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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원 Dec 29. 2022

드디어 퇴사한다. 내가 아닌 그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 그를 매일 봐야한다는 것.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엄청난 에너지를 요구한다. 결국 나를 갉아먹는 일이라며 마음을 추스르고 싶어도 그 미운 이를 매 봐야 한다면, 또 그를 만나는 장소가 직장이라면, 그래서 피하고 싶어도 피하지 못한다면 그땐 어찌해야 할까.


올해 6월의 일이다. 6월 1일 지방선거로 모두가 공휴일의 여유를 누릴 때 난 전날인 5월 31일부터 밤샘 근무를 해야 했다. 매년 이 맘 때마다 철야가 반복되는 일인 데다, 이번엔 진도가 유독 더뎌 더 오래 걸릴 거란 말들이 많았다. 5월 31일 시작된 업무가 다음날 낮까지 이어질 것이란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팔팔한 나이도 아닌 내가 그 스케쥴을 감당할 자신은 도저히 없었다. 법적 근로시간을 훌쩍 넘는 업무강도를 감내하고 싶지도 않았다.


난 직장상사에게 요청했다. 밤샘이 길어질 것 같으니 전날 재택근무를 하겠다고. 어차피 밤에 본격적으로 해야 할 업무여서 낮에 좀 쉬엄쉬엄 일하며 체력을 보충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반응이 황당했다. 그는 나에게 버럭 짜증을 냈다. 회사에서 코로나 방역지침이 풀리면서 재택근무를 중단했는데, 내가 하게 되면 자기 입장이 곤란하다는 반응이었다. 그에게 오만정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다음날 밤을 새야 하는데도 그날 밤 분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평소 데면데면한 관계였다면 그렇게까지 화가 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함께 근무한 1년 반 남짓한 시간동안 경력대비 역량이 다소 떨어지는 상사임에도 항상 난 발벗고 그를 도왔다. 굳이 내 업무가 아님에도 그의 홍반장 역할을 자처하며 난처한 일을 여러 번 넘기게 해줬다. 그런데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 화를 내며 거부감을 드러내다니. 인간적인 배신감에 부들거렸다.


그나마 임원분께 난처함을 호소해 재택근무를 할 순 있었지만, 어찌됐던 낮부터 다음날 오후 12시가 될 때까지 27시간을 내리 일한 나는 몸에 무리가 왔다는 걸 직감했다. 새벽 3~4시경부터 엉덩이부터 종아리까지 알 수 없는 통증이 엄습했고 다리를 절면서도 쉬지 못했다. 밤샘 때문에 몸살이 났나 싶었지만, 그 통증은 이틀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뭐가 원인인지 모르던 나는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서 알게 됐다. 40평생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던 허리디스크가 생겼다는 사실을. 허리로 고생해본 적 없는 나에게 하필 얄궂게도 밤샘 근무 후 허리디스크가 생긴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몸에 이상이 생기고 나니 그가 더 미워졌다. 그가 이 일의 모든 발단인 것만 같았다. 회사에 출근해서 얼굴을 보는데 속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화를 낼 순 없었다. 그는 나의 직장상사이니까.


문제는 일주일 후 또 일어났다. 회사에서 준비한 큰 대외행사가 있었는데, 허리디스크로 출퇴근도 힘들었던 나는 그 행사에 참석하는 게 감당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상사도 내 몸 상태를 알고 있던 터라 솔직하게 말했다. 몸이 안좋아 도저히 행사에 참석하기 힘들 것 같다고, 죄송하다고.


그는 애처로운 듯한 얼굴로 자기도 안다고. 그래서 생각해봤다고. 낮에 집에 갔다가 저녁 행사때 나오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다. 엄청나게 나를 배려해주는 듯한 말투로 ‘그래도 나와달라’는 말을 드럽게도 어렵게 전달하는 그. 아, 정말 답이 없는 인간이구나, 깨달은 나는 집에 가서 일만 실컷 하다가 행사 시간에 맞춰 지하철 1시간 거리인 그 곳으로 어쩔 수 없이 나갔다. 가보니 그 곳은 친목을 위한 술자리 모임 같은 분위기였다.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밤 10시가 넘어 11시를 향할 때까지 앉아 있었다. 앉아 있는 동안 생각했다. 이런 자리에 나 하나 없는 게 도대체 뭐가 그리 문제였을까 하고. 그리고 결심했다. 상사란 인간하고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겠구나.


이게 올해 6월의 일이다. 그리고 올해가 이틀밖에 남지 않은 지금, 난 내년 1월 1일부터 그 인간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 퇴사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라 그가 말이다. 현재 그는 마치 엄청나게 힘든 일에 시달려 참다 못해 나가는 것처럼 피해자 코스프레를 시전 중이시다.


왜냐, 그 전까지 두 발 벗고 그를 돕던 내가 그의 민낯을 알고난 후 도움을 끊었기 때문이다. 그는 6개월만에 너무 힘들다며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마치 나를 부모라도 죽인 원수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나는 6개월 전 허리디스크를 시작으로 얼마 전에는 그 인간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로 이석증까지 생겼다. 몸이 아픈 건 다행히 치료를 받으며 나았지만 그에게 받은 마음 속 상처와 스트레스는 지금도 쉽게 가시지 않는다. 아직도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들끓는 분노를 참느라 괴롭다. 그래도 참아보려 한다. 어차피 내일 하루만 더 보면 더 이상 볼 일 없는 사람이니까.


올 한 해 정말 고생 많았다, 내 자신아. 내년엔 올해보다 훨씬 더 많이 행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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