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지요 카이 유후인에 #1
그래, 카이 유후인에 가자.
직장인 둘이 일하다가 새벽에 인천국제공항으로 가는 건 생각보다 더 스릴 넘치는 작업임. 이제 막 눈을 감았다 싶었는데 지금 당장 세수 안 하면 니네 ㅈ된당-이란 의미의 알람이 울리기 시작. 30분 후 택시기사님도 도착하셔서 이리오너라-시전. 어차피 사전 수속 다 끝냈고 태워 보낼 짐도 없고 공항에서 할 건 더더욱 없는데 왜 이렇게 서두른 건지, 매번 이성은 한 템포 늦게 돌아온다. 씁쓸하기가 지옥 같은 파란병 콜드브루에 유통기한이 간당한 우유와 설탕을 대강 때려 넣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쓴 나, 칭찬한다.
인천-후쿠오카 구간의 대한항공은 약 1시간 30분 만에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하는데 중간에 식사도 한 번 나옴. 기내에서 유난히 소화불량이 잦아서 특별기내식 한국 채식으로 변경. 보통 두부와 우엉조림이 나오며 둘 다 좋아하기 때문에 기뻐하며 취식. 소화 상태도 매우 좋음. 5월부터 코로나 관련 서류 없이 앱을 통해 사전입국심사가 거의 완료됐고 찾을 짐도 없기 때문에 물 흐르듯 통과. 후쿠오카공항-유후인을 연결하는 버스 시간까지 무려 2시간이 남았고 이럴 땐 공항 편의점을 털어줘야 함. 일단 타케노코노사토와 커피맛 두유부터. 한국에서도 건어물 여동생 우마루짱 때문에 인지도 높은 타케노코노사토. 해석은 죽순(타케노코)마을(사토)로, 우리 식으로 하면 대략 초코죽순쯤 될 듯(?). 과자 부분이 약간 버터링쿠키 같이 부드럽고 먹다 보면 조금 질림.
세븐일레븐 신제품 이나리스시(유부초밥)는 초밥에 이와시타 생강초무침을 넣어 넘나 상큼함. 쌀밥의 질감이 다르다. 이토엔 호지차도 굉장히 맛있음. 한국에서 호지차가 이상할 정도로 고오급 상등차로 분류되는데 반해 본토에서는 거의 보리차와 유사한 등급이라 마음껏 즐길 수 있음. 둘 다 국내 도입이 시급함. 이밖에도 언제나 정답인 명란젓 삼각김밥과 다마고산도를 겟겟. 후쿠오카 공항에서 유후인까지 약 1시간 반 정도 걸리는데 가는 내내 입이 매우 즐거웠음.
유후인역 도착. 카이 유후인에서 픽업 차량을 보내줄 때까지 1시간 조금 넘게 남은 관계로 근처의 녹차아이스크림 전문점 테라토(テラ―ト) 방문. 말차 젤라토는 가벼운 1단계부터 농후한 6단계까지 있는데, 6단계는 컵 단위로 팔지 않는 듯. 이날은 말차 5단계 도전. 매우 흡족한 진하기라 마음에 들었음. 둘째 날 한 번 더 와서 호지차맛 젤라토를 먹었는데 역시 구수하고 맛있었음. 개인적으로는 말차 5단계가 가장 취향. 500엔.
취향의 말차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유후인역에서 유후인노모리 기차 예매권을 탑승권으로 교환. 기계로 알아서 해보려 했는데 계속 에러가 나서 결국은 단 한 칸뿐인 역무소 직원 분께 받음. 굉장히 친절하게 탑승일과 시간, 탑승 장소를 설명해 주심. 더불어 간 김에 유후인역 내부에 있는 족욕탕 이용권을 구입. 인당 200엔. 기차가 드나드는 걸 구경하며 온천물에 족욕을 즐길 수 있음. 유료라서 수건도 주고 무엇보다도 사람이 거의 없음. 발은 뜨끈하고 호지차는 시원하고. 뭐 그저 극락임.
