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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sonata Mar 15. 2024

할머니 94세

할머니께 보내는 편지

사랑하는 할머니,


꽃과 나무를 아끼시는 우리 할머니의 아흔네 번째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저희는 주말에 사막이 보고 싶어서 주립 공원으로 여행을 떠났어요. 봄이 시작하는 이 시기를 놓치면 기온이 높아져서 사막의 자연을 즐기기 어려워지거든요. 오랜만에 찾은 사막은 여전히 고요를 품고 있었어요. 그리고 사막을 둘러싼 웅장한 산맥과 푸르른 바람은 너그럽게 우리를 반겨주었죠. 그렇게 한참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달리고 있는데 엄청난 규모의 야생화 군락이 나타난 거예요. 드넓은 사막을 가로지르는 도로에서부터 좌우로 뻗어나간 봄꽃의 물결은 저 멀리 산 밑자락까지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어요. 할머니께서 보셨더라면 연거푸 탄성을 토해내셨을 거예요. 차를 세우고 사막에 발을 내딛는 순간, 바람에 실려 온 은은한 꽃향기는 어릴 적 분첩에서 맡았던 향기와 비슷했어요. 그리고 꽃무리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길섶에 핀 들꽃을 만나면 아이처럼 좋아하셨던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어요.


할머니, 올해는 <아무도 죽음을 모르지만>이라는 책을 읽다가 위로가 되어준 글을 소개해드릴게요. 이 작품을 쓴 김수이 작가는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을 통해 마주한 죽음과 장례 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줬어요. "슬픔 또한 화장실 타일의 줄눈 같은 거라서, 깨끗하게 하얀색으로 메웠다고 생각하지만, 훗날 한 겹 한 겹 떨어져 다시 예전의 색이 드러날 것이다. 그대로 두거나 다시 꼼꼼하게 메워도 언젠가는 다시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일이라서, 장례를 치르며 슬픔을 추스르더라도 곧 다시 차오를 것이다. 다만 그것이 끝없이 커지는 것을 막아, 후회 없이 각자의 방식대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각자의 방식으로 장례식을 택했으면 한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며 누군가 나의 슬픔과 애도의 경험을 이해해주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그러자 호흡이 차분해지고 떨리던 가슴도 잔잔해졌어요.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며 할머니의 14주기를 맞이하는 2024년에 이르러서야, 할머니의 '임종'과 '장례식'의 모든 장면과 대면할 수 있게 된 저를 발견했어요. 그럴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사이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안아드렸던 30대 중반의 손녀는 어느새 오십의 문턱을 넘었어요. 결코 쉽지 않은 애도의 여정이었죠. 할머니를 여윈 슬픔과 그리움의 무게는 저를 송두리째 낚아채서 순식간에 칠흑 같은 바다의 밑바닥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괴력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끝도 없이 가라앉을 수 있었던 저의 영혼을 다시 빛과 공기의 세상으로 이끌어 준 것 또한 할머니의 존재였어요. 한평생 할머니로부터 받아온 사랑이 저의 뿌리가 되어주고 날개가 되어주었기 때문이에요. 할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믿음 덕분에 그 어렵고 힘든 시기를 견뎌낼 수 있었고, 삶의 중심을 잡고 변화와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었어요. 물론 김수이 작가의 말처럼 저의 슬픔 또한 화장실 타일의 줄눈 같은 거라서 페이고 메우기를 반복하겠지만, 그 또한 삶의 한 과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 지금은 14년 전의 저보다 한결 평온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수 있어요.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지천명(知天命)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할머니, 저는 오십을 맞이하며 "할 만큼 했으면 너무 애쓰지 마라"는 할머니의 가르침을 실천해 보려고 해요. 저는 지금까지 열심히 사는 것과 최선을 다하는 것에 (너무) 몰두해 왔었는데, 이제부터는 (너무)를 내려놓고,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나면 더 많은 무엇을 하려고 애쓰지 않으려고요. 사뭇 진지하게 드리는 말씀인데 할머니의 가르침은 마치 요술 방망이 같아서, 제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가장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명언이 그 요술봉을 통해 흘러나와요. 그러니 제가 어찌 할머니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이렇게 변함없이 귀한 가르침을 주시니 말이에요. 


그리운 할머니,


사막의 아름다운 야생화도 시절인연에 따라 피어난 자연 전체의 작품인 것처럼, 인간의 삶 또한 결코 한 사람의 의지만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저는 할머니를 여의고 할머니를 다시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배웠어요. 지나온 혼돈의 시간을 되돌아보면 결국 인생은 무질서와 질서 사이를 오가며 균형을 유지하는 노력의 연속인 것 같아요. 할머니, 오늘 아침에는 따뜻한 카모마일 차를 올리고 흰 복숭아 향(香)을 피워드렸어요. 자애로운 우리 할머니께도 이 달콤한 향운(香雲)이 닿기를 바라면서 이제 편지를 마무리하려고 해요. 할머니, 많이 많이 사랑해요. 그리고 아주 많이 보고 싶어요. 


Happy Birthday, Grandma!


2024년 3월 14일 (음력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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