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6년 11월 4일/2021년 1월 7일
1796년 11월 4일. 노상추 51세
11월 초4일(을사) 새벽에 또 눈이 내리다가 그대로 개고 바람이 조금 불었으며, 저물녘에 추운 기운이 있었음.
어제 전해 들으니, 지난번에 원자께서 두역痘疫을 피하던 날에 임금께서 원자를 데리고 춘당대의 영화당暎花堂에 납시었다. 그 때 장용영 대장인 판서 김지묵金持黙이 입시했는데, 임금께서는 혜경궁惠慶宮에 납시고 원자만 홀로 계셨다. 원자가 김지묵을 보고 말씀하시기를, “대감이 나와 바둑을 두어 승부를 정하시겠습니까?”라고 하시니, 김지묵이 “예, 하교하신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하므로 그대로 바둑을 두게 되었다. 한창 바둑을 두고 있는데 궁궐 문에 특별히 입직한 자가 곁에서 바둑을 구경하다가 원자께서 수를 잘못 읽으시는 것을 보고 곁에서 몇 수 조언하였다. 하지만 이 말을 듣지 않고 돌아보지도 않고 화난 목소리로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다. 이처럼 하기를 세 차례나 했는데도 정색하고 태도가 변하지 않으니, 곁에서 도우며 훈수한 자가 비로소 뜰로 내려와서 땅에 엎드려 죄를 청하였다. 이에 화난 목소리로 꾸짖기를 “승부는 내게 달린 것인데, 네가 어찌 감히 입을 열어 훈수하는 것이냐? 또 대감과 대국을 벌이는데 네가 대감에게 어찌 이와 같이 한단 말이냐? 차후에 만약 이 같은 일이 있으면 마땅히 엄히 죄를 물을 것이니 잘 알아두라.”고 하시고 그대로 바둑을 마쳤다. 김지묵이 끝내기를 청하자 이에 말씀하시기를, “바둑이 이미 끝났는데, 내가 두 집을 졌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집을 계산해 보니 과연 두 집이었다. 이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미 졌으니 내기를 걸었던 것을 시행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필묵筆墨을 넉넉히 지급하였다. 또 종이를 가져다가 1백 섬의 쌀을 적어서 선혜청宣惠廳에 내리셨는데, 김金 공公이 사양했으나 들어주지 않으셨다. 잠시 뒤에 임금께서 환궁하시어 그렇게 한 까닭을 물으시자 웃으며 말하기를, “1백 섬 쌀은 지나쳤습니다. 10섬으로 고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참으로 탁월하고 아름다운 본보기다. 늦게 해남海南 수령 이현보李顯甫 및 선전관 문여집文汝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제 삭시사朔試射에서 날이 저물어 기추騎芻를 시험하지 못했는데, 기추 이전의 시험에서 점수를 받지 못한 사람이 6인이었다. 그러므로 임금께서 하교하시기를, “아직 행하지 않은 기추 시험은 거행하지 말라.”고 하시고, 지금까지의 성적을 모두 없애 주셨으니 이것은 사람을 길러주시는 성상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들으니, 감찰 장언극張彦極이 고향에서 그저께 도성으로 들어왔다 한다.
2021년 1월 7일.
우리집 유행어 중 하나로 "황제 바둑두기"가 있다. 용례는 "황제 바둑두기 해줘". 뜻은 황제와 바둑을 두는 것처럼 재능을 뽐내며 대결에서 이기려 들지도 않고, 그러나 겸손하게 져 주지도 않으면서 아슬아슬한 재미를 주고는 종국에는 져 달라는 이야기이다. 중드 <천성장가>에서 여주가 황제와 바둑을 두는 장면을 보고 나서는 우리집의 유행어가 되었다.
왕이 춘당대로 데리고 온 원자. 후일의 순조이다. 1790년생이니까 1796년이면 우리나라 나이로 7살이다.(맞나?) 아무튼 일곱살짜리 조무래기가 장용영 대장한테 바둑을 두자고 청하는데, 왕 앞에서 조무래기랑 바둑을 두자니 아주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또 일곱살 짜리가 바둑을 잘 두면 얼마나 잘 두겠는가. 그러니 주위에서 훈수를 둔 것이다. 하지만 주위의 일곱살 짜리들을 보라. 승부에 있어서는 얼마나 자존심들을 세우는지. 오죽하면 아이들을 모을 때도 "누가 제일 먼저 오나 볼까~?" 하면 딴청하고 놀던 아이들까지 일제히 달리기 시합을 하곤 한다. 그러니 원자는 화가 날 수밖에.
설령 조무래기라 할지라도 원자는 원자이다. 일곱살짜리 원자는 훈수를 둔 자를 기어이 뜰에 끌어내려 엎드리게 하고는 훈수두지 말라고 성을 낸다. 바둑 두던 김지묵은 바늘방석이었을 것. 김지묵이 바둑을 끝내자고 청하자 원자는 순순히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다. 그리고는 상금으로 쌀 100섬을 내려주기로 하는데, 나중에 정조가 이 일에 대해 묻자 역시 100섬은 너무 많죠? 쌀 10섬으로 고쳐 내릴게요. 라며 웃는다. 이 정도면 그래도 귀여운 조무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