 있고, 목이 너무나 말라도 물 한 모금 마실 수 조차 없는 내 자신이 나약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역사에는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기 위해 목숨을 건 여정을 감행한 사람들이 많았다. 신대륙이라거나 히말라야 산맥이라거나..
그런 것에 비하면 이 산행은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어따.
곧 이어 억새꽃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정상에 거의 다 왔다는 뜻이다.
이 고된 여정도 얼마 안남았구나.
저~~멀리서 반가운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강쥐도 2마리 이상 보였다.
목이 너무 말라서 물 한모금만 부탁해야지, 하고 생각했다.
(목마른 나그네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정상석 부근에서 절경에 취해 사진을 찍다보니 젊은 남성분이 도착하여 인삿말을 건넸다.
사람이 어찌나 반갑던지.
정상에 도착해서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가을이 성수기라는데 겨울 풍경 또한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게 값어치가 있었다.
그러나 풍경보다 더욱 값진 것은 생에 최초로 여행지에서 '중도 포기'라는 생각을 떠오르게 한 이곳, 민둥산을 정복했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등반이 어렵지 않은 산일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특별했다.
과정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으나 결과는 생각대로 였다.
모든 것이 갖춰진 상태에서 관악산, 아니 그보다 쉬운 인왕산 정도의 산행을 기대했으나 이 날 나에게는 그 전까지 가장 힘들었던 용문산보다도 더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해냈다.
계획 없이 혼자 떠난 여행에서 여행의 이유를 발견한것 같다.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사물을 보는 시야가 넓어졌다.
현실적인 문제로 상념에 잠기던 일상에서 벗어나니 새로운 관점에서 나를, 세상을 보게 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