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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 Sep 11. 2021

로마 분열 그 후, 어둠의 시작

서양미술사의 계보 #4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콘스탄티노플 천도 이후 분열된 제국과 함께 영광스런 로마 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린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고대’(古代)라고 칭하는 시기도 대강 여기까지 일 것이다. 이어 등장하는 중세 시대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5세기부터, 다시 인본주의가 도래할 15세기경 이전까지 약 천 년의 시간을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인간의 지성적인 발전보다 엄격한 종교(기독교) 교리의 지배가 우세했던 중세는 종종 암흑기(Dark age)라고 불린다. 글쎄. 이에 대한 숱한 반박은 이미 식상한 이론이 되었을 만큼 진부한 주제다. 어쨌든 육체적인 것을 지양하고 정신적인 것을 지향했던 중세의 미술은 신비로운 영적 묘사와 가톨릭의 교리 전달에 치중하며 ‘종교의 시녀’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중세 미술은 박해의 예술인 초기 기독교 양식을 발판으로, 장엄한 비잔틴 미술, 웅장한 로마네스크 미술, 섬세한 고딕 미술 등 빛나는 예술적 유산을 남겼다.


그것이 열린 나무에서 그것을 수확하는 수녀를 형상화 한 14세기 채색 필사본 『장미이야기』 여백 삽화. 프랑스 국립 도서관 소장.


아. 혹시라도 중세미술은 하나도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계시다면 이 채색 필사본의 여백 삽화(페이지 주변부의 여백을 채운 그림)를 추천한다. 어익후 숭해라 프랑스 파리의 서적상(libraires, 당시 책을 만드는 방식 특성상 인쇄와 출판을 함께 담당했음) 리샤르 드 몽바스통의 작업장에서 제작된 이 채색 필사본의 여백 삽화는 리샤르의 아내였던 잔 드 몽바스통의 작품이라고 한다. 실로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둘째치고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나고 자란 여성의 머리와 손에 의해 창조된 발상이라는 점이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의 당혹감을 자아내고 있다. 세상에 이 장면 외에 다른 당혹스런 장면을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https://gallica.bnf.fr/ark:/12148/btv1b6000369q/f218.item.zoom)


중세의 문화적 변용(變容)

중세 시대는 이전 세계의 관념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버리는 거대한 변혁이 일어나는 시기다. 우선 1)문화적 주도권이 로마를 중심으로 한 지중해 세계에서, 현재의 프랑스 및 독일 등지의 알프스 이북 지역으로 옮겨가게 된다. 또한 2)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함에 따라,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다신교를 비롯한 다른 모든 종교를 누르고 유일한 신앙으로 떠오르며 인간을 지배하는 강력한 정신적 질서를 구축한다. 이에 따라 3)현세보다 내세를 지향하는 경향이 짙어지면서 인간의 육체를 아름다운 것으로 여겼던 그리스·로마의 전통이 전복된다. 육신이 곧 타락의 대상으로 전락하자 누드의 묘사는 사라졌고, 사물의 사실적인 묘사와 재현보다 종교적 교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미술이 나타나게 된다.


로마 제국의 분열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30년 로마 제국의 수도를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로부터 현재의 터키 이스탄불에 해당하는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으로 옮기며 노바 로마(Nova Roma), 곧 '새로운 로마'를 선포한다. 이는 로마의 완전한 이분에 방점을 찍는 대사건이었지만, 사실 제국은 애저녁에 분열이 시작된 상황이었다. 제정 최전성기로서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구가한 오현제 시대를 지나 보낸 로마 제국은 50년 동안 18명의 황제가 쿠데타-암살-쿠데타-암살의 반복으로 빈번히 교체되는 군인 황제 시대막장테크의 극심한 혼란기를 맞이한다. 여기에 추가로 게르만족의 침입과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갈등이 더해지며 말 그대로 헬게이트가 열려버린 것이다.


