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에 다시 찾은 '백사실 계곡'
내가 백사실계곡을 처음 만난 때는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어느 봄날이었다. 당시 나는 화사한 봄이 무색할 만큼 마음의 여유 없이 암울하게 지내고 있었다. 현주 언니는 마치 그런 내 마음을 알고 있었다는 듯, 어느 날 백사실계곡에 가자고 했다. 부암동에 사는 언니는 중국에서 박사과정으로 중국사를 전공했을 만큼 역사에 능통했다. 그런 언니가 역사적으로 특별하고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한 터라 나는 의심 없이 언니를 따라나섰다.
백사실계곡, 부암동 백석동천은 조선 중기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1556~1618)의 호가 ‘백사’라는 이유로 한 때 이항복의 별서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2012년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 일대가 한 때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소유였음을 입증하는 문헌자료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백석동천 별서터 앞에 세워진 안내문에는 별서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세속의 벼슬이나 당파싸움에 야합하지 않고 자연에 귀의하여 전원이나 산속 깊숙한 곳에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려고 따로 지은 집’이라고. 언니와 별서터에 도착한 나는 안내문을 읽고 나서야 그곳을 조금 이해하게 됐다.
“언니, 여기 너무 좋다! 자연에 귀의해 유유자적하게 살려고 지은 곳이래.”
“글쎄, 자연에 귀의하려면 시골로 내려가야지, 왜 궁궐이 지척인 이곳에 집을 지었을까?”
언니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세속을 떠나려면 저 아래 지방으로 내려가는 게 맞다는 주장이다. 왜 하필 사대문과 가까운 자리에, 그것도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별장을 만들었겠냐며, 다른 의도가 있을 것 같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역사학 박사 언니의 말은 역사와 담쌓은 나에게 꽤나 그럴듯하게 들렸다. 언니는 ‘양반놈’들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여쁜 기생들과 술판을 벌이기 위한 장소로 이곳을 이용하지 않았겠냐고 했다. 이 정도 높이는 돼야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할 수 있고, 방탕하게 놀아도 아무도 몰랐을 거라면서. 또 복잡한 세상일은 외면하고 싶지만, 속세와 완벽하게 단절되긴 두려운 얄팍한 마음도 있었을 거라고. 나는 특유의 시니컬한 표정과 말투로 논리를 펼치는 언니에게 설득당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당시의 진실이 어떻건, 봄날의 백사실계곡은 너무나 아름답고 고요했다. 사방은 봄을 알리는 초록빛깔 풀 내음으로 가득했다. 조선시대 것이라기엔 너무나 반듯하게 모양을 간직한 주춧돌이 연달아 놓인 사랑채 터와, 그 옆에 둥그스름한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연못이 보였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엔 이곳에 물이 고여 꽤 근사한 풍광을 이룬다는데, 장대비가 내린 후 맑게 갠 날 찾으면 얼마나 멋질지 절로 상상이 됐다. 풍경을 바라보며 두 눈에 초록빛을 한가득 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았다. 근처 돌다리 아래에는 야트막하게 시냇물이 졸졸 흘렀다. 그 앞에 도롱뇽 서식처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1급수 지표종인 도롱뇽이 사는 서울 사대문 근처의 집터라, 뭔가 신비로웠다.
문득 내가 양반이었어도 이곳에 집 짓고 살았겠단 생각이 들었다. 술판 좀 벌이면 어떻고, 세상과 담 좀 쌓으면 어떤가. 당시 여러 이유로 지쳤던 나는 이처럼 조용하고 경치 좋은 곳에 별장을 짓고 숨을 수 있었던 이 터의 주인이 너무나 부러웠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아지트를 만들고 싶기 마련이니까. 수백 년 전 누군가의 은밀한 아지트는 주춧돌 몇 개만을 과거의 영광으로 남겼지만, 그 쓸쓸한 영광마저 샘이 났다. 나뭇잎에 햇살이 반사돼 유난히 푸르렀던 봄날, 현주 언니를 가이드 삼아 마음의 풍류를 즐긴 나는 좋았던 느낌만 간직한 채 그곳을 서서히 잊어갔다.
5년이 흐른 어느 만추에 나는 우연히 백사실계곡을 다시 찾았다. 오랜만에 그곳에 다다르자 푸르름은 간데없고, 사방은 노란빛이 가득했다. 발에 차이는 것은 낙엽뿐이었다. 그런데 왠지 쓸쓸하지 않았다. 오히려 늦가을 백사실계곡에서는 봄 향기가 나는 듯했다. 자박자박 낙엽을 밟자, 나의 눈엔 봄꽃이 만발했던 5년 전 백사실이 펼쳐졌다. 별서터도, 오솔길도, 도롱뇽 서식처도 5년 전 그대로였다. 2~3년만 지나도 강산이 변하는 요즘, 예전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이곳이 반가웠다. 그 순간 현주 언니를 못 본 지도 수년이 지났다는 걸 깨달았다.
“아프면 꼭 전화해, 미안해하지 말고. 혼자 사는 사람은 아픈 게 제일 문제니까. 진짜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 둘 중 안부를 먼저 묻는 쪽은 항상 언니였다. 통화 말미에는 건강하라는 말과 함께 혹시라도 아플 땐 연락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바쁘단 핑계로 만남을 미뤄왔지만, 꼬박꼬박 때가 되면 나의 안위를 물어봐 준 사람. 한창 깊어진 가을에 다시 찾은 별서에서 떠오른 사람은 다름 아닌 현주 언니였다.
갑자기 나는 올해가 가기 전 언니에게 안부를 묻고 만남을 청하고 싶어졌다. 마음 하나 기댈 곳 없던 나를 잠시나마 쉬게 해 준 사람에게 나도 한 번쯤은 별서가 되어주고 싶어서다. 그리고 봄이 오면 다시 이곳을 찾아야겠다. 봄 내음 가득한 백사실계곡에 잠시 머무른다면, 누군가를 쉬게 해 줄 유유자적한 마음이 생길 것만 같으니까. 언니와 함께 온다면 조금 더 행복하겠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린 후 맑게 갠 날 언니와 이곳 오솔길을 걷고 싶다.
* 이 글은 한국여행작가협회의 여행작가학교 29기 문집 <이구동성 여행이야기>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