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 속 밝은 달을 마시니 술잔 비우면 달 또한 비네.
다만 술잔을 언제나 채운다면 달도 언제나 떠오르리라.’
이 문장은 조선 영조 대에 대제학을 지낸 이진망이 쓴 시의 일부로, 왠지 정조와도 묘하게 어울리는 표현이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방문하면 종종 방화수류정에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방화수류정과 그 앞에 펼쳐진 작은 연못 ‘용연’은 한잔 술을 절로 부를 만큼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또 밤에는 술을, 술을 마신 후엔 로맨스를 떠올리게 할 만큼 낭만적이다.
정조는 당시 조선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유명한 애주가이자 골초였다. 그의 술버릇과 담배사랑은 주변에서 말릴 수 없을 정도로 유난스러웠다. 심지어 괴팍했던 할아버지의 성정을 닮았는지 성격도 불같았다. 그런 그의 술버릇은 술을 못 먹는 사람에게 폭탄주를 만들어 억지로 먹이는 것이었다. 사발 같은 잔에 가득 따라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먹였다고 한다. 그걸 마시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유일하게 정약용 정도였다고 하니, 요즘 시대였다면 ‘진상 선배’ 내지 ‘꼰대 상사’로 불려도 할 말이 없을 일이다.
하지만, 나는 술과 담배를 지독히 사랑한 정조에게서 또 다른 슬픔을 본다. 비명에 아버지를 잃고 왕이 될 때까지 숨죽여 살아야 했던 세손 시절.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모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노론 세력은 세손 이산(정조의 이름)이 왕이 될 경우, 연산군처럼 자신들에게 복수할 거란 두려움에 그를 끊임없이 모방하고 비방했다. 이산은 암살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첫닭이 울 때까지 잠이 들지 않고 책을 읽었다. 공부를 좋아한 것도 이유였겠지만, 그것이 어린 세손의 유일한 생존 방법이었을 거라 생각하니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그랬던 정조는 왕이 되자마자 대신들 앞에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공표했다. 어린 나이, 인고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이 말이 얼마나 하고 싶었을까. 정조의 마음속엔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항상 존재했다. 왕이 되자마자 아버지를 기리는 작업에 들어간 정조. 아버지를 더 양지바른 곳에 모시고 싶었던 정조는 지관이 명당으로 꼽은 수원에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고 화성을 짓는다. 그중 방화수류정은 당초 수원화성의 동북쪽 군사지휘부인 동북각루로 만들었지만, 아름다움에 경치를 조망하는 정자의 역할도 겸하게 됐다. 그렇게 방화수류정은 정조가 신하들에게 폭탄주도 먹이고 담배도 피우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안식처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왕도 사람이거늘, 유독 힘들고 지칠 때 ‘혼술’을 하며 왕으로서의 짐을 잠시 내려놓은 날도 있지 않을까. 누구나 사회적 위치를 모두 내려놓고 오롯이 자연인으로 존재하고픈 때가 있기 마련이니. 나는 잠시 상상해본다. 방화수류정에서 밝은 달을 보며 혼자 술 한잔 걸치고 아버지를 떠올렸을 그를. 그리고 눈물을 훔쳤을 그를. 술잔 속 달을 마시고, 다시 채운 술잔 속 떠오른 달을 보며 그리움을 달랬을 그를. 그렇게 겨우 마음을 달래고 다시 일상 속 왕으로 돌아갔을 그를. 달빛이 유난히 밝은 어느 가을밤, 나도 방화수류정에 올라 그를 생각하며 술 한잔 기울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