로마 제국 사분치제의 창시자이지 후기 로마 제국의 전제정을 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측면 초상을 담은 로마 청동 주화. 바라캇 서울 소장.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 디오클레티아누스 등 비교적 걸출한 황제들의 등장으로 3세기에 벌어졌던 로마 제국의 극심한 혼란기는 그럭저럭 무마된 것 같았다. 이 중,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제국의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통치를 위하여 사분치제(혹은 사두정치)를 도입했다. 사분치제는 요컨대, 아나톨리아와 이집트 등 오리엔트 지역을 다스리는 동방 정제 및 부제, 그리고 이탈리아와 히스파이나 등 유럽과 북아프리카 등지를 맡은 서방 정제 및 부제 등 총 4인의 황제가 제국을 분할 통치하는 방식이다. 이와 같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분치제는 후기 로마 제국과 이후 동로마 제국 체제의 기반을 이루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서방 부제이자 정제였던 콘스탄티우스 1세와 성 십자가 및 성정을 발견한 성녀 헬레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인 헬레나의 신분이 다소 애매한데, 고귀한 신분은 아니었던 듯. 콘스탄티우스 1세는 헬레나와 이혼하고 서방 정제였던 막시미아누스의 의붓딸 테오도라와 재혼하는 다분히 정치적인 행보를 보였다. (훗날 아들도 똑같은 짓을 하며 부전자전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어른의 사정으로 인해 다소 애매한 위치에 놓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군사적, 정치적 경력을 쌓으며 서방 부제까지 올랐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12년 사분치제의 혼란 속에서 정적 막센티우스와의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 승리한다. (십자가 꿈을 통한 승리라는 전설이 유명하다.) 이후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한 데 이어,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열어 아리우스 파 논쟁을 종식한 사건(아리우스 파 이단 규정 및 삼위일체론 정립)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치하에 이뤄진다. 그리고 330년, 드디어 로마 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천도하기에 이른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초상 조각(좌, Photo by Jean-Christophe BENOIST)과 3D 스캐닝을 활용한 전체 복원도(우, © 2007, ArcTron 3D GmbH)


콘스탄트누스 대제의 크고 아름다운 초상 조각은 로마 카피톨리니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 이는 매우 큰 전신상의 일부로,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관람자의 시선을 감안하여 의도적으로 얼굴을 크게 제작한 탓에 괴랄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렇게 부숴질 줄은 몰랐겠지. 3D스캐닝을 통해 제작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각상 전체 복원도를 참고하자. (https://www.b-f-k.de/webpub01/cnt/schaichpic8.htm)


여기서 잠깐. 오해한 사람들이 매우 많은 부분을 잠시 짚고 넘어가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은 종교적 자유를 인정한 수준이었을 뿐, 로마의 국교로 선포한 것은 아니었다. 진짜다. 제발 믿어줘 로마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한 새로운 사회 질서(=기독교)가 필요했을 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를 당장 국교로 삼거나 기존 로마의 다신교를 폐지하여 또 다른 불안을 키우는 무리수를 결코 두지 않았다. 잊지 말자.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한 황제는 테오도시우스 1세로,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이 강경파 인물은 델포이 신전을 폐쇄하고 이교도를 탄압한 행적으로 유명하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치하에 로마 제국은 잠시 단독 황제의 통치가 이뤄지기도 했지만, 그의 사후 두 아들이 동로마(아르카디우스)와 서로마(호노리우스)를 분할 계승하며 제국은 완전한 분할을 겪게 된다.


동로마와 서로마, 운명의 기로

서기 395년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호노리우스는 숱한 내전으로 인해 부실해진 국력과 게르만족 등 외부의 끊임없는 침입, 충분한 군사력과 유능한 관료 집단의 부재 등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서로마 제국은 404년 이탈리아 북부의 라벤나로 수도를 옮기며 어떻게든 명맥을 이어가고자 했으나… 결국 476년 완전히 망했어요 테크를 타게 된다.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게르만계 용병으로서 서로마 제국 장군이기도 했던 오도아케르에 의해 강제 폐위당했고, 서로마의 황제위가 동로마에 반납되면서 사실상 서로마의 황제는 사라진 셈.


‘독일 르네상스의 거장’ 알브레히트 뒤러가 1511년경에 그린 샤를마뉴의 상상화. 뉘른베르크 게르만 국립박물관 소장.


4세기 후반부터 (아마도 훈족 때문에) 시작된 대이동 이후 게르만족은 유럽 각지에 정착하며 개독교로 개종하거나 라틴화된 문화를 꽃피웠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권력의 공백기에 처한 게르만 계통의 왕국들은 서로 치열한 다툼을 벌였고, 이 중 프랑크 왕국을 설립한 프랑크족이 두각을 드러냈다. 프랑크 왕국의 첫 왕조인 메로빙거 왕가를 실질적으로 개창한 클로비스 1세(재위 481-511)는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며 북유럽 기독교 문화의 초석을 마련한다. 그리고 메로빙거를 계승한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카롤루스 마누스=카를 대제=카를로 대제=찰스 대제… 재위 768-814)는 서기 800년 로마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 황제(=신성로마황제)로 추대된다. (https://www.gnm.de/index.php?id=747&L=1)