말차 젤라토 먹고 족욕도 하고 시간이 술술 흘러서 카이 유후인의 픽업 시간이 다가옴. 정확히 어떤 차량이 오는지 몰라서 약속 장소에 조금 일찍 갔더니 카이 유후인 팻말을 든 직원이 접근해 옴. 카이 유후인, 3시, 바쿠입니다- 넵, 잠시 기다려주세요- 직원과의 간단한 티키타카 이후 곧 택시가 도착. 다른 료칸들은 대부분 승합차에 합승 시스템이었는데 카이 유후인은 택시 단독 탑승임. 게다가 무료 송영 서비스. 호시노야 계열이라 역시 다르군- 세심한 서비스에 크게 감탄.
유후인역-카이 유후인은 차량으로 10분 내외의 거리지만 도보로 접근하기는 어려운 환경임. 대부분 경사로의 찻길이고 도보용 인도는 없음. 카이 유후인으로 가는 길은 갓 모내기가 끝난 논 풍경이라 눈이 매우 즐거움. 하늘이 비친 물을 파랗고 갓 심긴 벼 이삭은 조그맣고 초록초록함. 환상의 콜라보. 이걸 보러 왔지. 흠.
카이 유후인의 입구. 택시에서 내릴 때부터 카이 유후인 스탭들의 어마어마하게 정중하고 조용한 환대에 약간의 부담과 함께 몸 둘 바를 모르게 됨. 캐리어 따위 없이 단출한 행장에 약간 당황한듯 보이는 직원의 안내로 어쨌거나 카이 유후인 본관 입장.
좋은 오후, 바쿠라고 하옵고, 실례지만 영어로 괜찮을까요- 시전. 영어는 물론 가능하며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한국어 능통 직원도 있음. 카이 유후인의 모든 스탭들은 내가 마치 갓 태어난 아기사슴인양 절대로 세워두려 하지 않음. 솔직히 밥솥 가마로 장식된 프런트 데스크를 좀 구경하며 체크인하고 싶었는데 담당 스탭 분이 조심스럽게 소파로 인도해 고분고분 따랐음. 단아한 미모의 담당자는 우리를 소파에 앉히고는 본인께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으신 채 다소 마음 불편한 체크인 및 안내사항 전달을 진행.
카이 유후인 본관은 컨시어지를 비롯해 커피와 차가 상시 준비된 라이브러리, 노천탕을 포함한 대욕장과 휴게 공간(에는 키위, 파인애플, 사과, 포도맛의 소르베 하드와 유후인 특산과일로 만든 신경질적인 신맛이 없는 레모네이드 같은 주스 및 페퍼민트 보리차가 잔뜩 마련돼 있음), 아침과 저녁 가이세키가 제공되는 식당 등이 있음. 그리고 라이브러리 밖의 테라스는 카이 유후인의 탁 트인 계단식 논 풍광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쿠마 켄고 센세가 총력을 기울인 카이 유후인의 건축 전반에서도 특히나 야심작으로 평가됨. 유후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고 처마에 달린 유리 풍경에서 청량한 소리가 남. 여름이었다.
하늘은 파랗지만 구름이 많아서 햇살이 버겁지 않고 바람은 제법 서늘한 가장 좋아하는 날씨가 펼쳐진 카이 유후인은 천국임. 하늘이 계단식 논을 가득 채운 물에 반사되고 초록초록 아기 벼가 모내기를 막 끝내서 귀욤하게 줄지어 있음. 주변의 신록은 초여름을 맞아 그저 초록색. 이건 뭐 꿈꾸던 장면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지니 현실감이 없었음. 키얏호우- 뭐 이런 소리를 내는 나를 담당 스탭 분이 매우 흐뭇하게 지켜봄.
그리고. 드디어. 카이 유후인의 하이라이트가 될 계단식 논의 독채로 간닷! 저기 보이는 두 채 가운데 오른쪽의 논에서 가까운 독채가 당분간 우리집이렸다. 담당 스탭의 재촉 없는 안내에 따라 신중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중.
(딱히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사진·본문 불펌은 안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