이는 옛 로마 제국의 정통성과 권위가 필요했던 샤를마뉴, 그리고 성상파괴령(Iconoclasm) 등의 사태로 인해 동로마 제국과의 껄끄러운 관계 청산을 원했던 교황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실권보다는 명예직에 가까웠을지라도 어쨌든 신성로마황제로서 제국을 부활시킨 샤를마뉴는 현 독일의 도시 아헨을 프랑크왕국의 수도로 삼아 아헨 대성당을 건립하고 각지의 수도사와 학자, 필경사, 예술가, 건축가 등을 초빙하여 학문의 보급과 지식인의 배출에 박차를 가하는 등 종교적, 문화적, 무엇보다도 정치적 부흥을 과시하고자 했다. 일명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도 불리는 샤를마뉴의 문예부흥 정책은 상당한 성과를 냈는데, 수도원을 중심으로 그리스·로마의 고전 문헌과 성서 주해 등의 종교 문서를 필사, 복제하는 대규모 필사 작업이 이뤄졌고 카롤루스 문체의 정립을 통해 난삽하게 기록됐던 라틴어의 가독성을 높인 것도 이 시기였다. 고맙읍니다고맙읍니다 


프랑크 왕국의 분열 이후 동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됨에 따라 10세기 초반에 설립된 독일 왕국의 오토 1세(재위 936-973년)는 교황 요한 12세의 지원 요청을 받아 이탈리아 왕국과 로마를 장악하고 샤를마뉴의 후예를 자처하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한다. 또한 서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를 계승한 위그 카페(재위 987-996년)는 카페 왕조를 창건하며 프랑스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된다. 점점 꼬이는 개막장족보 일련의 사건들은 권력과 문화의 주도권은 로마 제국의 지중해로부터 점차 알프스 이북의 대서양으로 이동하는 양상을 잘 보여준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achen_Germany_Imperial-Cathedral-01.jpg)


샤를마뉴의 종교·정치적 업적을 상징하는 아헨 대성당. 초기 기독교, 비잔틴, 전기 로마네스크 양식이 결합된 카롤링거 건축을 엿볼 수 있다. © CEphoto, Uwe Aranas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서로마 제국에서 헬게이트가 열리고 그 계승자들이 대환장파티를 벌였던 반면,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은 상대적으로 단일 제국의 안정적인(?) 통치 노선을 유지했다. 사실 동로마 제국의 시작을 330년 비잔티움 천도에 둘 것인지, 394년 기독교 국교화로 볼 것인지, 아니면 395년 아르카디우스의 동로마 황제 등극으로 간주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서기 4-5세기경에 시작되어 1453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함락까지 약 1000년 동안 찬란한 역사를 써 내려간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의 전통과 중세 가톨릭 문화의 유입, 그리고 지정학적 위치에 따른 아시아 문화의 융합으로 이뤄진 비잔틴 양식을 꽃피우게 된다.


국내에서 만나는 후기 로마 미술

사실 이번 편은 로마 제국 후기의 분열로부터 중세 시대로 넘어가는 그 어디쯤의 개괄인 탓에 특정 미술 작품이나 관련 전시를 소개하기는 애매하다. 동아시아 미술 및 동시대 예술에 편중되어 있는 국내 박물관과 미술관의 사정을 생각하면… 서구 중세 미술을 만날 수 있는 곳? 솔직히 기획전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판이다. 단, 로마 후기 황제들의 초상이나 고대 주화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바라캇 서울 갤러리의 로마 코인 컬렉션을 추천한다. 각 로마 황제들의 치세에 발행된 동전들은 한 면에는 황제의 측면 초상을, 다른 면에는 특정 신이나 고귀한 기물의 형상이 나타나 시대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또한 서구권에서는 이미 컬렉션 한 방식으로 자리매김한 코인 주얼리 컬렉션도 풍부하게 갖추고 있어, 고대 주화와 현대 주얼리의 조화는 물론 옛 유물을 향유하는 새로운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청동 주화 한 쌍이 있는 금 커프스 링크. 바라캇 서울 소장.


참고문헌

마리아 테레사 구아이톨리. 『로마』. 김원옥 옮김. 생각의나무, 2007.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백승길, 이종숭 옮김. 예경, 2013.

캐롤 스트릭랜드. 『클릭 서양미술사』. 김호경 옮김. 예경북스, 2010.

H.W. 잰슨, A.F. 잰슨. 『서양미술사』. 최기득 옮김. 미진사, 2001.



미술사 연구는 오늘날의 수많은 학자들만큼 다양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현재 진행형의 영역에 놓여 있다. 특정한 예술품이 만들어진 시기에 태어나지 않은 이상 절대적인 진실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 미술사학 역시 부단한 연구와 사례 분석을 통해 시간의 베일에 가려진 진실에 근접하고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 가장 타당한 해석을 찾아갈 따름이니까. 그러니 의견의 방향이 다르다고 맹렬한 비난을 하시면 아마 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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